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Ep9. 중앙정보부 (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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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의 일이었다.
주한미국대사 필립 스미스가 덕수궁에 쳐들어왔다. 당당하다 못 해 오만한 발걸음으로 황제에게 알현을 청하니 집무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장 중단하십시오."
이연은 늘 그렇듯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답했다.
"뭘 말인가?"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을 육성하시는거 다 알고 왔습니다."
"실미도?"
단 세글자. 평범한 외딴 섬의 이름이 들리니 이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뜨거운 커피를 내려놓으며 그는 말했다.
"네 놈이 그건 어떻게 아는거지?"
"저희는 미국입니다. 폐하가 뭘 하시고 뭘 숨기시든 다 알아낼 수 있는 나라죠."
"내 나라에서 첩자질을 하고 있었군."
부정하지 않는 미국 대사의 표정에도 분노가 서려있었다.
"어떻게 상상하시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두십시오. 지금 폐하께서 연변에 군대를 보내셨다가 걸리면 그 날로 전쟁입니다."
"협박하는건가?"
"협박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전쟁은 한국과 중국이 하게 될 테니까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이연에게 미국 대사는 몰아치듯 말했다.
"대한제국이 적의 침공을 받으면 미국이 도와드릴겁니다. 하지만 먼저 일으키는 전쟁에 대해선 어떤 도움도 드리지 않겠습니다. 혼자하십시오. 그 전쟁."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이건 경고입니다."
미국대사는 그렇게 간단명료한 경고를 날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인사도 하지 않은채 무례하게 돌아가려는 미국 대사에게 이연은 비웃듯이 물었다.
"그걸로 끝인가?"
뜬금없는 질문에 미국대사는 고개를 돌려 재차 물었다.
"뭘 말입니까?"
"네 녀석들이 알고 있는거 실미도 뿐이냐고."
그러자 미국 대사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더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는 것도 네 놈들의 능력에 달렸지."
"폐하께선 아무것도 숨기실 수 없습니다."
본색을 드러낸 미국 대사의 경고를 들으며 이연은 그저 웃었다. 오늘따라 커피향이 감미로웠다. 머릿속의 무언가를 떠올리며 이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능하군."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미국 정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대사 따위가 손을 쓰기엔 터무니 없이 큰 규모의 시련이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 선거를 대비하여 질나쁜 짓거리를 벌였었다. 워싱턴 시내 워터게이트 호텔에 자리한 민주당 선거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기로 한 건데 재수없게 발각되고 말았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처음엔 단순 주거 침입으로 우기던 것이 도청으로 밝혀지고 백악관과의 관계가 속속 드러나며 닉슨 대통령이 궁지에 몰렸다.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아님을 항변하는 것조차 거짓말로 들리는 그 남자의 마지막 순간. 녹음테이프가 나왔다.
그 날이 1974년 8월 5일
자신에 대한 수사를 막으려고 CIA까지 동원하고, 그런 사실조차 들켜버려 위기를 맞은 남자는 정치 인생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남자 리처드 닉슨. 지구상 모든 남자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위에 군림하던자. 미합중국의 대통령. 거짓말과 비열함으로 점철된 그의 정치인생은 하야로 끝났다.
<저는 내일 정오를 기해서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 시간부로 대통령에 취임할 것입니다.>
그 날이 8월 9일. 탄핵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남자의 마지막 도망이었다. 빈자리는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승계하여 남은 임기 동안의 새 대통령으로 임명됐다.
그 순간 미국의 외교가와 정보당국이 혼란에 빠진 찰나의 타이밍, 주한미국대사가 본국의 방침과 상황을 물으며 차기 미국 대사의 부임을 기다리는 우울한 타이밍.
실미도 부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
8월 10일. 이 날은 의외로 대한제국 황제 이연의 생일이다.
공휴일로 지정되어 모두가 쉴 수 있는 날인데 이 날 황제의 탄신일이랍시고 열린 공식적인 행사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에도 자신의 생일을 안 챙기는 남자지만 이번에는 대외 행사까지 모조리 취소하여 황궁안에 칩거했다.
