〈 93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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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10일.
이범석 총리가 중앙청으로 향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중앙정보부법 개정안, 조선황실법 개정안. 일명 '제국익문사 3법' 개정을 놓고 야당과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국회 일정이었다.
원내 185석의 거대 여당이 태풍처럼 밀려와 3법의 개정을 추진하니 위원회 단계서부터 날치기식 진행이 이루어져 반개월도 안되어 본회의까지 올라왔다. 그러다보니 야당인 신민당이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방적인 진행이 어디있나?! 이게 민주주의냐!>
<국가의 정보기관을 황제 직속으로 두겠다니 이건 악법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고 말겠다!>
그 '무슨 수'가 소수 야당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가 뻔히 알고 있었다.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상 절차대로 할 경우 소수야당은 무조건 진다. 그래서 이 경우 야당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은 '물리력'이 된다.
<본회의장을 점거해서라도 표결을 막아야 해!>
그리고 그것은 이연이 원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거야. 머리채도 쥐여잡고 멱살도 잡으면서 의사봉 하나를 놓고 투닥투닥 다투는 모습. 국민들이 한숨을 쉬며 쳐다보겠지.>
<총리에게 이르게.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까 정공법으로 나가라고. 싸우면 싸울수록 좋아. 법안 처리가 지지부진해도 그런 모습이 국민들에게 생생히 나가면 대안은 내가 되는거지.>
국민 여론이 야당의 편이었다면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진 않았을테다. 하지만 국민들은 어느 한순간도 신민당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일 잘하는 조직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당연한거지!>
8.15 암살미수사건에서 보여준 경찰의 실망스러운 모습. 그에 대비되는 중앙정보부의 유능한 판단. 그런 여론을 주도해온 친여성향의 신문 3사까지. 3박자가 어우러진 주도면밀한 공세는 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유능한 자가 유능한 조직을 이끌고 국가를 유능하게 이끄는거야! 그럼 좋은거 아닐까?>
그 '유능한 자'가 신민당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무적의 정통성.
독립운동가 출신의 영웅, 북진통일을 달성한 한국전쟁의 영웅, 한강의 기적을 일군 경제의 영웅, 얼마전에 밝혀지기론 제주도에서 발생할뻔한 민간인 학살까지 막아낸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군인.
도저히 흠잡을 곳이 없는 영웅의 후광이 국민들의 눈을 돌아버리게 만들어 이제는 민주주의 같은건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길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황제의 전제군주제를 지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주의가 별거야? 우리가 지지하면 그게 다 민주주의 아니겠냐고! 황제 폐하 만세!>
그런 여론을 뒤로하고 이범석 총리는 국회에 도착했다.
중앙청에 있는 국회 하원 본회의장. 굳게 닫힌 입구가 이범석 총리의 갈길을 막고 있었다. 문 너머엔 신민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진을 치고 있을테다. 어떻게든 제국익문사 3법을 막아내기 위해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자네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총리 뒤에는 군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넥타이를 풀고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짱짱한 체격에 힘 좀 쓰는 의원들이 금뱃지를 달고 있는 여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장군 출신이 즐비한 황제의 친위정당이었으니까.
의원들 뒤로는 방송사 기자들까지 줄을 섰다. 국회의원들이 제국익문사 3법을 놓고 싸우기 시작하면 그것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국민들에게 보여줄 심산이다. 민주주의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모든 국민이 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싸우면 싸울수록 국민들이 불신하겠지. 의회민주주의가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어.'
그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도 난 전제군주제를 만들어낸 총리로 역사에 남을 거 같군."
총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독립당의 총재. 185석 거대 여당의 대표. 모든 영웅들의 영웅왕. 그의 허락에 여당 의원들이 문을 열고 본회의장으로 입성한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익숙한 사내의 외침에 이범석 총리가 눈을 떴다. 당황하는 의원들 사이로 국회 하원 본회의장의 단상이 보인다.
