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Ep7. 악마와의 동맹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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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30일.
가을의 덕수궁. 황제의 집무실에서 이연이 물었다.
"군대도 기름이 없으면 못 돌아가잖아?"
이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답한다.
"자동차, 비행기, 배 등 운송 수단에 연료로 쓰이고 가정에선 난방용으로 쓰이죠. 당장 겨울이 코앞입니다. 연료로서의 용도를 제외하더라도 석유는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만들 때도 쓰입니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도 결국 석유가 있어야 만드는거고, 하다 못 해 농사 지을 때 사용하는 화학비료조차 석유를 원료로 하고 있죠. 마지막으로 저희가 입는 옷의 재질 폴리에스터. 석유입니다."
"농업부터 섬유, 중공업까지 모조리 타격을 받는다?"
"국민들이 체감할 물가도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을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 다음 대답은 이화가 데려온 경제수석이 했다. 덕수궁과 중앙청을 오가며 경제에 대한 일을 전담하는 참모였다.
"일단 정부부터 군, 사회까지 모든 분야에서 강도 높은 에너지 절약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길거리 네온사인부터 시작해 방송사 아침뉴스까지 줄여야겠지요."
"방송사 아침뉴스는 왜?"
"방송을 보겠다고 텔레비전을 트는 것부터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방송사에서 준비하고 신호로 바꿔서 전파로 쏘는 일까지 모조리 전기가 들어가는데 이것도 결국 석유발전이 아닙니까? 원전이 있긴 하지만 혼자서 전력수요 감당은 힘들겁니다.”
이연이 신음하듯 머리를 짚었다.
"소련 놈들은 산유국이라며?"
"예. 이번 사태로 혜택을 톡톡히 볼겁니다."
"우린 석유가 부족해서 군대 훈련까지 줄여야 하는 판국인데, 놈들은 석유값이 올라 돈방석에 앉는다? "
"그들은··· 아무튼 그렇습니다. 폐하."
"안보 위기 해결하려고 국방예산 증가시키고 예비군까지 편성했더니 이젠 경제 때문에 안보위기야? 그놈의 석유!"
"......"
"우리도 석유가 나오면 좋을텐데···."
고심하는 이연에게 이화가 말했다.
"매년 예산을 편성해서 이북 지역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으니 언젠간···."
"맨날 찾아봐야 소식이 없잖아! 소식이! 그리고 줄이기만 해선 안되는 거잖아. 근본적으로 석유를 수입해와야 할 거 아냐? 중동이 아니면 다른데서라도 사오던가. 대책이 뭐야?"
이화가 말했다.
"일단 석유파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동전쟁입니다. 서방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중동국가가 석유를 무기로 쓴거죠.
제 생각엔 중동에 대사를 파견해서 친선을 도모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마침 우리 기업들도 중동에 많이 진출해있으니까 잘만하면 우호국으로 분류되어 석유값이 좀 낮아질겁니다."
"석유가 무기가 될 수 있다니···."
이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경제는 나보다 최 수석이 더 잘 알겠지. 믿고 맡길테니까 책임지고 잘 해결해봐.”
그러자 경제수석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폐하···."
“경제 분야에 있어선 최 수석 자네가 황제다 생각하라고.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밀어줄테니까.”
그러자 경제수석이 넥타이를 가다듬으며 감히 말했다.
"그럼 충심을 담아 간언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그래."
"국방예산을 줄여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이연이 펜을 떨궜다.
"국방예산?"
"저와 상공부장관, 재무부장관을 포함한 모든 기술, 경제 관료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국방예산이 너무 과도해서 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폐하, 지금은 대한제국 경제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릴 마지막 골든타임입니다. 지금 얼마나 투자하고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80년대 제국의 위상이 달라질겁니다. 자동차를 만든다고 경제 발전이 끝난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지금처럼 경제 예산이 계속 줄고 국방 예산만 늘어나면, 당장의 안보는 지킬 수 있어도 10년 뒤의 안보는 지킬 수 없을겁니다. 국방비도 결국 경제력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
“83만 국군 장병들에게 말라 비틀어진 조기 튀김만 주고 있지요. 식단이 부실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장병들의 식단에서부터 무리한 군비증강의 파열음이 일어나는 거 아닌지요?”
“그건 할 말이 없군.”
“지금은 경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연은 고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경제수석은 거침없이 간언을 이어갔다.
“저희에게 돈을 주시면 10년 뒤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경제대국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어째 미국 대사랑 같은 소리를 하는군. 1등 동맹국이 될 수 있다 했었지."
"통일된 조국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으니까요."
"그런가···."
"진정 저희에게 경제의 전권을 맡겨주시겠다면 예산도 보장해주셔야합니다. 대한의 아들 딸들에게 부유한 나라를 물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저 생각해보겠다는 형식적인 메시지로 그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 남자에게 군은 권력 그 이상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경제수석의 마지막 한마디가 이연의 머리 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오늘도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담배를 찾는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딸에게 부유한 나라를 물려준다라···.'
대한제국을 반석위에 올려 하나밖에 없는 딸인 은서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사강국인가? 경제강국인가?
***
같은 날 저녁 8시. 식사가 끝났을 무렵 남자는 남산에 올랐다. 그곳엔 얼마 전에 지어진 남산타워가 우뚝 서있었다. 본디 방송사들이 텔레비전 전파를 쏘기 위해 세운 탑이었지만 높이도 높이고 위치도 위치다보니 여기에 전망대를 세우면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겠다 싶어 그리하라 명했다.