중년 남자의 심기가 불편했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생일따위는 신경쓸 때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적군파의 암살시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이화의 보고, 덕수궁에 쳐들어와 스파이짓을 대놓고 자랑하고 다니는 미국 대사, 고유가로 영 좋지 않은 경제까지. 그래서 이번엔 은서조차 평양에 남아있으라 말해놨다.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전화 속에서 귀여운 딸내미가 말했다.
[응? 잠깐 난 아직 아무 말도 안했···.]
"괜찮아. 쑥쓰러워하긴"
[아니 그러니까···.]
귀여운 녀석.
그래놓고 그 남자가 하고 있는 아침 9시의 일과. 총기 수입. 권총을 분해해놓고 정성스레 닦고 있는 남자의 모습엔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실미도 애들은?"
이연의 물음에 이화가 답했다.
"미국이 모르게 조치해놨습니다."
"도청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들이 오만 떨기는···."
총을 닦던 이연이 이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작전은 어떻게 될 거 같나?”
“반반입니다. 독수리가 살아있으니 성공확률이 높아졌죠.”
"정말 살아있는게 맞을까? 다른 요원들은 다 죽었잖아?"
"독수리가 보낸 보고 내용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보고란 다음과 같았다. 중국 연변지역으로부터 날아온 마지막 요원의 중요한 정보.
<8월 15일 킴일성이 차량을 타고 북경에 방문할 예정. 시칸은 오후 3시>
뭔가 오타가 거슬리긴 하지만 암호문을 받아 읽은 이연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최악의 가능성은 없을까? 녀석이 보낸 보고 말이야. 만약 중국이나 소련에 포로로 잡혀 억지로 보낸 거라면···."
"실미도 부대는 함정에 빠지겠죠. 31명의 대원들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될겁니다."
"표정 보아하니 믿는 구석이 있군."
이연이 보는 이화의 표정은 무덤덤하지만 확신이 숨겨져있는 요원의 모습이었다.
"함정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KGB는 우리보다 한수 위라며? 무슨 근거로 자만하는거야? 우리를 꾀어내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면 어쩔려고?"
이화가 웃으며 말했다.
"암호문에 실수가 두 곳이나 있었거든요. 저희끼리 약속한 일종의 표식입니다."
"표식?"
"틀린곳은 두 곳. 김일성 대신 킴일성이라 썼고, 시간 대신 시칸이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수는 보고 내용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하는 저희들간의 약속이라 이번에도 문제가 없을거라 확신중입니다."
"그말인 즉. 협박을 당할 때는 멀쩡하게 쓰고, 평상시에는 일부러 몇 글자씩 틀려서 보낸다. 그 말인가?"
"네. 중국이나 소련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입니다."
"별로 대단한 트릭도 아닌 거 같은데?"
"모든 요원들은 암호표라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통신할 때 그걸 보면서 하게되는데, 저희 요원이 포로로 넘어간다면 그것 역시 유출됐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우리 요원을 협박해서 중앙정보부를 속이고자 한다면, 암호표를 일일이 대조해보면서 얘가 제대로 쓰고 있나 검사를 할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원이 실수를 하면 중정에 보내는 표식이 아니냐며 의심을 하겠죠."
"그렇겠지."
"이런 상황에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제대로 써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역이용해서 실수가 없는 것을 표식으로 삼고, 실수를 내는 걸 정상으로 치는게 저희들의 트릭인거죠."
"흠···."
"단순하고 어처구니 없어보이지만, 이런 트릭이 잘 먹히는 법이거든요. 특히 ㄱ과 ㅋ을 바꿔서 보내는 녀석은 저한테 반가운 일입니다."
"반갑다니?"
이화는 싱긋 웃으며 이연에게 말했다.
"ㄱ과 ㅋ을 햇갈려하는 녀석은 제 기억에 한 명밖에 없습니다. 중앙정보부 제1차장 시절에 직접 멱살잡고 가르친 막내 훈련생 밖에 없었으니까요."
