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Ep9. 중앙정보부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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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2차장 고선호.
국내 정보의 총책임자. 김재필 부장의 오른팔.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긴 깔끔한 중년사내. 검정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헬기를 타고 평양의 서북방위사령부까지 날아왔다.
그가 평양에 온 건 대한제국에서 오진수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최고 권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
오진수와 마주하여 칼을 맞댄 여장부. 비록 패배했지만 그를 마주하며 대화했다는 건 중정의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2차장은 서북방위사령부에 찾아와 황태녀를 알현했다.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깍듯이 인사하는 중앙정보부 2차장의 눈앞에 펼쳐진 서북사령관의 집무실. 태극기와 부대기를 양옆으로 세워놓고 만년필을 끄적이는 29세의 여장군 이은서. 사령관으로서 집무를 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경계의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본다.
"뭐지? 난 잘못한 거 없는데?"
"잘못을 해야만 찾아오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아. 잘못을 만들어주러 온건가? 설렁탕을 코에 들이 부으면서?"
뜬금없는 선언에 고선호가 놀라 말했다.
"저흰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황태녀 전하의 살벌한 질문에 고선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왜 하필 설렁탕 같은게 소문으로 퍼진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저흰 더 이상 공포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나쁜짓을 허락받으러 온 것도 아니니까··· 부디 경계심을 풀어주심이···."
"그래서, 중정에서 무슨일로 온거야?"
2차장은 사정을 설명했다. 오진수의 적군파가 대학가에서 학생들을 부추기다가 중정의 정보망에 포착된 것. 그들이 황실을 상대로 암살기도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이를 막아내고 완전히 뿌리 뽑으려면 역시 오진수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오진수. 그의 얼굴을 확실하게 아는 대한제국 유일의 사람. 이분이 바로 열쇠를 쥐고 있는 실마리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 놈의 이름이 바로 오진수입니다. 황태녀 전하께서 최후의 일전 때 싸우셨던 북한군 잔당이었죠. 조선노동당 13과 특수부대장이었습니다.”
전하는 그 놈을 익히 기억해냈다. 그래서 2차장은 확신어린 표정으로 아뢰었다.
"그래서 몽타주를 그리고자 합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도와줄게."
그렇게 경계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전하께 2차장은 사진 여러개를 차근차근 보여주며 '이 사람이 오진수인지' 묻기 시작했다.
"오진수는 가명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저희 정보망에 노출된 사람일 수도 있죠. 국내에서 활동중인 범죄자일 수도 있구요."
"음··· 그건 알겠는데 여기 중에서 오진수는 없는거 같은데?"
"어쨌든 얼굴은 확실히 기억하시는 게 맞으신지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확실히 각인되어 있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몽타주를 만들겠습니다. 그림은 제 옆에 있는 전문 요원이 그려줄테니 오진수의 이목구비에 대해서 아는만큼 최대한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사실 설명이라곤 해도 물어보고 답하는 형식에 불과했다. 중정에선 눈의 생김새부터 코, 입까지 수백가지 후보군을 목록으로 갖고 있었고, 거기서 쇼핑하듯 '오진수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고르면 되는 것.
은서는 '이게 오진수랑 비슷했던 거 같아' 식으로 가리키며 놈의 얼굴을 퍼즐조각처럼 맞추기 시작했다.
눈썹은 날렵한 것을 고르고, 눈은 사납게 생긴 것을 선택하며, 코는 오똑하게, 입은 작은 것으로. 얼굴의 외형은 오랜기간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군인인 것처럼 말랐지만 다부진 것으로 고르니, 그것들을 참고하여 요원이 다시 한 번 손으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눈은 조금 크게, 코도 살짝 높게, 입도 살짝 키우고. 이런식으로 이목구비의 비율을 손 그림으로 조절해 나가니 오진수의 몽타주가 완성됐다.
"오~ 꽤 비슷한데?"
"이게 바로 몽타주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야... 역시 중정은 다르구만?"
"전하께서 칭찬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칭찬은 중정이 다 먹었지만 사실 경찰들도 늘상 익숙하게 써먹는 수사기법. 어쨌건 이렇게 중정은 손쉽게 오진수의 얼굴을 알아냈다. 이제 이것을 모든 경찰과 모든 요원들에게 뿌려서 오진수를 수배할 것이다.