그래서 올라간 남산타워의 전망대는 70년대 서울 야경이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차들이 지나가고 높은 빌딩들이 들어섰으며, 네온사인이 영롱하게 빛나는 통일 대한제국의 서울은 한국전쟁 시절과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남산타워에 이범석 총리를 불러 단둘이 대화를 나눈다.
"재밌는게 뭔지 아나? 남산타워 말이야. 이 자리에 서서 내려다보면 덕수궁이 훤히 보이거든. 온 국민이 여기서서 황실을 내려다보는거지."
서울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에게 70대 노인 이범석이 말했다.
"그래서 전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진행하라 하시기에 이 위치에만 망원경을 설치하지 못하게 했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덕수궁이 있는 종로엔 고층빌딩도 못 짓게 했습니다."
"덕수궁이 이 나라의 황궁으로 부적합하다는 거 처음으로 느꼈어. 시청 광장에서 시위만 일어나도 국민들 목소리가 쩌렁쩌렁 집무실까지 들리더라고."
"앞으론 그런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그러자 이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문제는 덕수궁이야. 덕수궁 때문에 서울의 노른자 땅인 종로에 빌딩을 못 짓고 있잖아? 저기 야경을 봐봐. 덕수궁에 가까울수록 어두컴컴하고 덕수궁에서 멀어질 수록 높은 빌딩과 영롱한 네온사인이 반짝반짝거리잖나? 하다 못해 자동차조차 덕수궁을 피해서 다니고 있어."
"하오시면···."
"그런데도 왜 덕수궁을 고집하는 줄 아나?"
"광무개혁을 실시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신 고종 대제께서 쓰시던 궁전이기 때문이지요."
그 말에도 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아까워서야."
"......?"
"황궁 지을 돈으로 나라 경제나 더 발전시켰으면 했거든. 사실 지금도 조금만 무리하면 자금성 같은 것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어. 황금 빛으로 번쩍번쩍하는 도시만한 크기의 황궁 말이야."
그러자 이범석 총리가 웃으며 말했다.
"보고싶군요. 조선판 자금성."
"하지만 10년 뒤에 짓는게 더 좋을거야. 그 때는 건축 기술이 더 발전했을 것이고, 세계 일류의 반열에 든 경제 대국 조선이라면 자금성 정도야 우습겠지. 마침 경복궁터는 국가 소유라서 땅값 걱정도 없잖나?"
"지금 지으셔도 가능합니다. 내각은 다른 곳을 알아볼테니 건설사 대표들을 부르시어···."
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은서 몫으로 남겨줄거야. 녀석이 살 궁전이니 녀석이 결정해야지. 지 딴에도 취향이 있다고 머리속에 멋진 궁전을 잔뜩 그려놨을텐데 말이야."
"......"
“그 때면 황궁짓자는 소리가 끊이질 않을거야. 경제강국이 되면 국민이고 제계고 제발 번듯한 황궁을 지어 이사가시라 하소연하겠지. 종로는 군침을 흘릴만한 서울의 노른자 땅이니까.”
"그 때면 제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한제국의 멋진 황궁을 보고가야할텐데···."
노인의 걱정에 중년의 황제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10년만 참아봐. 아직 70대 아닌가?"
"이미 저승길 문턱을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세번째는 허허···."
이연이 숨을 들이키며 자신의 포부를 말했다. 남자의 결심, 남자의 포부, 그의 야망.
"이 총리, 우리 이제 그만하지."
"어떤···?"
"일본과 국교정상화 받아주자고. 배상금 받고 군사동맹 맺으라는 미국 요청도 들어주고.”
그러자 이범석 총리가 놀라며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미국대사도 우리 관료도 그러잖아. 지금이 대한제국 경제의 골든타임이라고. 지금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는데 언제까지고 군사력에만 집중할 순 없어."
"하오나 그건··· 국민적인 반대가 폭발할겁니다. 폐하의 권력은 군에 근거하지만 기초는 대중의 인기에 기반하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시는 것은 폐하의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할 중대한··· 아니, 황실의 존속까지 걸어야 할 도박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국교정상화만 해도 이 정도이온데 일본과의 군사동맹이라니요? 국민들이 황실을 폐지하자며 혁명이라도 일으키면 어쩌실려고···."
“석유파동만 안 터졌어도 어떻게든 버텼을거야.”
“......”
“석유가 없어서 경제위기에 처해있어. 그런 판에 소련은 석유로 축제를 벌이고 있지. 우린 군대에 기름을 정량대로 보급할지 아니면 줄일지 고민을 하고 있는 판인데 전쟁이 나면 어쩔텐가?”
“하오나···.”
“데프콘2 발령이 올해에만 두번째야.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고 계속 군사 도발이 이어질 때마다 이런식으로 대응하면 이 나라는 정말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지. 언제까지고 전쟁의 공포에 시달릴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폐하, 그것은 도저히···.”
“이 나라가 휴전 국가면 괜찮았을지도 몰라. 유엔의 감시를 받으며 중간에 휴전선이 쳐지고, 그렇게 완충지대가 존재했다면 철조망에 의존해도 됐겠지.
하지만 우린 아니야. 수백만 군대가 강물 하나를 두고 대치를 벌이고 있어. 그나마 백두산은 강물조차 흐르지 않는 육로인데 거길 사이에 두고 전차끼리 대치를 벌이는 판 아닌가? 우린 소련과 중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해."
“그래도 안됩니다! 폐하, 조선의 국방은 조선이 지켜야 합니다!”
이연이 말했다.
“이 총리, 우리는 혼자서 지킬 능력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