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86화 (86/131)

〈 86화 〉 Ep10. 국가가 무너지는 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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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26일.

찬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저녁 7시. 경복궁의 경회루였다. 눈을 질끈 감은 진혁이는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았다.

“진혁아~♥”

귓가에서 황태녀 전하의 닭살돋는 소리가 들린다. 듣고 싶지 않은데 귀를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손은 여자의 손길에 봉인당한지 오래.

“왜 그래 진혁아? 어디 아파?”

"아픈건 아니고···."

“왜 또 각목 같이 그래~ 우리 휴가나왔잖아~ 휴가 나왔으면 즐겨야 하지 않을까? 경회루는 지금 우리 둘 밖에 없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또 어명이란 걸 내려야 알아듣겠니? 우리 진혁이. 귀 틀어막지 말고 눈 뜨고. 어명이다?”

“황태녀 전하는 임금이 아닙···.”

"어허. 내가 이 나라의 유일한 계승권자인데. 고귀하신 몸이 내리는 명령을 거부할 셈이야?"

그 여인 이은서. 30세 진급대기의 노처녀. 진혁이의 품에서 사랑에 눈을 뜨고만 공주님. 진혁이가 데이트마다 각목같이 서있던 이유를 알아내고는 딱 좋은 장소를 골라냈다.

경회루

경복궁 안에 있는 전각으로 연못을 바라보고 서있는 2층 높이의 전통 건축물이다. 탁트인 시야 속에 불어오는 찬바람조차 낭만적인 대한제국 황실의 정원이다. 이곳의 최대 장점. 경호가 필요없다. 경복궁은 황실이 아니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사유지니까. 고층빌딩도 없고 큼지막한 경회루는 별다른 경호가 없어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은서는 진혁이가 '각목처럼 서있을 필요가 없는'곳에 끌고와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 오자고 휴가쓰고 헬기까지 타고 왔잖아. 우리 데이트하기 딱 좋은 장소 아니겠니?"

몸을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하며 은서는 말했다.

"나 추운데 이렇게 가만히 놔둘꺼야? 그 때 처럼 다시 안아줘야지~♥”

“으, 아··· 그만! 그마안!!!”

돋아나는 닭살을 참다 못한 진혁이는 결국 눈을 뜨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30세 진급대기의 김진혁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왜 이러십니까? 안 어울리게!”

샘통난 은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그 여자 이은서. 단지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었을 뿐인 황태녀.

“우씨! 기껏 노력해줬더니만! 왜 이래? 낭만없게!”

“이··· 이게 낭만입니까?”

은서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너 또 군대 말투 쓴다? 내가 군대 말투 쓰지 말랬지! 요를 쓰라고 ‘요!’ 이게 낭만인가 ‘요!’ 왜 이래 ‘요!’ 사랑해 ‘요!!!’”

“마지막 단어는···?”

“말해 당장! 사랑한다고! 어명이다 김진혁 중령!”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야! 이게 부당해? 아니 왜 좋아한대두 뭐라 그래!”

“그야···.”

너무 고귀하니까.

영웅의 딸. 그 자체로 영웅.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는 너무도 고귀했으니까. 그게 너무 황송해서 사랑하는 마음보다 부담감이 컸으니까.

“지금 경회루. 저희 둘밖에 없죠?”

“당연하지! 경복궁은 문화재가 아니라 황실의 사유지니까! 황실이 아니면 누가 허락을 받을 수 있겠냐?”

“저희가 왜 여기서 데이트를 하고 있습니까?”

“경호가 강화되서 사람 많은 곳은 가지 말래잖아. 길거리마다 사람이 북적북적대는데 황태녀인 내가 어딜 가서 데이트를 하겠냐고. 이런 곳이라도 와야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황태녀 전하께 진혁이는 말했다.

“그 정도로 고귀하신 분이니까.”

“고귀해서 사랑해줄 수 없다니, 거절도 거절다운 이유를 대야 들어줄거아냐···.”

“너무 고귀해서 사람조차 함부로 만날 수 없는 분이시죠. 지금 황태녀 전하께서 만나실 수 있는 남자라고는 저 같은 친위대원들 뿐이니까요."

“그게 뭐 어때서?”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이유. 다 압니다. 나도 남자 만나서 사랑도 해보고 결혼도 해보고 싶은데, 만날 수 있는 남자라고는 저 뿐이니까.”

진혁이는 강조하여 말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

"선택권이 저밖에 없는건데요. 전 이게 강요나 다름 없다고 생각···."