"점거가 안되어있다고?"
당황하는 영웅의 눈에 평범한 사내가 보였다. 신민당의 부총재 김대정.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았던 일반인. 중년의 국회의원은 당당한 모습으로 연설대에 서서 여당의원들을 맞이하였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서 본회의를 시작하시지요."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95석 밖에 안되는 놈들이 정공법으로 가면 법안처리를 어떻게 막겠다고 이러나?"
대한제국의 야당 신민당의 의석은 고작 95석. 무소속 의원들을 설득해 범야권을 형성해도 고작 115석.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힘없이 무너지고 말 소수 야당은 오히려 본회의 진행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정상적인 진행을 기다리는 그들 앞으로 딱 한명. 부총재 김대정만이 첫 발언을 위해 연설대 위에 서있을 뿐이다.
그의 태연한 모습에 한독당 총재 이범석이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
"너희들은 우릴 이길 수 없어. 그런데도 정정당당하게 맞서겠다니. 자포자기라도 한건가?"
"우린 보여줄겁니다. 대한제국의 민주주의. 신민당의 가치와 애국. 우리들의 대의를 똑똑히 보여드리지요."
그는 웃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행동이 영웅의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보여주자니 대체···."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이것이 김 부총재의 독단인지 모두의 판단인지 보고 싶었다.
영웅의 눈에 김영현 총재가 들어왔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역시나 아무런 공적이 없는 평범한 일반인 출신이다. 40대 기수론으로 당권을 휘어잡은 야당 총재는 이범석 총리에게 말했다.
"마 우리도 애국이란게 있다 아입니까?"
기습적으로 튀어 나오는 경상도 사투리가 낮설게 느껴졌다.
"자네 경상도 사람이었나?"
"그리 오래 서 계시믄 의사진행 방해입니다?"
"아, 그래···."
신민당이 처음에 계획했던 건 본회의장 점거였다. 김영현 총재와 김대정 부총재는 소속 의원들과 함께 본회의장을 걸어잠그고 농성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김대정 부총재가 말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김영현 총재는 이상한듯 물었다.
<뭘 말입니까?>
<우리가 이런다고 막아지겠습니까?>
<이렇게라도 안하면 어찌 막으실려고?>
<우린 민의의 대변자입니다. 좋든 싫든 국민들은 제국익문사3법을 지지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 우리가 농성을 벌이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들 어찌 보겠습니까?>
<국민들은 틀렸어요. 그들은 영웅의 후광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있지요. 우리라도 정신 차리고 싸워야지. 포기하면 이 나라 민주주의는 누가 지킨답니까?>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건 우리의 무능이에요. 그런 우리가 국회에서조차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면 남아있는 지지자들이 절망하고 말겁니다.>
그러면서 김대정 부총재는 간곡히 말했다.
<어차피 못 이기는 싸움이에요. 막말로 본회의장을 옮겨서 날치기라도 하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질거라면 당당하게 집시다.>
<당당하게 지자구요?>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는 이곳에서 싸움이나 하는 국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텅 비어있는 국회의 본회의장을 쳐다보았다. 아직 한국독립당 의원들이 들어오기 전. 날치기라도 당할까 새벽부터 진을 치고 농성하던 그곳에서 그들은 회의감을 느끼고 말았다.
부총재의 뜻을 이해한 김영현 총재는 허망한 눈빛으로 손에 쥔 쇠사슬을 쳐다보았다. 회의장을 아예 잠가버릴 생각이었다. 쇠사슬을 꽁꽁 묶어버리고 자물쇠까지 채워놓겠다는 계산. 그게 뚫리면 95명의 야당 의원과 20명의 무소속 의원들이 단상에 집결해서 의사봉을 지켜낼 생각이었다.