"놈이 국내에 들어오기만 해도 쇠고랑을 찰겁니다. 부디 안심해주시길."
황태녀 전하 이은서의 입에서 믿음의 미소가 피어났다.
"잡아서 꼭 내 앞에 데려와줘. 나도 묻고 싶은게 많이 있으니까."
"묻고 싶은거라 하시면?"
"그 녀석 말이야. 월남에서 나랑 일대일 격투를 했을 때 공주인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
은서는 생각했다. 그 날 오진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
<우린 대한제국 황실에 관심이 많거든>
그 날의 결투는 은서의 패배였다. 은서는 모든걸 단념하며 '내 목을 잘라서 덕수궁으로 보내라'는 말까지 했지만, 자르긴 커녕 은서의 속사정을 꿋꿋이 들어주며 마지막 위로까지 던져준 것이다. 그러다 얼떨결에 죽일 기회를 놓쳐버려 도망치고만 것이 놈에겐 천추의 한이 됐을지도.
<내게도 군인으로서의 명예가 있어. 곱게 죽여 묻어줄테니 귀신이 되어 돌아가라.>
녀석이 했던 말을 떠올리니 은서는 왠지 울적해졌다.
"그 녀석은 나한테 모든 부하들을 잃었어. 그런데도 목을 따버리긴 커녕 군인정신을 입에 담은거야. 곱게 죽여줄테니 귀신이 되어 돌아가라고. 그게 난 이해가 안되더라고. 난 부하 11명을 잃어서 폐인처럼 지냈는데 녀석은 그렇게 꿋꿋할 수 있다니···."
그래서 묻고 싶었고 다시 한 번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특수부대의 팀장 대 팀장으로, 모든 부하를 잃은 팀장 대 팀장으로. 군인 대 군인으로.
“너는 왜 거기서 싸웠을까?”
그리고 왜 아파하고 분노하지 않았을까?
***
2차장의 행보는 계속됐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황제 폐하가 방문하실 고아원마다 요원을 보내어 시설을 점검했다.
황제 폐하가 다녀가실 고아원들은 모두 서울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도심에 있다보니 인근에 빌딩이 많은 게 문제였다. 적군파 놈들이 저격총으로 매복을 하면 먼 거리에서 암살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는데 다름아닌 미국이다. 미합중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저격총을 맞아 숨을 거뒀다.
시민들 앞에서 오픈카를 타고 가던 도중에 머리를 맞고 죽은건데, 범인은 빌딩의 6층 창문에서 망원조준경 달린 카르카노 M91/38 소총으로 저격을 하고 있었다. 경호원들 입장에선 손을 쓸 수 없었던 치명적인 순간이다.
대한제국도 그런 참사가 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중정은 인근의 빌딩들을 확실하게 체크하기로 했다. 사복차림으로 고아원에 나타난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팀장의 지시아래 주도면밀하게 점검에 들어간다.
"이곳을 기점으로 총알이 닿을만한 거리의 모든 빌딩을 점검해야 해. 각자 맡은 구역을 수색해가며 저격포인트를 수집해놓도록."
이렇게 확보된 저격포인트는 친위대 경호실에 넘겨져서 황제 폐하의 호위 작전에 참고용으로 쓰인다. 예컨대 해당 지역의 빌딩들을 사전에 확보해두어 저격을 차단하는 것.
그러는 한편으로는 고아원장으로부터 해당 시설에 일하는 모든 직원들과 아이들의 명단을 받아냈고, 그들의 가족을 털어가며 몰래 뒷조사에 나섰다.
<오진수가 직원을 매수할 수도 있어. 그것도 아니면 위장을 할 수도 있지>
그래서 직원들 신상정보를 털어다 황제 폐하께 앙심을 품을만한 사람이 있는지 혹은 나쁜 범죄기록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를 체크했다. 필요하면 정치성향까지 모조리 뒷조사로 털어낸다.
노련한 중정요원에겐 몇가지 시나리오도 있었다.
“고아원을 드나들며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업체, 식자재를 납품해주는 업체로 위장해올 수도 있어. 협력업체까지 모조리 털어내서 당일날 정해진 사람 외엔 출입을 금지시켜야 할거야.”
"사진도 확보해둘까요?"