"1차장 시절에 직접?"
"암호표 보는 법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햇갈려 하던 녀석이죠. 중정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해서 이 녀석을 퇴출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1차장인 제가 직접 찾아가 멱살을 잡았죠."
그것은 이화의 옛날 이야기. 산기슭 비밀 연수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중정 최고위 인사의 고함소리.
<이것 하나 똑바로 못 해?!>
<죄송합니다!>
<보고 잘못 올렸다가 팀 전체가 잘못된 내용을 받으면 어쩔려고 그래? 작전 실패하면 누가 책임질거냐고!>
<죄송합니다!>
<넌 앞으로 암호 작성할 때 ㅋ으로만 써. ㄱ 쓰다 걸리면 내 손에 줄 알아!>
중정에서 가장 낮은 막내가 1차장실의 최고 간부에게 멱살이 잡혀 훈계를 당하는 초유의 상황. 군대로 치면 이등병이 3성 장군에게 혼나던 것이나 다름없는 기억. 고문관으로 찍힌 훈련생은 정식 요원이 되고서도 계속 실수를 냈다.
<조선노동당 13콰 특수부대 1개 팀이 월맹군에 파병된 컷으로 파악됨>
경력이 쌓이고 노련해진 고급 요원은 여전히 ㄱ대신 ㅋ으로 암호문을 보냈고 중정에서 근무하는 통신관들은 그것만 읽고도 녀석의 얼굴을 떠올릴 지경이었다.
<어이구... 우리 영감님 무사히 잘 계신가보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중정의 암호표는 요원 단위, 작전 단위로 불규칙하게 바뀌어서 평생 그렇게 쓰라는 건 반어법이었는데요."
"도대체 그 때의 암호가 뭐길래?"
"당시 ㅋ에 해당하는 암호는 8861, ㄱ에 해당하는 암호는 8881이었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암호표에 따라 '김'이라는 글자를 조합하면 8881 6139 5137로 써야 했다. 하지만 녀석이 잘못 쓴 암호문은 8861 6139 5137여서 해독을 하면 '킴'이 됐다.
여기에 '일성'이라는 단어에 해당되는 암호 1139를 조합하면 8861 6139 5137 1139. 합해서 '킴일성'
설명을 들은 이연이 비웃으며 소감을 말했다.
"진짜 많이 틀린데?"
"그것조차 햇갈리던 멍청이었습니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김일성을 쫓는 유일한 요원이라?"
"저의 멱살잡이로 성장한 최고의 요원이죠."
"그런 최고의 요원이 진짜배기 고급 정보를 보냈는데도 작전의 성공 확률이 반반이란 말이지?"
"외교 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최선을 하다겠습니다. 하오나 만약의 사태가 우려되신다면 지금이라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북파부대는 해산시키고 요원도 철수시키겠습니다. 미국까지 안 이상···."
"진행시켜."
이연이 흑색 리볼버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며 말했다.
"내가 전쟁터를 다니면서 깨달은 게 뭔줄 아나?"
"항상 최악을 대비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죠."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뼈저린 경험이야. 세상에 완벽한 작전은 없다는 거지. 모든 작전은 항상 실패의 가능성을 갖거든. 하지만 두려워해선 안돼."
그리곤 허공에 총을 겨누어보며 말했다.
"전쟁은 결국 도박이니까."
그렇게 이연은 참수작전의 최종 승인을 내렸다.
인간이 가장 취약해지는 새벽 4시. 684부대(실미도부대)는 조심스럽게 두만강을 건넜다. 몇 달 전 위화도에서 적군파 대원들이 입고 있던 군복과 장비를 그대로 뺏어입은 채 북녘땅을 향하는 그들의 모습은 31개의 유령 같았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노동당의 1호를 제거하는 것.
같은 시각 연변의 어딘가에선 이화의 막내 교육생이 암호문을 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에서 보낸 비밀 지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국은 너를 버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