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Ep9. 중앙정보부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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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깨어나니 좁은 지옥이었다.
쇠창살이 쳐진 독방에서 깨어난 소녀는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한건지 생각하기 싫을 나날들이 지났음에도 이번엔 또 무슨 고문을 시키려는지 일본 형사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1945년 경성감옥.
시간이 지나면 서대문형무소라고 불리우게 될 그곳에서 소녀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매달려 있었고, 입고 있던 옷은 강제로 풀어해쳐져 뼈저린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인 형사가 물었다.
"이름!"
"최···."
오랜 고문으로 대답할 힘조차 없던 소녀는 고개를 떨군채 중얼거리듯 본명을 말했다.
"놈들이 어딨는지 말 해!"
"몰라요···."
날아온 인두가 가슴을 지진다. 목구멍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소리가 고문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아악!!!"
날아오는 몽둥이에 소녀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통증 속에서도 아득해지는 정신이 죽음에 임박했음을 느끼게 해 눈물로 터져나왔다.
"그만해··· 제발···."
무서워서 무서워서 너무나 무서워서 형사의 손에 들린 인두가 살짝씩 올라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떨리는 몸이 내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독한년··· 어린 것이 그깟 남자 새끼 하나 고발하는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지랄이야!"
"난 아무것도···."
흐느끼는 소녀에게 다시한번 인두가 날아왔다. 이번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뜨거운게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망가진 신체와 돌아버린 정신 속에서 시야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흐르는 눈물 속에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이 오늘따라 너무도 무거워 소녀는 마음속 한마디를 끝끝내 꺼낼 수가 없었다.
'잘있어요 이연씨.'
***
1974년 5월 3일 새벽
잠에서 깨어난 이화는 땀이 흥건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4시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다. 5시인지 4시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에서 몸을 일으키니 소파에서 잤음을 깨달았고, 발길에 채이는 널부러진 약통이 수면제임을 느꼈으며, 자신이 정장 차림으로 집무실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후회감이 밀려왔다.
아무튼 새벽 4시다. 오늘은 늦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잠자리가 매일 이런식인 건 아니었다. 어젯밤 그 개자식 때문에 업무가 늦게 끝났을 뿐이다.
그 자식이 없었다면 저녁 9시에 업무를 끝내놓고 맞은편의 방으로 들어가 하루 권장 수면시간 7시간을 채웠을 것이다.
이화의 하루가 새벽 4시에 시작하는 이유는 악랄한 직장상사 때문이다. 대한제국 덕수궁은 블랙기업 중의 블랙기업으로 그 남자 이연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내가 군인이라 잠이 없어서 그래.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이 실장은 좀 더 자도록 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런 상사들이 제일 악랄한 법이다. 그들은 절대 모른다. 본인이 부지런하면 그만큼 부하 직원들이 힘든 법이란 것을.
세상에 한 나라의 황제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업무를 준비하시는데 부하 직원이 어떻게 늦잠을 자나?
'정말 쓸데없이 부지런한 사람.'
에휴.
그렇게 폐하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몸을 씻고,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어지러운 방에서 능숙하게 속옷과 옷가지를 찾아 입는다. 화장대도 전쟁난 것 마냥 어지러이 널부러져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내면(방)의 아름다움보다 외면(내 미모)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다. 중정 요원 출신의 비서실장은 화장하는 속도도 전투적이고 날렵했다. 여성 요원에겐 화장도 기술이다.
뭐 이젠 요원도 아니지만. 습관이란건 무서운거니까 그냥 요원인 척 해보기로 한다.
출출하니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집무실로 돌아오면 업무가 시작된다. 어제 정리한 보고서를 다시 리마인드해본다. 각 분야별 수석비서관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다시 읽어보고 아침에 보고해야할 중요 사항을 체크해보면 진혁군이 작성해서 올린 황태녀 전하에 관한 보고서도 눈에 들어온다.
