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Ep6. 위화도 위기 (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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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빴던 새벽이 지났다.
8월 2일 아침. 여전히 데프콘2가 발령되어 있었고 위화도에서 울린 총성을 들은 중공군이 압록강까지 보병부대를 끌고 몰려온다.
일촉즉발의 상황.
대한제국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서북방위사령부 휘하 7군단 기갑연대가 총사령관 이은서의 지시를 받아 새벽내내 최고속도로 질주하여 M48 패튼 전차 30대를 끌고왔고 그것을 위화도 뒤쪽 강가에 일렬로 배치하여 중국방면으로 포신을 겨누고 있었다.
위화도를 가운데에 놓고 양군이 대치를 벌이는 뜨거운 순간.
은서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 황태녀의 고운 한복을 입고서 위화도 마을 광장에 앉아 보란듯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 여자. 새벽 내내 전투를 벌여놓곤, 진희로부터 한복과 거문고를 넘겨받아 갈아입고서 즉석에서 연주회를 벌인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계산이 담겨 있었다.
대한제국 외교부는 중국 외교부에 다음과 같은 통지문을 전달했다.
<금일 새벽 위화도에서 장병들의 위문공연이 있을 예정임. 대한제국 황태녀가 직접 진행하는 공연으로, 기갑부대 장병들과 특공대 장병들이 함께할 예정. 일상적인 문화 행사이므로 참고하기 바람.>
문화행사를 빙자한 무력시위.
분명 탱크의 포신이 중국을 겨누고 있는데 그 앞으로 대한제국의 황태녀가 한복 차림으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고, 장병들이 분명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있는데 황태녀 주위에 서서 연주를 듣고 있을 뿐인.
전쟁인듯 아닌듯 도발인듯 아닌듯. 하지만 분명 위화도에 대한제국의 군대가 주둔중인 영유권 주장 행위였다.
이런 '쇼'를 진행하고 있는 서북방위사령관 겸 황태녀. 이은서의 속마음은 이랬다.
'우린 무력시위가 아니라 문화행사를 벌이는거야. 왜? 이상해? 이상하면 어쩔거야? 여기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핵전쟁이야. 모스크바건 워싱턴이건 베이징이건 서울이건 다 핵전쟁으로 멸망하는 지구 멸망 엔딩이지. 피차 그건 싫잖아?'
거문고를 연주하며 강 건너 중국인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짓는 대한제국 황태녀의 모습. 그들은 듣지 못할 작고 작은 마음 속 한마디.
'그러니까 못 본척 별 일 아니구나 생각하며 돌아가는거야. 어젯밤 우리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돌아가··· 졸려···.'
그들은 모를 것이다. 리듬을 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꾸벅꾸벅 졸면서 거문고 연주가 조금씩 엇나가고 있던 것을.
공주는 그저 잠을 자고 싶었다.
***
양국의 군사적 긴장감은 8월 11일에 해소됐다. 중국과 소련 측에서 공동성명으로 경고했던 '필요한 모든 조치', '혹독한 대가'라는 게 뭔지 밝혀졌기 때문이다.
소련군 기갑부대가 극동에 파견됐다. 중국의 요청에 의한건지 소련의 동북아 정책이 바뀐건진 모르겠지만, 양국은 만주벌판에서 합동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중소간 국경분쟁으로 내분을 벌이던 둘이 미국과 대한제국 앞에 똘똘뭉쳐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었다.
이 사건을 두고 외신에선 이렇게 평가했다.
<데탕트는 끝났다.>
중국과의 화해를 추진하던 닉슨 대통령의 정책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결론난 모양.
어쨌든 선전포고는 아니었고 전쟁도 아니었기에 데프콘2는 평시 단계인 4단계로 하향조정됐다. 올해로 벌써 두번째있는 일이었다.
비상시국 내내 서북방위사령부 지하벙커에서 먹고자고 생활하던 이연은 사령관 자리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철야근무로 피곤한 남자에게 비서실장 이화가 찾아와 말했다.
"우리를 떠보려는 계획이었을겁니다."
이연이 눈을 비비며 나지막이 말했다.
"숙청 이후 약체화된 39만 병력의 준비태세를 북한군 잔당으로 시험해봤다 이건가?"
"네, 위화도를 점령하고 있던 적군파들을 심문해봤는데 중공이 뒤에서 무기를 대고 있었다는군요. 외교채널에서는 여전히 관계를 부정중이랍니다."
"놈들은 그걸로 뭘 얻은거지?"
"대한제국의 피로도를 끌어올렸죠. 이북 주민들을 동요시켜 피난가게 만들고, 군을 움직이게 해서 자원을 소모시켰으니까요."
"공동성명 하나랑 북한군 잔당으로 손 하나 안대고 한미동맹을 놀려먹었다?"
"네. 명백한 판정패입니다."
이연이 이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북한군 잔당을 적군파라 부르는군. 놈들이 주장하는 명칭인가? 아니면 자네가 지은 명칭인가?"