부하 요원의 물음에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모조리 수집해서 친위대에 넘겨. 사진이랑 이름을 비교해가며 예정에 없는 사람이 오면 차단해야 하니까.”
"헌데 이런 업무는 원래 경호실에서 해야하는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자 팀장이 음흉한 미소로 웃으며 답했다.
“신상정보를 은밀하고 신속하게 털어낼 수 있는건 우리뿐이잖아.”
끄덕.
중앙정보부 2차장실의 이런 노력은 고아원을 시작으로 창경원 직원까지 황제 폐하 가시는 모든 동선에 꼼꼼히 이루어졌다. 중정의 모든 정보분석팀 직원들이 과로를 호소할 정도의 업무량이었다.
이렇게 받은 정보를 친위대는 아낌없이 활용했다.
덕수궁의 직원들과 수도방위사령부의 군인들이 몇 일 전부터 동선 내 빌딩들을 차례대로 점령해나가기 시작했고, 노련한 저격수들을 엄선하여 집중훈련을 시켰다. 친위대장 차지연에겐 단순하지만 화끈한 계획이 있었다.
수도방위사령부의 사격훈련장에서 모습을 지켜보는 그 장군의 결의.
“저격수가 폐하를 노리면 맞저격으로 죽이면 돼.”
먼저 죽여버리면 장땡이다. 그래서 저격수를 잔뜩 깔아놓을 생각이다.
***
1974년 5월 5일 어린이날.
덕수궁은 어린이가 없다.
그런 사실이 이연에게 왠지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이었을까? 황제로서의 마음이었을까? 아무튼 1974년 현재 황실에게 있어 어린이날이라 하면 그냥 정치적 행사가 많은 날일 뿐이었다.
미디어 정치는 그 남자의 특기다.
대중들에게 부드럽고 인자한 황제의 인상을 심어주고 지지율을 굳건히 다지기 위한 정치적인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첫인상은 3초 이내에 결정된다. 그렇기에 머리부터 얼굴, 옷차림까지 모든것이 확실하게 계산되어야 했다. 어린이날이니까 칙칙한 검은 양복 대신 베이지톤의 밝은 양복을 찾아입고 넥타이는 하지 않는다. 오늘은 철저하게 ‘아이들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가 되어야 했다.
그런 남자의 고민거리.
“권총은··· 두고가야겠지?”
그 남자의 품속엔 항상 흑색 리볼버 권총이 있었다.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는건데 이게 있어야 안심이 됐다. 하지만 어린이를 만나러 가는 판에 총을 들고 가기엔 아무래도 무리. ‘뭘 당연한 걸 여쭤보시냐?’는 이화의 표정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오진수고 뭐고 내가 먼저 쏴버리면 그만이잖아?”
“싸움은 부하들에게 맡겨주시고 옥체를 보전하시죠. 괜히 총을 들고 가셨다가 아이들이 잘못 건드리기도 하면 큰 사단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곁에서 지켜드릴테니 부디 내려놔주시길.”
“흠··· 그래. 이 실장이라면 믿을 수 있지.”
끄덕끄덕.
권총은 이화가 휴대하기 시작했다. 이연이 쓰는 흑색 리볼버와 다르게 이화의 권총은 45구경 자동권총이다. 어린이를 품에 안을 일이 없는 비서실장은 총을 휴대해도 사고가 나지않을테다. 게다가 중정 1차장 출신. 사격하면 자신있었다.
하지만 쏠 일은 없을거다. 이화에겐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VIP의 안전 확보보다 중요한 건 없다. 총을 쏠 여유가 있으면 몸 부터 던져 폐하를 지키자.'
그래서 이화는 차지연에게도 분명히 강조했다.
<오진수는 둘째 문제에요. 경호의 제1원칙은 VIP의 안전 확보라는 걸 명심하세요. 총을 쏘는 것보다 암살자로부터 폐하를 분리하는 게 우선되어야 해요.>
행사를 시작하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둘이다. 경호의 총책임자 차지연 대장과 정치의 총책임자 이화. 검정 양복의 경호원보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이들이니 경호의 마지막 마지노선도 두 사람인 셈이다.
그래서 이화는 결심했다.
여차하면 자신이 인간방패라도 될 생각이다. 그분 대신에 총을 맞고 그렇게 해서라도 폐하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된거다.
‘죽어도 내가 죽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