일정은 어땠고 부대 순시며 회의며 식사는 무얼 하셨는지, 김진혁 중령이 폐하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고 있는 남자친구 역할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한 보고 내용은 대개 이렇다.
<분에 넘치는 황송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거짓말이다. 한심한 녀석. 임무에 실패해놓고 잘보낸 척 하지 마라. 2부속비서관 진희가 작성하는 보고서는 맨날 이렇던데.
<그냥 뭐 딱히 아무 말도 없이 네네. 예예. 맞장구만 치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답답할 지경.>
대한제국에서 황태녀를 하고 있다는 A양의 결정적인 제보도 있었다. 어제 저녁 유선 전화를 통해 들은 내용은 이랬다.
<그 녀석? 늘 그렇지 뭐. 각목 같더라고.>
에라이 화상아. 판을 깔아줘도 못받는 한심한 녀석.
폐하께 신문이나 옷, 수라상을 올리는 등의 개인적 보좌는 제1부속비서실장이 한다. 아침 6시가 되면 수라상이 올라가는데, 이화도 그 타이밍에 맞춰 아침업무보고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늘 이런 보고를 하고 만다. 이은서와 김진혁에 대한 어젯자 최신 연애관계 보고.
"그래서 둘은 잘되간다던가?"
이연의 물음에 이화가 이렇게 답했다.
"어제도 결국 각목 같았답니다."
"허허 참··· 황제의 명령인데도 제대로 수행하질 못하는구만."
"역시 늘 그렇듯 연애 경험이 전무한 진혁군인지라···."
"황명을 어겼으니 처벌이라도 내려볼까?"
"실록에 나쁜 기록이 남아도 안지워드릴겁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길. 김진혁 중령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이를 반역죄로 다스리라 명하셨다.>
오··· 이렇게 기록되면 후손들이 대대손손 돌려보며 놀려먹겠다.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이화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이연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임 비서실장과 중정은 다 지워줬는데 말이야···."
"요즘 사관들은 강단있는 친구들이라서요. 지우라 하면 '지우라 명하셨다'고 그대로 적을겁니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이 오가던 찰나. 이연이 육개장 한 숟갈을 떠먹으며 물었다.
"오진수는? 특별히 잡힌 건은 없고?"
"아직은 조용합니다. 서울지역 주요 대학 학생회에 접촉해서 혁명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모양인데, 혹시 추가적인 접촉이라던가 보복이 올 것을 대비해서 요원들을 깔아놨습니다."
"학교다니면서 중정 요원들이 줄줄 따라다니고 있겠구만."
"일단은··· 그렇긴 한데. 보호해주려고 붙여놓은거니 녀석들도 뭐라하진 않겠죠."
"그나저나 그 서울대생이라는 녀석. 정치활동을 허락해달랬다면서? 어떻게하는게 좋겠나?"
"기특한 일을 했으니 보상은 줘야겠습니다만 녀석은 결국 좌파입니다. 곧이곧대로 용인해줬다간 나중에 폐하의 권력에 장애가 될겁니다."
"그러면?"
"그대로 허락은 해주되 중정에서 약간씩 훼방을 놓을 생각입니다. 2차장이 문제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컨트롤해줄겁니다."
"흠···."
고심하는 이연의 눈빛에 어떤 걱정이 서려있는지 훤히 보인다. 그래서 이화는 담담하지만 자신있게 털어놓는다.
"최악을 가정하시는군요."
"늘 그랬잖나?"
"오진수가 공작을 꾸민다면 무슨짓을 할지."
덕수궁. 남자나 여자나 관심은 딴데에 있었다.
"그래, 무슨 짓을 할 거같나? 학생들을 선동해서 혁명을 주도한다. 고작 이정도로 만족할 녀석은 아니겠지."
"폐하께서 생각중이신 것과 같습니다. 암살 그 이상의 최악은 없으니까요. 마침 이틀 뒤면 어린이 날입니다. 경호 문제를 고려해서 주요 행사들은 덕수궁에 어린이들을 직접 초대하는 것으로···."