이화가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제 작품입니다. 경찰에서 조폭들 일망타진할 때 임의로 조직명을 부여하듯 저도 한번 해보는거죠."
"북한군 잔당을 조폭 취급하다니. 허허 참···."
"조선노동당의 건재를 알리면 국내 안보에도 좋을 게 없으니까요. 적군파라는 용어를 공식화하여 테러단체로 취급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실장 맘대로 해. 그보다도··· 김일성은 어떤가? 아직도 수장으로 있나?"
"행방이 묘연한데 아직 살아있을겁니다. 중국 정부가 적군파에 자금을 대는 거보면 그렇겠죠. 연변 지역에 순찰 병력을 강화한 건 무관함을 주장하기 위한 연출일 뿐. 중정에선 아직도 둘의 관계가 건재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은서가 그 적군파라는 놈들을 체포해왔지? 그 놈들은 어떻게 할건가?"
"남산에서 계속 심문할 예정입니다."
"중정에서 고문을 하고 있었나?"
이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두겠습니다."
"......"
이연이 살짝 죄책감 섞인 표정으로 노려봤다. 남자의 표정에 이화는 여전히 담담한 태도다.
"저도 얼마 전까진 중정 요원이었습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중정에 특채로 들어가고. 모두 폐하의 지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뒤로 1차장까지 올라간 건 제 실력이었죠."
"그래, 많이 힘들어했었지···."
"놈들은 하마터면 세계3차대전을 일으킬 뻔했습니다. 그들을 심문하여 적군파의 규모, 본거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김일성의 행방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 적군파를 일망타진 하지 않으면 대한제국은 언제고 안보 위기에 시달리겠죠."
"그건 그렇지만···."
"하기 싫은것과 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전 항상 망설였고 괴로워했지만 해야할 일을 회피한 적은 없습니다."
"그건 무엇을 위해서였나?"
이화는 담담히 말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
그 날 저녁, 옥류관에선 한참이나 늦은 은서의 생일파티가 열렸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모두 고마워!"
특실에서 마련된 핑크빛 거대한 3단 케이크. 우아하게 꽃혀있는 촛불들을 후! 불어가며 단번에 꺼버리고, 맛깔나게 먹어치우는 28세의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고운 한복차림, 행복한 미소. 위화도의 여전사는 다시 예쁘고 귀여운 소녀로 돌아왔다.
제2부속비서관 진희와 직원들, 김훈 중령과 대원들, 김진혁과 경호실 직원까지. 거기에 아버지 황제 폐하와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 친위대장 차지연까지 한데 모여 이루어진 은서의 늦은 생일파티가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부녀가 오붓하게 대화를 나눈다. 남자의 꿈같은 시간이었다.
"너, 나한테 유서를 썼었잖냐?"
"그랬지."
"첫 번째 인사는 거짓이라고 했었지. 사랑하는 아버지. 그렇게 써놓곤 막상 거짓말이라니? 왜 굳이 번거롭게 쓴건지 이유를 들어보고 싶은데."
유서의 첫째 줄을 떠올린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무서웠어."
"무서웠다?"
"우리나라 500년 전 건국이래로 쭉 조선왕조실록을 썼잖아?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놓고 당사자들은 읽지도 못하게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는거. 역사책."
"하지만 일제강점기 거치면서 모두에게 공개됐지. 온 국민이 자유롭게 읽고있는 문화 유산이 뭐가 두렵다는거냐?"
"다시 쓰고 있잖아. 대한제국실록으로. 국가기록원에 있는 자료까지 죄다 긁어모아서 진행하고 있을건데."
"흠··· 듣고보니···."
"그렇게 편찬된 아버지의 대한제국 실록은 수백년 뒤 후손들이 역사책으로 읽게 될건데 갑자기 확 무서워진거야. 거기에 내 유서도 들어갈 거 아냐? 공주 이은서가 마지막 전투에서 이런 유서를 남겼다고."
"그래서?"
"와··· 후손들이 국사시간 때 내 유서를 읽으면서 공부할거아냐? 그게 막 나중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영화도 나오겠지?
그런 상상하니까 부끄러워져서 뭘 쓸지 한참 고민했거든. 그러다가 남은거야. 어쨌든 편지니까 인사말은 적어야겠는데 욕지거리를 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사랑한다고 남기자니 양심에 찔리니까. 본심이 아니니 니들이 알아서 흘려 들어라."
"......"
은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상하지?"
"바보같달까 멍청하달까···."
"사실 지금도 아버지가 싫어. 공산당 만큼이나."
"......"
"그래도 아버지 옆에 붙어있는 이유가 뭔 줄 알아?"
이연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천천히 딸의 대답을 기다리는 57세의 아버지. 그런 그에게 하는 28세 딸의 이야기.
"이기지 못할 거 같아서."
"이기지 못할 거 같다?"
"나 말야. 월남에 가서 처음엔 죽으려고 했어. 비내리는 연병장에서 울고불고 뛰며 한참을 있는데 왠걸? 죽지를 못하겠는거야.
너무 분해서 죽을 수가 없었어.
