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72화 (72/131)

〈 72화 〉 Ep8. 한국식 입헌군주제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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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닥쳐!"

"전하, 이러지 마시고 제 말씀을 한번만···."

은서와 진혁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시내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황태녀 전하다!' 라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는듯 은서는 눈에 불을 켜고 강력하게 말했다.

“부탁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마. 너랑 정치 문제로 싸우고 싶지 않아. 난 널 좋아하고 있고 너도 날 좋아했으면 싶으니까. 서로 감정 상하지 않게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전태일은···."

“애가 힘들대잖아! 한번만 와달라고, 와서 자기들 처지를 보고 위로해달라고! 그 정도도 못 해?"

"그러니까 그걸 따지는게 아니라···."

“부탁이니까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니 정치성향 가지고 뭐라 안할테니까 나도 제발 존중해달라고.”

그녀가 가는 곳은 편지에 적힌 평화시장. 청계천 근처에 위치한 곳으로 창경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청계천은 본디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하천이었는데, 60년대 들어 도로로 덮어버리는 복개공사가 시작돼 지하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는 고가도로가 추가로 세워지고 있어 이름만 청계천일뿐 거대한 번화가가 되어있는 서울의 중심부다. 그곳에 의류 도매시장이 세워지니 이곳이 바로 평화시장인 것이다.

편지 내용에 눈이 뒤집어진 은서는 청계천 거리를 활보하며 외쳤다.

"학교 다녀야 할 애들이 하루 15시간씩 일하는데 한달 내내 이틀밖에 못쉬어? 건강검진도 못 받고? 지금이 무슨 60년대야?”

"공주님, 그러니까 전태일은···."

"Please shut up!"

(제발 닥쳐!)

은서의 눈에 모든 세상이 검게 보였다. 피가 거꾸로 솟고 눈이 뒤집어져 눈앞을 제정신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편지로 애타게 알현을 호소했던 지옥같은 노동전선의 현장. 그곳에 은서가 발을 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전태일 나와!!!"

코앞에 튀어나온 전태일을 보며 은서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키는 160? 170? 그 중간쯤 되보이고 얼굴은 아담한 앳된 청년이었다. 문제가 있는데···.

“산 사람을 동상으로 세워놓고 꽃을 놔준다고?”

그는 동상이었다. 1:1 사이즈로 세워진 청년의 동상에는 누군가가 놓은 하얀 국화꽃으로 추모하는 것마냥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제서야 진혁은 말할 수 있었다. 분노도, 부정도, 반박도 없는 그 남자의 순수한 호소.

“태일이는 4년 전에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진혁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친위대장님이 제게 경고하셨죠. 황태녀 전하를 노리고 누군가가 편지를 보낸다고.”

“그게··· 내 손에 들려있는 이 편지야?”

진혁은 면목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실장님도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절대 속지 말라고. 절절한 내용을 담아서 황태녀 전하를 유혹할건데 절대로 넘어가지 마라.”

“속지 말라니··· 이렇게 멀쩡히 써져있는 편지가 어떻게···.”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0시 서울 성모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 때 나이 22세. 사인은 분신자살.”

“자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러니까 그 편지는 조작된거라구요.”

은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손에 들려있는 편지를 허망하게 읽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것처럼 절절하게 써져있는 편지가 모조리 조작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여기 적혀있는 18살 노동자라던가··· 한달에 이틀밖에 못 쉬는 휴일 이런 것도 다···.”

“4년 전 이야기입니다. 전하.”

“그럼 대체··· 누가 날 여기로 부른거지?”

그 때 누군가 소리쳐 말했다.

"여쭤보고 싶었거든요!"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진혁이 소리쳤다.

"친위대 위치로!"

그러자 사복차림의 경호원들이 권총을 들고 모여들어 황태녀 전하를 겹겹이 호위했다.

“대화를 하려는 것 뿐입니다. 서울대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에요.”

한 남자가 천천히 상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말끔하지만 허름한 옷차림. 경범죄 처벌법에도 걸리지 않을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안경을 쓴 70년대의 모범적인 서울대생.

진혁은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평범한 대학생이 전태일을 사칭해서 황태녀 전하를 불렀다고? 그걸 믿으라는거냐!”

“전하의 정치성향이 궁금했거든요. 좌파인지 우파인지, 평화인지 전쟁인지, 민족인지 친미인지. 대학생들이 모여 토론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말에 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토론의 결과는?”

