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78화 (78/131)

〈 78화 〉 Ep9. 중앙정보부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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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이래선 경호를 할 수 없잖아?!’

차지연이 경악하고 있었다.

5월 5일의 아침.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가 함께 시작한 어린이 날의 첫 행사는 서울 시내의 유일한 놀이공원 창경원에서 시작했다.

차지연이 경악할 수 밖에 없었던 건 물리적인 장벽의 부재. 황제와 어린이들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기 때문이다. 경호원들로 첩첩산중의 벽을 쌓으려던 친위대장은 어린이날의 행사 프로그램으로 인해 시작부터 망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럼 경호가 쉬운 줄 알았어요?’ 라는 무언의 표정이 비서실장 이화로부터 날아들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다. 어린이날이니까. 애초에 이 날의 행사 기획의도부터가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황실’이었다.

황제가 편안한 옷차림으로 창경원을 방문하니 시민들이 놀라는 눈빛으로 황제폐하를 맞이했고, 따뜻한 황제의 모습에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나와 악수와 싸인을 청하는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심지어 안아달라는 아이들도 있었다. 황제는 자신을 찍는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쿠! 너는 참 많이도 컸구나! 너무 무겁지 않느냐?’ 짓궂은 농담까지 던지며 있는 힘껏 안아들고 있었다.

다른 이유로 경악하는 사람도 있었다. 29세 이은서. 대한제국 황태녀. 이연의 외동딸.

“와··· 내 아버지 맞아? 나한테도 저렇게 안해줬는데?”

이 여자 이은서. 아직도 부산에서 받은 아버지의 뽀뽀를 인정하지 않는 매정한 딸내미. 하지만 이번엔 진희가 말했다. 소근소근.

“지난번에 평양에서 사진 보셨잖아요!”

전력으로 부정하는 은서의 소근소근.

“아니라니까? 난 그런 기억이 없어. 그 사진은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사진속 여자애도 나랑 다르게 생겼다니까? 역시 그건···."

“이상한 복선 깔지 마세요! 선배 비서님들께 여쭤봐서 다 확인했거든요?!”

도리도리. 절레절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외동딸의 안좋은 추억.

그런 매정한 딸내미에게도 아이들이 달려온다. 황태녀의 한복차림으로 아이들을 안아주는 은서의 얼굴에도 인자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이고 우쭈쭈. 너는 참 귀엽구나. 언니가 안아줄까? 아이들을 즐겁게 맞이하는 황태녀의 모습이 진희에게 낮설기만하다.

'아이들을 저렇게 좋아하셨던가?'

그렇게 같이 동물 구경도 하고, 벚꽃나무 아래서 아버지와 딸이 오붓하게 도시락을 까먹으며 점심 식사를 나누니 겉보기론 참으로 화기애애하고 사이좋은 부녀지간이었다.

속으론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었지만.

<하하하 아버지. 밥먹는 것조차 이렇게 정치적으로 해야해요? 완전 속물이잖아?>

<그런 너도 아까전에 꽤 하더구나?>

<하하하 저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구요.>

<진심이라니? 그럼 더 좋은게 아니냐? 역시 넌 소질이 있어. 이제 그만 포기하고 정치를 배우거라. 넌 분명 미디어의 여제가 될거야.>

<절대 안해!>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창경원에서 부녀지간은 세상에서 제일 화목한 척 (은서에게 일방적으로) 불편한 식사를 매듭지었다.

***

창경원 다음엔 고아원이다.

황실은 평범한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다. 그들에겐 아이들을 사랑해줄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아들에겐 그런 부모가 없었고 그것이 바로 황실이 찾아가는 이유다.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황실의 미디어 정치엔 정교한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이화의 솜씨.

고아들까지 따뜻하게 안아주는 황실이라는 선진적인 탈권위 행보,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켜 정치적인 유능함까지 챙기는 전략. 이 모든걸 빠짐없이 보도하는 황실의 바른소리 KBC 방송.

경호전략에도 빈틈이 없다.

고아원에 오기까지 자동차는 방탄 기능이 달린 리무진을 타고 왔다.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왔다면 미디어 정치에 있어 더할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오픈카는 저격의 위험이 높다.

창경원부터 고아원에 가는 길까지 적군파가 호시탐탐 암살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 두 사람이 환한 미소로 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그림자 뒤에선 중앙정보부 요원과 친위대, 경찰들이 무명의 헌신을 하는 중이다.