"아니야. 내가 현장에 나가도록하지."
그러자 이화가 놀랬다.
"그건 위험합니다. 언제 어디서 적군파가 암살 시도를 할지는···."
"그렇다고 황제씩이나 되서 덕수궁에 숨어지낼 순 없지 않나? 이럴수록 당당하게 다녀야지."
"녀석들도 그걸 노릴겁니다. 청소부든 선생님이든 지나가던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해서 기습 공격을 해올 수도 있죠. 사람 목숨은 가볍습니다. 총 한방이면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가볍죠."
그러자 이연이 피식 웃으며 비서실장을 노려보고 말했다.
"내 용병술을 못믿는건가?"
"용병술이요?"
"나한텐 최고의 인재가 있잖나?"
"......?"
그 남자가 가리킨 건 눈앞에 있는 여자. 비서실장 이화 본인이었다.
"내 호위를 책임질 최고의 인재. 자네를 믿고 진행하는거야. 재필이랑 중정 애들 데리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봐. 차지연 장군에게도 협력하라 말해둘테니 경호병력 전반을 진두지휘 해보라고."
"아무리 그래도···."
"중정 최고의 요원이었던 자네가 설마 오진수 따위에게 질려고. 후후후···."
"......"
면목없이 고개를 푹 숙인 이화에게 이연은 말했다.
"어제 경찰청장이 찾아왔다면서?"
"예···."
"네 맘에 안들면 잘라버려도 돼. 대놓고 자르는 건 좀 그러니까 요원 붙여서 뒷조사하고, 건수 하나 나오면 검찰이 알아서 털도록 하면 그림이 나오겠지."
"그는 임명된지 얼마 안된 신임 청장입니다. 폐하."
"내 오른팔한테 대든 놈이 아닌가? 자네한테 대드는 건 나한테 대드는 것과도 같아. 공포정치와 단절하겠다는 의도도 내가 직접 밀어주는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남자 이연씨. 악덕 상사 같으면서도 참 좋은 상사. 이화는 기쁜 마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결의를 다졌다.
역시 경찰 나부랭이들을 믿을 수 없다. 이화에겐 믿을 수 있는 후배들이 있다. 유능한 그들과 함께 폐하 곁을 완벽하게 지키리라. 이화는 그렇게 다짐했다.
***
대한제국 중앙정보부의 청사는 남산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흔히들 중정을 일컬어 남산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줄여서 KCIA라고 하는데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CIA를 벤치마킹하여 만든 기관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미국은 국외는 CIA가, 국내는 FBI가 나눠 맡는데, 대한제국은 KCIA 혼자서 국내외 정보를 총괄한다. 거기에 독자적인 수사권도 갖고 있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현재는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를 통해 황제의 친위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군사적인 친위는 대한제국 친위대가, 정보적인 친위는 중앙정보부가 하는 셈이다.
바로 그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이화로부터 황제의 밀명을 받은 그들이 긴박하고 은밀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모든 시작은 중앙정보부장의 집무실에서 시작된다. 김재필의 집무실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덕수궁의 선배님 이화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시작된 작전. 암살기도 차단. 그것을 위해 김재필이 한 것은 1차장과 2차장을 소집하는 것이다. 집무실에 모인 세 명의 간부들이 긴박한 논의에 들어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필이 말했다.
"어린이날까지 이틀이야. 폐하의 일정 수행을 완벽히 보조해야 해. 고아원부터 시작해서 창경원까지. 특히 창경원은 유동인구가 많고 경호가 까다로워서 사전에 차단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국내 첩보를 담당하는 2차장이 말했다.
"친위대 애들이 고생하겠군요. 오진수가 언제 어디서 날뛸지 모르는 판국에 그런 곳에 일정이 잡히니···."
"어쩔 수 없어. 적군파가 날뛰어도 궁에 숨어있지 않겠다는 게 폐하의 뜻이니까."