“어떤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딱 하나. 좌파 만큼은 아닐 것이다. 좌파 중에서도 노동쪽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어째서?"

“노동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실테니까.”

학생의 말에 은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했다.

"난 민주주의자야."

“민주주의와 독재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걸로 어떤 정치를 할 지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죠.”

"그래서?"

“계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노동을 모르고 살던 전하께 노동자의 처지를 알려드리고,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이 나라 대한제국의 경제는 누구 손으로 이룩된건지 스스로 공부할 기회.”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이 나라의 경제, 한 명의 영웅이 만든 거 같죠? 그걸 실현하기 위해 산업의 현장에서 땀흘리고, 피흘리고, 목숨을 잃어간 노동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전태일을 사칭했다고?”

“예. 황태녀 전하께 노동의 가치를 알려드리기 위한 서울시내 모든 대학 학생회들의 연합 작전이었죠.”

“대체 왜 그렇게까지···.”

서울대생은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되실 몸이니까. 임기 없는 절대 권력으로 정치를 하시겠다면, 최소한 노동자라는 단어 정도는 아셔야 할테니까.”

그의 말에 은서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별 이런 바보같은···.”

“불순했나요?”

“정치같은거 안한다니까... 내가 몇 번을 이야기 했는데···.”

하지만 서울대생은 부정했다.

“전하는 독재자가 될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 나라는 대한제국이니까. 국민의 지지만 있으면 군주도 통치하고 군림할 수 있는 한국식 입헌군주제니까.”

그러자 은서가 외쳤다.

“내가 고치겠다고했어! 상하원합동연설에서도 말했고, 국회 하원 운영위원회에서도 그랬다고. 국민의 대표가 이끄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평화시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울린 다음 은서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했다.

“정치성향이 궁금하다고? 그래! 소원대로 말해줄게! 잘들어!”

첫번째는 경제였다.

“난 산업화가 좋아! 이 나라 경제가 최대한 빠르고 멋지게 성장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국민들의 소득과 근로자의 복지도 똑같이 올라갔으면 해!”

그 다음은 안보였다.

“난 군인이야! 전쟁터까지 다녀왔지. 거기서 직접 두 눈으로 봤어. 전쟁이 일어나선 안되는 이유. 하지만, 평화라는 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든. 그래서 난 든든한 국군이 지켜주는 튼튼한 평화를 원할 뿐이야.”

마지막으로 외교였다.

“친미주의자냐고? 그래 난 미국이 좋아. 왜? 한국전쟁에서 우릴 도와준 동맹이잖아. 하지만 난 이 나라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내 문화를 사랑하고 긍지를 갖고 있어.”

그러자 서울대생이 납득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파면서 좌파가 되고 싶고, 전쟁은 없어야 하는데 군대는 있어야 하고, 친미주의자인데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구요?”

"왜 말이 안돼? 내가 대한제국 황태녀인데?"

“리더라는 건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방향이 너무 불분명하잖아요!”

“그건 국민이 뽑은 정치인의 이야기잖아!”

은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난 황제의 딸이야. 좋은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 만으로 국가원수가 될 몸이지. 임기도 없고 투표로 뽑히지도 않은 권력자가 민의를 대변할 순 없어. 내가 정치를 하면 그건 독재야!”

은서는 당당히 부정했다.

“최저임금 얼마로 올려라, 노동시간 몇 시간으로 줄여라, 세금은 얼마나 걷어서 어디로 쓰자! 외교는 누구랑! 이런거 모두 국민 대표가 뜻대로 해야지 왜 나보고 그러냐고!”

그리고 선언했다.

“절대로 안해! 경제든, 안보든, 외교든 그냥 사안따라 좋게좋게 잘되는게 좋은거잖아! 그게 내 정치 성향이라고!”

은서는 거친 숨을 내쉬며 힘들게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뭘 보라는거야? 텅텅 비어서 아무도 없잖아.”

그녀 눈에 그랬다. 전태일 동상이 1대1 사이즈로 세워져있는 평화시장 입구 뒤로 공장이란 공장들이 죄다 비어 있었다. 유동인구는 완전히 0. 말을 하면 그게 메아리로 퍼져 울릴 수준의 공허함.

"그야 일요일이니까요."

"일요일?"