의원들 중에는 국회의장을 잡아 가두자는 사람도 있었다. 의장을 잡아서 본회의 진행을 못하게 막아버리면 어쨌든 제국익문사 3법은 막을 수 있지 않겠냐는 계산이었다. 그만큼 의원들 모두가 절박했다. 하지만 김대정 부총재의 말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마··· 이게 민주주의는 아이지···.>
질 때 지더라도 민주주의자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지자는 부총재의 설득에 모두가 공감했다. 그렇게 12월 10일. 김영현 총재의 결심으로 노선 전환이 이루어져 무력 투쟁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국회 하원의 본회의. 연설대 위에 선 김대정 부총재는 결연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존경하는 여야의원 여러분들께 무제한적인 토론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한독당 의원들이 술렁였다.
<무제한 토론이라고? 그게 뭐하는 거지?>
여당 의석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이범석 총리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시간을 무제한으로 두고 토론을 벌였을 때 생길 수 있는 일.
'이대로 쭉 시간을 끌면? 아니야··· 그걸로 법안을 막아낼 순 없어. 오늘은 12월 10일이야. 국회 모든 일정이 끝나려면 31일까지 버텨야 할건데··· 21일동안 무제한 토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각오가 무엇인지 노인은 깨닫고 말았다.
'이길 생각으로 나온게 아니구먼···.'
김대정 부총재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범석 총리처럼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니요, 이연처럼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태어난 그 일반인의 연설이 1시간을 넘어 2시간, 3시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생각했을 때 중앙정보부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심사숙고하여야 합니다. 절대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며···."
<으아아··· 연설이 끝나지 않아! 이 양반 도대체 몇 시간동안 연설하고 있는거야!>
누구는 잠을 자고 누구는 본회의장을 나가버리고 기진맥진 하는 여당의원들의 전열이 속수무책으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오로지 그 영웅. 75세의 노인 이범석 총리만이 김대정 부총재의 발언을 꼿꼿하게 듣고 있었다. 그렇게 5시간이 넘어갔을 때 총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미쳤군··· 5시간 19분동안 법안에 관련된 내용만 말하다니. 이 법이 어떤 내용이고 왜 통과되어선 안되는지 주도면밀하게 설명하고 있어.'
그리고 오른손을 살며시 들었다. 여당 총재 겸 대한제국 총리가 신호를 보내니 하원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며 김대정 총재의 발언을 중지시켰다.
"발언을 마무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장님!"
그리곤 이범석 총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나? 김의원?"
그리곤 피식 웃어보였다.
"무제한 '토론'이라면 상대방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그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연설은 언론을 통해 전국민에게 중계되고 있었다. 5시간 19분의 연설로 신민당은 온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을게 분명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줄 수는 없었다.
'재미있는 전략을 짰어. 질 때 지더라도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대의를 보여주겠다 이거구만. 그렇다면 우리도 질 수 없지.'
연설을 하면 하는 만큼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상황이었다. 국회 연설은 국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기회. 그래서 이범석도 2시간 30분에 걸쳐 제국익문사 3법의 당위성을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영웅의 연설에 대오가 흐트러진 여당의원들이 자리를 잡았고, 영웅의 반격에 위협을 느낀 신민당도 반격의 반격을 결심했다.
신민당 총재 김영현은 3시간 37분동안 연설했고 그 뒤로 여야 중진들이 토론을 주고받으며 이날의 본회의는 끝을 모른 채 이어졌다. 너무 길어져서 중간중간에 교대로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를 하고 오는 등 국회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한제국 역사상 최초로 있었던 이 날의 필리버스터는 여야의원이 모두 뛰어들면서 '의사진행 방해'라는 본래 목적을 상실했고, 한국식 번역인 '무제한토론'이라는 단어에 맞게 '시간제한 없이 벌어지는 끝장토론'이라는 느낌이 되었다.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하루 종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고, 그걸 쳐다보던 국민들은 경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의 민주주의인가!>
무작정 지지해줬던 제국익문사 3법이 어떤 내용이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입장을 모두 들으며 영웅의 후광에 눈이 멀었던 국민들은 천천히 시력을 회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