<각자 현재 상황 보고하라.>

차지연이 무전을 날리니 각지의 팀장들이 보고를 올렸다. 고아원 주위의 빌딩 곳곳을 감시하는 저격팀도 이상 무. 10층 이상의 고층빌딩 옥상을 잠궈버리고 경비를 돌고 있는 순찰대도 이상무. 길거리에 구경 나온 사람들을 막아서는 경찰들도 이상 무. 고아원 입구에서 황제 폐하를 에스코트 하는 본인도 이상 무.

‘역시 난 완벽해!’

차지연의 얼굴에서 뿌듯함이 번졌다.

그렇게 이어진 황실과 고아원 아이들의 만남은 의외의 인물이 중심에 섰다. 아버지가 동화책을 읽을 줄 알았는데 기습적으로 은서가 나선 것이다.

<내가 해볼래!>

<음? 니가 왠일이냐?>

<몰라 하여튼 줘봐!>

소근소근 둘만의 비밀 이야기가 오가더니 은서가 아이들 앞에 살포시 앉아 인자한 어머니 같은 미소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경호를 서던 진혁은 새삼 놀랬다.

‘한복이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

언제나 각목같이 서있는 그 녀석. 이쁘장한 한복을 입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황태녀의 모습에 반해버려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29세의 청춘.

그런 진혁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서는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어머니 같은 인자한 미소로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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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 이은서 읽음>

옛날옛날 먼 옛날에 백설공주가 살았어요. 어머니는 공주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죠.

얼마뒤 백설공주의 아버지는 새 왕비를 맞이했는데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마음은 곱지 않아서 공주를 매일같이 질투했대요.

어느 날, 무엇이든 대답해주는 거울에게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물었는데 거울이 이렇게 답했대요.

“백설 공주가 이세상에서 가장 예쁘죠!”

그러자 질투가 난 새 왕비가 사냥꾼을 불러 공주를 죽이라고 명령했대요! 하지만 사냥꾼은 마음씨가 착했던 공주를 죽이지 못했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숲속으로 도망치게 했대요.

그렇게 도망친 공주는 숲속에서 난쟁이의 집을 발견했고 일곱 난쟁이들과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고 있었대요.

하지만 마음씨가 못된 왕비는 포기를 몰랐어요.

공주가 살아있음을 알게된 왕비가 독사과를 만들어 몰~래! 사과 파는 행상인으로 변장해서 줬더니, 그걸 먹은 백설공주가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대요.

불쌍한 백설공주···.

깊은 잠에 빠진 공주님을 위해 일곱난쟁이들은 유리관을 만들어 모시고 밤낮으로 지극정성 지켜주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왕자님이 나타났대요.

사정을 들은 왕자님은 이를 딱하게 여겨 공주님을 살며시 안아 일으켜 사랑담긴 치료를 해주었고, 그러자 목에 걸려있던 사과가 툭! 튀어나와서 공주님이 깨어났대요.

백설공주님이 깨어나자 일곱난장이들이 기뻐서 춤을 췄고, 왕자와 공주님은 운명 같은 만남에 사랑을 나누고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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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가 읽어주는 동화 속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이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쁜 왕비는 어떻게 됐어요?”

은서가 들고 있는 동화책은 다음 장이 없었다. 백설공주가 행복하게 산 건 알겠는데, 독사과를 줘서 목숨을 위협한 못된 왕비는 어떻게 된건가?

백설공주 이야기는 1812년 독일의 그림(Grimm) 형제가 자신들의 이름으로 동화책을 낸 이래로 각색하는 사람마다 스토리가 조금씩 달라졌는데, 원본에 들어있던 엔딩이 꺼림직했기 때문이다.

<백설공주의 결혼식에 초대해놓고 빨갛게 달구어진 쇠구두를 신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왕비는 강제로 춤을 추며 고통스럽게 죽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서 이런 잔인한 엔딩을 그대로 말해줄 순 없으니까. 아예 빼버리거나 순화해서 넣는 식. 그래서 은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만의 각색을 해보기로 했다.

그 여자 이은서의 법치주의식 엔딩.

"변호사를 선임하는 공정한 재판! 증거와 법률에 근거하는 판사의 냉혹하지만 공정한 판결! 법정다툼 속에 내려진 왕비의 처벌은 징역 15년! 감옥에서 죄를 늬우친 왕비는 모범수로 출소하여 착하게 살았답니다!"

"......?"

징역이 뭔지 변호사며 재판은 또 뭔지 아이들이 알 턱이 없다.

"징역이 모애요?"

무안해진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정정했다.

"으, 응··· 혼쭐났다고···."

“와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엔딩은 다섯글자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착하게 살아야 돼! 알았지?”

“네에!”