"일요일엔 쉬어야죠. 노동법이 규정한 이 나라의 규칙인데. 일주일에 최소한 하루는 쉬라고."

"......?"

그것은 편지에 적혀있는 전태일의 호소와 다른 내용이었다. 그래서 은서가 재차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4년만에 뭔가 바뀐거야?"

서울대생은 천천히 다가와 전태일의 동상 앞에 섰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학생의 눈에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이 녀석이 바꾼 결과에요. 노동법도 읽을 줄 모르는 22살 청년이 바꾼 변화.”

"문맹··· 이었어?"

“아뇨. 한자를 몰랐어요. 태일이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 중퇴였거든요. 집안이 가난해서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는데, 그런 판국에 노동법이라고 있는건 어려운 한자로 적혀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지금도 대한제국의 근로기준법은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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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勤勞基準法 第四十五條>

[休日] 使用者는 勤勞者에 對하여 一週日에 平均 一回以上의 有給休日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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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은 없다. 알아서 읽어라.

이런 느낌의 불친절한 법률 용어가 한자라는 이름으로 배우지 못한 청년에게 쏟아졌다. 가난의 이유로 배움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청년은 1페이지를 해석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똑똑한 서울대생은 한탄하듯 말했다.

“이 녀석 평생 소원 중 하나가 공부 잘하는 대학생 친구를 만나는 거였대요. 똑똑한 애가 노동법을 읽어서 자기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독학으로 해석해낸 근로기준법이 알고보니 자신의 노동환경과 판이하게 달랐다. 근로기준법 제45조는 근로자에게 주 1회 이상의 휴일을 보장하지만 당장 그가 있던 공장에서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고, 그것을 토대로 노동환경의 실태를 고발하는 자료를 만들어 노동청에 제출한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귀찮고 짜증나고 뭐 이런애가 왔냐는 냉소적인 표정이 돌아온다. 청년은 절망했다.

<노동법 따위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렇게 절망했던 청년은 1970년 11월 13일. 법전을 불태우며 화형식을 진행했고 자신도 불꽃이 되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외침은 이랬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월남전에 가있던 동안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들은 은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 때도 편지를 작성했었어?”

“전하께서 들고 계시는 편지는 1969년 11월. 태일이가 황제 폐하를 향해 작성했던 탄원서를 각색한거에요.”

“전달된거야? 아버지는 그 때 뭐라고 하셨는데?”

“전달되지 못했죠. 폐하가 태일이의 죽음을 아신건 분신 사건으로부터 7일쯤 뒤. 전임 비서실장의 보고를 통해서였대요.”

<존경하는 황제 폐하. 옥체 강녕하시옵니까? 저는 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대한제국의 가장 밑바닥에서 보낸 편지는 맨 윗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것은 1960년대의 끝자락. 노동청의 감독관도, 덕수궁의 직원도, 내각의 공무원이나 경찰도 그의 목소리를 전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후 4년이 흘렀습니다. 노동환경이 노동법이 정의하는 수준에 맞게 바뀌었냐 하면 전 아직도 부정적이죠.”

서울대생은 은서를 노려보며 말했다.

“산업현장을 시찰할 때마다 폐하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산업전쟁의 영웅이라고. 그건 립서비스일 뿐입니다. 진짜로 영웅처럼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시간이 합리적으로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임금도 여전히 열악하죠.”

그래서 서울대생은 다짐하듯 은서에게 말했다.

“저희는 녀석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태일이의 소원을 위해 대학가에 조직을 결성했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찾아가 무상으로 과외를 시켜주고 있어요.”

“......”

“황태녀 전하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거 평양에서의 시위로 똑똑히 알게됐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생겼어요. 이번엔 다를거라고. 이번에야말로 녀석의 편지를 황실에 전해주자고.”

“받았어. 무사히.”

“하지만 그걸로 알게 된 또다른 문제가 있죠. 황태녀 전하는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계시지만, 결국 언젠가 정치를 하게 되실겁니다.”

“어째서?”

“권력이라는 건 욕망이거든요.”

“욕망?”

“제가 각색한 편지만 읽고도 불같이 달려와 화를 내셨죠? 아무도 없는 여기 찾아와서는 전태일 나오라며 소리를 쩌렁쩌렁 지르셨습니다.”

그 말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편지가 사실이었고 제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22살 전태일이 간절히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전하는 절대 중립을 지키지 못했을 겁니다.”