그러자 은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진짜 이 천상 고자새끼.”

“예?”

“이 등신아! 그걸 니가 왜 따지고 있어!!!”

제자리서 방방 뛰며 성질내는 황태녀 전하는 한마리의 소 같았다. 시뻘개진 얼굴로 있는 화 없는 화 다 끌어내어 분출하는 그녀 모습이 두려울 지경이다.

은서는 항변하듯 말했다.

“야! 내가 미팅 한번 제대로 못하는 처지인 건 맞는데, 그래도 결혼하겠다는 잠재적 후보가 줄을 서있거든? 이 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부잣집 자식들 다 나만 노리고 있을건데 남자가 없겠냐!?”

“그건 진심어린 사랑이 될 수 없겠죠! 권력을 노리고 달려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담긴 가면 뒤 사랑일테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이런건 내가 따지고 내가 아쉬워해야지 니가 왜 신경쓰고 있냐고! 이 고자 새끼야!!!”

진혁이는 늘상 이랬다. 남들보다 12단계는 앞서 나가서 상대방을 배려한다.

황태녀 전하를 사랑하고, 사랑해서 깊이 이해하고, 깊이 이해하다보니 그녀의 처지에 공감한다. 그 처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 나머지 12단계나 앞서 나가서 거절할 이유를 발견하고 만다.

나 같은 놈이 전하께 어울릴까? 나같은 놈과 결혼하면 전하께서 행복해하실까? 나같은 놈보다 좋은 남자가 많을텐데, 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어, 권력자의 남편이 될 내가 내조란 걸 잘 할 수 있을까? 정치 공학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난 아무런 배경이 없어. 전하의 권력에 힘이 되어드리지 못할거야.

오늘도 그랬다.

은서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진혁이의 이유는 ‘전하께서 나를 좋아하시는 건 남자라고 있는게 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죄책감마저 들어버린 게 이 남자의 12단계 배려의 종착지.

<허물없이 비정치적으로 만날 수 있는 남자는 오로지 나 뿐이니까. 전하께는 좀 더 다양한 남자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진혁이의 속마음을 은서도 알고 있었다. 73년에 재회하여 이런저런 악연과 인연을 겹겹이 쌓아가면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달렸다.

"이 병신아! 날 신경쓰지 말고 니 속마음을 신경쓰란 말이야! 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 그게 그렇게 어렵냐?!"

역시 진혁이는 고자가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고자새끼다. 은서는 그렇게 데이트를 또다시 망쳤다.

127회차 데이트였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던데 벌써 127번을 찍어봤다. 내일은 128번째 도끼질을 해볼 것이다.

***

“도와주세요! 비서실장님!”

은서는 비서실장님의 집무실을 찾았다. 128번째 도끼질을 눈앞에 두고 있는 10월 27일의 일요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휴일까지  출근해서 과로를 하고 있는 이화는 진절머리가 난 표정으로 물었다.

“예전엔 진혁군이 여길 쳐들어와서 도와달라 그랬는데··· 이번엔 전하께서 직접···.”

“아니 그 곶··· 아니, 진혁이가 답답해 미치겠으니까 그렇죠!”

“우리 진혁군이 또 무슨 짓을 했길래···.”

“자상한건 좋은데 사람이 앞서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무슨 놈의 배려가 12단계를 앞서가냐구요. 이러다 아주 ‘전하보다 일찍 죽을까봐 결혼을 못하겠어요’ 소리까지 나올거 같다니까요?”

은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무실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중정 요원 출신이면 남자 유혹하는 법도 많이 아시겠죠? 미인계 같은거!”

“어 음··· 저는 그쪽 방면은 좀 어려운데···.”

“에이 거짓말. 대한제국 최고의 요원이셨잖아요! 게다가 프랑스 유학파!”

“그건 어떻게 아시는거죠?”

“진혁이에게 들었죠!”

“아···.”

“어쨌든! 미녀 스파이의 기술! 딱 하나만!”

지난 8.15 사건 이후로 중정의 위상이 이상한쪽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이화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음··· 뭐랄까? 애절한 마음으로 동정심을 얻어보는건?”

“동정심?”

“그··· 제가··· 말을 하기 어려운 사정이 좀 있어서요. 요원 생활할 때도 미인계쪽은 안했는데···.”

“사정이요?”