그 뒤에도 은서는 동화책을 제멋대로 바꿔 읽었다. 양치기 소년에게 사기죄를 적용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아무튼 거짓말 하면 못써요.

쓸쓸한 겨울날 성냥 한개비의 불꽃을 바라보며 추억속에 죽어가야 할 성냥팔이 소녀에게 공무원들이 찾아와 복지시설로 안내한다는 이은서식 동화는 어쨌든 해피엔딩이니까 아이들이 좋아했다. 우아아! 공무원 최고오! 나도 커서 공무원할래!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행복하게 잘 살았다니 아이들은 그저 신이나서 박수를 쳤다.

딸내미의 얼척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연은 그저 마냥 웃었다. 재밌는 녀석.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느껴진 이화의 빈자리에 싸늘한 긴장을 느낀다.

'무슨 일이 생겼나보군.'

그것은 황태녀의 동화 속 세상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 고아원이 보이는 머나먼 골목 어딘가. 청소부들이 무전기를 들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경호가 튼튼해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괜시리 잡히지 말고 날래 돌아오라.]

“알겠습니다. 동지.”

그들은 평범한 청소부가 아니었다. 청소부의 조끼 안으로 은밀하게 꽂혀있는 권총이 언제든지 저격을 기다리고 있는 수상한 사내들이었다.

“반동 놈들의 수괴가 코앞에 있는데 이렇게 돌아가야 하다니···.”

“일없습네다. 다음에 다시 노리면 되갔시요.”

고개를 저으며 단념하는 두 사람의 오후 2시 30분. 황제와 황태녀의 암살 임무는 친위대의 방벽에 막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무전기 너머에서 비명이 들렸다. 수상한 기척에 자리를 뜨려는 순간 골목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양복의 요원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것을 깨닫는다.

'당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검은 정장의 여인.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 45구경 자동권총을 만지작 거리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간표에 따르면 청소부들이 종로 지역을 다녀가는 시간이 새벽 5시 20분이라고 하더군요.”

이화는 총을 겨누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2시 30분이지.”

총을 쏘진 않았다. 죽일 필요도 없었다. 뒤통수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요원들이 두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남산의 지하실로 모셔져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을 대접받을 것이다. 그것이 입으로 들어갈지 코로 들어갈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수사에 얼마나 협조하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니까.

***

어느 날 어딘가의 부둣가.

짙게 깔린 저녁 하늘아래 찬란히 빛나는 도시를 뒤로한 사내가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대한제국 놈들 말이야.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놨잖아?”

중절모를 짙게 눌러쓴 코트의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옆자리의 남자에게 말한다.

“그 놈들은 대마도에 침공해선 안됐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남자의 물음에 중절모의 사내가 답했다.

“오진수. 자네에게 대한제국의 미래를 제안할 사람이지.”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일본. 오사카 변두리의 인적드문 부둣가였다. 오진수는 남자에게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젊어서부터 일본인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았지? 조센징, 조센징. 그렇게 경멸적으로 부르면서 너를 괴롭혔잖아.”

익숙한 일본어에 남자가 되물었다.

“그래서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대한제국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어.”

남자는 담뱃불을 바닥에 지지며 비웃듯 말했다.

“대마도를 침공해서 일본을 협박하고, 미국과 작당해서 일본의 평화를 위협하고, 그렇게 쌓인 분노가 지금 어디로 향하던가?”

“일본에 사는 조선인···.”

“그래, 그들의 정당한 분노가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되고 있잖아. 그게 다 저기 바다건너 대한제국 때문이지.”

“그래서요?”

“지금의 대한제국은 군대를 앞세워 조선인민을 탄압하고 있어. 겉으로는 평화로운 정치를 하지만 그 속에선 은밀하고 잔학무도한 탄압으로 혁명가들의 피를 부르지.”

“그건 저와 상관 없는 문제입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외부에 힘을 투사해서 너같은 친구들의 처지를 어렵게 만들고 있잖나? 일본땅에 사는 조선인들을 구할 뜻있는 기회를 주지.”

오진수의 제안에 남자가 경계하듯 물었다.

“당신, 민단 사람이 아니군요?”

“처음부터 널 주시하고 있었지.”

“누굽니까? 당신?”

“내가 누군지보다 자네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문세광. 조선 인민들의 위대한 혁명가로 기록될 단 한명의 남자.”

오진수가 손을 건넸지만 문세광은 쉽사리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그는 아직 혁명가가 될 생각도 암살자가 될 생각도 없는 평범한 조선계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오진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은 많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유혹해볼 생각이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혁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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