서울대생의 말을 들으며 은서는 상상한다. 자신이 서있는 바로 이 자리.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의 입구에 이은서가 서있다. 청년은 경찰의 만류 속에 기름을 부었고 분신자살을 하려던 중 황태녀를 만났다.

자신의 편지를 황실이 읽었고 도와주기 위해 찾아왔다는 희망감에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호소한다.

<도와주세요···.>

절박하게 흘리는 눈물을 앞에두고 은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미안해. 난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좋은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권력자가 될 순 없어. 임기도 없고 선거로 뽑히지도 않은 사람이 정치를 하면 독재가 될거야.>

하지만 청년은 더욱 간절하고 절박하게 무릎을 꿇고 호소한다.

<친구들이 아파요. 한번만 도와주세요···.>

<정치는 민의에 따라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해야해. 난 너를 도와줄수 없어. 도움을 받고 싶다면 투표를 제대로 하도록 해.>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옳은 논리지만, 상황을 놓고 보면 쓰레기가 되는 상황. 그런 상황에 놓였을 자신을 생각하니 가소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거야···.”

그러자 서울대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태녀 전하는 방관하지 않았겠죠. 제가 보낸 편지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오신걸 보고 깨달았습니다. 전하는 분명 정치에 손을 대실거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실 거라구요.”

“하지만 그건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이잖아.”

“전하의 마음속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숨어있는 겁니다. 그걸 시험할 계기가 무수히 쏟아지겠죠. 경제, 안보, 외교, 노동까지.

그 중 정의라고 느껴지는 선택지가 있을겁니다. 그걸 실행하려면 권력이 있어야 하는데 고민에 빠지겠죠. 정의를 위해 권력을 쥘 것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정의를 외면할 것인지.”

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돼, 황실이 정치를 하게 되면 민주주의가 퇴보할거야. 좋은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권력를 휘두를 순 없어.”

“하게 되실겁니다. 4년 전 이 자리에 황태녀 전하가 계셨다면 민주주의 같은건 안중에도 없으셨겠죠.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황제인 본인이 직접 나라를 이끄는 대한제국. 결국 그런 나라가 됐을겁니다.”

은서는 상상한다.

자신이 1970년 대한제국의 황제였다면?

평화시장을 방문했다가 노동자의 현실을 깨닫고,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막는다. 지켜지지 않는 노동법에 분노하고 친정을 선포한다.

<내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겠다!>

황제 이은서. 노동자들의 근로 환경을 개선하며 복지에 신경쓰는 대한제국 황제. 국가의 경제 발전과 국민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낸 천재 지도자. 수 많은 노동자들이 능력있는 통치자를 보며 황제 이은서를 찬양한다.

<위대하신 황제폐하! 만수무강하소서!>

모든게 잘되는 것 같지만 딱 한가지 망가지는 게 있다. 민주주의. 임기 무제한 세습직 권력자의 통치 속에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능력있는 황제 폐하가 계시는데 민주주의가 무슨 쓸모냐? 걸리적 거리는거 당장 폐지해버리자. 모든 권력을 황실에게!>

의회가 영구히 해산되고 선거는 중지된다. 천재 황제 이은서라면 자신의 아들딸도 천재적인 지도자로 키울 것이다. 그렇게 똑똑한 피가 흐르는 고귀한 혈통이 조선반도를 통치한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사라질거야···.”

은서는 고개를 들어 서울대생에게 물었다.

“통치에 실패할 수도 있어. 경제와 노동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데 실패하고 분노한 민중에게 끌어내려질 수도 있겠지.”

그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건 황태녀 전하의 능력에 달린 문제겠죠.”

1974년 대한제국. 그곳을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은서가 독재자가 되는걸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황태녀는 군인 출신이라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다.>

<황태녀에게 경제를 가르치면 조선왕조 사상 최초의 경제 군주가 될 것이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경제 전문가!>

<황태녀는 민족주의자가 아닐까?>

<황태녀는 친미주의자다. 그녀는 미국의 국익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황태녀 전하 도와주세요.>

그 추측과 상상, 발언들은 저마다 방향이 달라도 딱 하나의 공통점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대한제국 황태녀는 임기의 제한 없는 독재 권력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될 것이다.>

누구도 은서가 민주주의자가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대생이 보낸 전태일의 편지는 그것을 입증해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황태녀 전하는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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