“있어요 그런게···.”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10대 시절 모진 고문으로 온몸 곳곳에 흉터 투성이라 미인계를 쓸 수 없다고. 한 평생 치마 한번 입어보지 못한 비서실장은 조언이라고 해줄 수 있는게 이것 밖에 없었다.

“사람은요.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에게는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거든요. 도와주고 싶고··· 막 그런··· 아니 아니지··· 뭐래니? 어휴···.”

혼란스러운 머리 속에 이화는 이렇게 생각해버렸다.

‘그냥 막 던져버릴까?’

그리곤 비장한 각오로 결의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냥 덮치시죠.”

“에?”

얼음이 되어버린 은서에게 이화는 재차 강조하여 이렇게 말했다.

“진혁군이 12단계나 건너뛰면서 걱정해주는거. 결국 전하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좋아하는게 지나쳐서 결혼생활 끝에 늙어죽는 상상까지 도달해버리는···.”

“그쵸?”

“그냥 확 기정사실을 만들어버려요 걍.”

“어··· 진짜? 나 그래도 돼? 황태녀인데?”

“아... 아닌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가 생겨버리면 이 나라 황실의 위신이···.”

사랑 이야기에 제스스로 혼란에 빠진 비서실장님을 바라보며 은서는 냉소적인 표정을 담아 이렇게 생각했다.

‘설마··· 이분도 모태솔로야?’

은서는 모르고 있었다. 비서실장님의 아픈 속을 건드려버렸다고. 과거는 커녕 본명조차 모르고 있는 황태녀는 결국 아무런 도움도 얻을 수 없었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은서는 오늘따라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만다.

‘엄마··· 사랑이란건 어떻게 해야하는거야?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황태녀는 그저 사랑이 고팠을 뿐이다.

***

“연애 상담이라··· 그런 문제라면 내가 전문인데 말이야.”

집무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이연은 재미있는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귀여운 딸내미. 사랑 문제로 고민하는 날도 오는구만.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이화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예컨대 나라를 구한 다음 그걸로 청혼을 해라. 그런 식이시겠죠?”

“......?”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청혼을 하시어 마음을 얻으신 방법. '너의 조국 조선을 해방시켜서 선물로 주겠다. 그걸로 프러포즈를 할테니 돌아오면 나랑 결혼하자.'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랬지?”

'그게 도움이 될리가 없잖아요···.'

프러포즈조차 초월적인 방법으로 해버리는 영웅의 사랑 이야기는 딱히 도움이 안될거 같다고 이화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은 황태녀 전하의 문제보다 지난번 배신자가 문제입니다."

"아직도 입을 안 열던가?"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입을 너무 잘 열어서 문제죠."

이화는 김재필 부장이 건네준 보고서를 황제에게 올렸다. 고문한번 할 필요 없이 술술술 얻어낸 정보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중앙아시아 태생의 소련 사람이라는 점. 한국어와 문화를 익혀서 친위대에 침투했다. 니 새끼들 침투하는거 별로 어렵지 않더라. 한쪽 손이 날아가버린 그 놈은 여전히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대한제국을 완전히 물로 보고 있었다.

"CIA도 냄새를 맡았는지 소련 스파이를 심문하게 해달라며 아우성입니다."

"미국 놈들이?"

"한 달 뒤면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대한제국을 방문하게 되어있죠."

"그랬지. 정상회담 일정이 잡혀있으니까."

"제가 건네드린 보고서의 마지막 줄. 그 내용을 미국이 알고 있거나 알아버리면 일이 골치아파질겁니다."

이연이 보고서를 넘겨가며 마지막 페이지 끝에줄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굳어지는 표정과 살기가 피어나는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 죽여버려야겠군. 너무 많은 걸 알고있어."

"김 부장이 적당히 처리해줄겁니다. 그보다도 폐하께선 정상회담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는게···."

"이것도 최악을 대비해야겠지?"

"예."

두 사람이 읽어본 보고서의 마지막 줄. 소련의 스파이가 대한제국에 보낸 경고는 이랬다.

<Мы знаем, что Корея исследует ядерное оружие. Если это не остановить, то оно будет продолжаться из раза в раз.  Вы категорически не можете создавать ядерное оружие.>

<우리는 한국이 핵무기를 연구하는 것을 알고 있다. 중단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반복할 것이다. 너희는 절대 핵무기를 만들 수 없다.>

문세광을 죽인 이유가 뭐냐는 물음엔 이렇게 답했다.

<니들이 고문할테니까. 내가 안식을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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