장교씩이나 되어 부하들에게 무시당하고, 근데 난 지도 하나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까. 너무 무능했고 그래서 부끄러웠고 한편으론 분했던거야. 그래서 죽지 못했어."
"분해서 죽을 수가 없었다라···."
"아마 승부근성이란 거겠지?"
이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지금 날 라이벌로 보는구나?"
"그런가봐. 근데··· 이기질 못하겠더라. 사람 부리는 능력, 말하는 솜씨, 체력조차 밀리고, 한국전쟁의 영웅이란 타이틀도 대단하고, 그런 명성에 걸맞게 비상사태를 수습하는 능력까지 아버지는 너무 완벽해."
"그래서 미워하는 걸 보류하겠다?"
"응. 아버지를 뛰어넘을 때까지 옆에서 배워볼려고."
그러자 이연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건성건성 가르쳐야지. 평생 딸한테 사랑받으며 살려면."
은서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진심이야?"
"딸이 애비더러 공산당만큼 싫다는데 그럼 안되잖냐?"
"......"
이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말이다. 이 나라는 너 하나 팔아먹는다고 살림살이가 나아질 그런 나라가 아니야. 정략 결혼을 보내 받은 돈으로 키우기엔 많은것이 거대해졌거든."
"내 몸 값으로는 택도 없다고? 이 나라가 그정도로 컸어?"
"니가 65년에 군대를 갔었지. 사관학교에서 4년을 보내고 월남에서 3년을 보내고. 돌아와 1년을 폐인처럼 지내고. 도합 8년을 사회로부터 떨어져 지냈어. 그 동안 대한제국은 많은 것이 바뀌었지."
은서는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뭐, 진짜로 한강의 기적이라도 일궜나? 서울 보니까 좀 달라져있긴 하던데."
"조만간 시찰이나 다니자. 고속도로도 구경하고, 제철소도 구경하고, 원자력 발전소도 구경시켜 줄테니까."
마지막 한 마디에 은서가 깜짝 놀라 물었다.
"원전이 있었어?"
"1970년 부산에 원전을 지었거든. 적당히 때가 되면 아비랑 같이 팔도 유람이나 가면서 대한제국의 발전한 모습을 구경하자. 그러니까 스스로를 희생해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느니 정략결혼을 시켜달라느니 그런 건 그만 잊어."
은서는 기쁜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가 한마디를 더 얹는다.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할건데···."
"음?"
"니 애비는 말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끔찍히 사랑하거든."
"그러면?"
"니 하고 싶은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원하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갖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음··· 그거 참 고맙긴 한데, 황태녀 직함을 달고 속 편히 남자를 만나는 게 가능할까?"
머리를 긁적이는 은서에게 아버지가 슬그머니 물었다.
"진혁이는 어떠냐?"
"걔?"
"아무리 마음이 없어도 나이 서른이 넘기 전엔 결혼을 해야지. 더 늦다간 이 나라 종묘 사직이 네 선에서 끊길지도 모르는데. 이런 애비 사정도 생각해주고."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는 아버지의 제안에 은서는 대답을 망설이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끄러운듯 머리만 긁적이던 딸이 심통난 표정으로 묻는다.
"그 녀석 아버지가 사위감으로 붙인거였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남자로 바꿔줄 수도 있어.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가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날 때 까지 힘을 써주마."
"음···."
쉽게 말해 맞선을 붙여주겠단 소리. 이 남자의 엉뚱한 야망에 은서는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렸다.
월남에서 자신의 자살소동을 말리던 진혁이, 월남에서 돌아와 폐인처럼 지내던 자신에게 밥을 떠먹인 진혁이.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알아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진혁이.
공포스러운 불꽃의 향연에서 자신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던 녀석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거기에 혹해서 반쯤 정줄 놓고 고백해봤더니 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뻥 차버리는 고자새끼.
아버지(황제)가 시켰다는 이유로 곧이곧대로 따라 공주의 은밀한 정치적 대화를 무단으로 녹음한 쓰레기. 정치적 견해 조차 독재와 민주주의로 상반되게 다른 파시스트 같은 자식.
하지만 그런 녀석이 평양에 미끼로 보내진 동안 옆을 지켜주며 모든 노력을 다했고 수트핏이··· 끝내주게 멋졌다. 꼴에 남자라고. 후훗.
그러다 위화도에선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고 마침내 전우의 관계가 된 것이다. 도끼를 들고 달려들던 북한군 잔당을 업어치기로 제압해버리는 멋진 남자 김진혁이긴 한데···.
은서는 진혁이가 있는 곳을 바라본다.
황태녀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특실의 입구쪽에 우두커니 혼자 서있는 김진혁. 검정 양복을 차려입은 녀석은 여전히 자신이 보디가드라도 된듯 샴페인이나 홀짝이며 경호를 서고 있는 것이다.
'손님으로 초대됐으면 파티를 즐겨야지 혼자 경호를 서는건 뭐야? 하여튼 저 고자···.'
은서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손자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번지수가 틀린 거 같지않아?"
Ep.7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