"역시 지지율 때문일까요?"
"그래. 국민들에게 호감을 얻어야 황실의 권력으로 이어지는 나라니까. 늘상 뭐··· 미국 대통령하고 다른게 없는 구조인거지."
"미국도 그렇게 나갔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었습니다. CIA도 막기 힘든 암살기도를··· 흐음···."
"폐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만큼 보답해야지. 별 수 없잖아."
김재필은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어쨌든 비서실장님으로부터 확인 받았어. 경찰이고 친위대고 모두 우리 말을 따라 행동하게 될거니까. 큰 그림은 나와 비서실장님이 세우고 너희들은 세부적인 플랜을 세워 진행하면 돼."
"저는 늘 하던대로 하면 될까요?"
"그래. 2차장은 일단 폐하께서 다니실 모든 동선을 점검해봐. 그리고 귀국하는 재일교포들을 밀착 감시하고 수상한 자가 있으면 리스트로 만들어서 친위대와 경찰에 공유해줘. 밀입국 단속도 강화해야 할거야."
그러곤 1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외첩보를 담당하는 책임자다. 과거 이화가 있던 자리. 지금은 날렵한 인상의 사내가 책임지고 있는 중책.
"1차장도 많이 바쁠거야. 오진수가 활동할만한 모든 곳에서 정보를 수집해야하니까. 너는 장기적인 플랜으로 가야해."
"뭐든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비서실장님은 오진수가 일본을 기점으로 활동할거라 보고 계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일본이라는 말에 1차장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중국과 한국은 적성국인데다 수백만 군대가 대치중이니 밀입국이 힘들겠죠. 우리 시선을 피해서 무기와 훈련장소를 마련하고 위장신분까지 구하려면 제 생각에도 만만한 게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일본은 여러모로 좋은 조건이지. 가까운 것도 그렇고, 일제강점기 시절 끌려갔다가 그대로 정착한 동포가 많이 있어. 거기에 지금껏 미수교국이었던 터라 우리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거든."
"조선말을 쓰고 조선 문화를 향유하지만 국적은 일본인 일본사람."
"그래, 적군파가 숨어서 활동하기 딱 좋은 장소."
김재필의 말에 1차장이 떠올린 것은 민단이라는 단체였다. 풀네임은 '재일본대한제국민단'. 일본 내 유일하게 존재하는 조선인 단체다.
"알겠습니다. 민단에 정보망을 돌려서 오진수를 찾아보겠습니다. 혹시 경시청의 협조도 받을 수 있을런지요?"
"그건 비서실장님이 손 쓰셨어. 경시청을 포함해서 일본 내 모든 경찰조직, 거기에 공안조사청까지 협력해줄거야."
"공안조사청이라면 일본의 정보기관이 아닙니까? 우릴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을텐데요?"
"적군파는 테러단체야. 테러단체가 자국땅에서 활개치는걸 달가워할리 없지. 마침 한일 양국이 수교도 맺었겠다 공동의 적이 생겼으니 손을 잡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어."
"비서실장님이 거기까지 손을 써주실줄은···."
"우리도 뭐··· 중국이나 소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겠지만 이왕된거 최대한 활용해봐."
"알겠습니다."
사실 일본만 요청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 시각 이화는 덕수궁의 자기 집무실에서 외교부장관에 협력을 구해놓고 사방팔방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속엔 오진수와 협력할만한 조직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협력국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 삼합회에 정보망을 뚫고자 홍콩과 대만의 경찰당국에 전화를 돌렸고, 일본에 전화를 돌린 것도 야쿠자까지 고려했던 조치.
위장신분을 구하고 무기와 훈련장소를 구하려면 현지 폭력조직과 결탁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현지 경찰이나 정보부에 포착될 것이고 그들과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하면 손쉽고 빠르게 그물망을 만들 수 있다.
'오진수···.'
이화의 결의가 마음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