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Ep5. 숙청의 밤 (1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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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은서는 제복 차림으로 야밤의 숲속 길에 리무진을 타고 있었다.
"졸려···."
뒷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공주님을 보며 진혁이 미소를 지어 말했다.
"그러게 왜 굳이 밤에 돌아가자 하신겁니까? 부대에서 자고 가시면 좋았을텐데요."
"훈이 오빠가 밤에 가자잖아. 부대 관사가 방어하기 어렵다면서."
"흐음···."
꾸벅꾸벅 졸던 은서의 고개가 진혁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러자 딱딱한 금속 뱃지가 은서의 머리를 찌른다. 이 남자. 여전히 계급장 달린 친위대 제복을 입고 있다.
"아이씨, 너 양복 안 입을래?"
"전 친위대인데요."
“얘가 보디가드면 양복을 입어야지!”
"예?"
진혁이 황당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전 보디가드가 아니라 부관입니다! 수행원이란 직책이 있어도 이건 어디까지 종합적인···."
"황태녀로서 명령한다. 김진혁 중령. 내일부터 정장을 차려입도록."
"거절합니다!"
"명령인데?"
"......"
그러더니 대뜸 무릎에 누워버리는 28세의 여자. 넓직한 리무진에 편히 드러누운 그녀가 다시금 남자의 고통을 선물한다.
"아, 아니 좀···."
"도착하면 깨워."
"......"
그 때 리무진 밖에서 총성이 들렸다.
"뭐야!?"
은서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앞쪽에 호위로 지나가던 차가 눈에 들어온다. 한쪽의 타이어가 터져나가 좌우로 급격히 흔들리며 은서의 리무진까지 막아버린다.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렸고 이번엔 오른쪽 바퀴의 타이어까지 터져 당황한 운전수가 급브레이크를 걸어버렸다.
"꺄악!!!"
은서의 호위행렬이 연달아 멈춰섰다. 숲속에 매복해있던 특공대가 튀어나온다.
"뭐, 뭐야 이건?!"
진혁이 긴장어린 눈빛으로 권총을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그거인 거 같습니다."
"그거라니?"
"폐하가 말씀하신 미끼 말입니다. 아무래도 월척이 낚여버린 거 같은데···.”
"하필 이럴때···."
예상한 미래,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 그 끝에 이어진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결과가 현실로 다가온다.
"반란이 터질거라곤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기습당하면 큰일인데···."
“뭔가 이상합니다. 황태녀 전하의 이동 동선은 친위대가 관리하는 기밀 작전이라 알 수 없을건데 어찌 여기서 매복을···.”
“그래도 훈이 오빠의 친위대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일단 둘러보고 오죠.”
은서가 진혁의 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지말라고.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녀의 걱정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진혁이 담담히 말했다.
“친위대에게 두 번은 없습니다. 금방 올게요.”
"진혁아···."
그렇게 진혁은 리무진의 뒷자석을 열어 밖으로 나간다. 조용하고 쌀쌀한 숲속의 밤거리. 차밖으로 나온 진혁에게 총구를 겨누는 남자가 있었다.
"다시 들어가라. 김진혁 중령."
익숙한 남자 목소리에 진혁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남자의 이름. 대한제국 친위대 김훈. 은서의 선배가 자신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뭡니까? 이건?”
"공주님의 안전을 위해서니까 들어가 있어."
"친위대로서입니까? 반역자로서입니까?"
김훈 중령이 담담하게 말했다.
"은서가 인질로 있는 동안 안전은 내가 책임질거다. 걱정말고 들어가."
"......!"
그 소리를 들은 은서도 믿기지 않는 눈으로 올려다 보며 물었다.
"훈이 오빠?"
"미안하다. 은서야."
***
야심한 평양의 밤거리. 총성은 없었다.
모든 군단, 그 밑으로 모든 사단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들의 반란을 막을 세력은 평양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침묵 속 어둠을 뚫고 달리는 7군단 기갑연대의 전차가 교통 경찰의 묵인 속에 시속 40km로 도심을 질주하며 서북방위사령부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앞길을 막아선 유일한 존재는 서북방위사령부의 경비대. 친위대에게 역할을 뺏겨 들러리 역할을 하던 이들이 의외의 충심을 발휘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을 노렸지만 밀려오는 전차부대를 보곤 사기를 상실해 백기를 들었다.
"이거 의외로군. 가장 앙심이 깊었을 거 같은 사령부 경비대장이 황태녀의 편을 들다니."
구남철 중장의 웃음에 기갑연대장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친위대에 역할을 뺏겨서 이를 갈고 있었을텐데. 꽤 유능한 인재였나봅니다."
"김훈 중령으로부턴? 연락이 왔나?"
"20분 뒤에 기갑연대 막사로 황태녀를 데려오겠답니다."
"소고기 파티를 즐겼던 첫만남이 이루어진 그 장소로구만. 짓궂기도 하지."
“아무튼 사령부도 장악했고, 평양 시내도 꽉 잡고 있으니 혁명은 성공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래.”
은서의 수행원으로 있던 많은 숫자의 비서진, 경비대 병력 등이 7군단 기갑연대의 병사들에게 포박되어 납치되듯 군용 트럭에 끌려갔다. 그 중 고위급 인사로 보이는 여성을 발견하고 구남철 중장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2부속비서관이군. 왜 공주랑 같이 있지 않은거지?"
"더러운 반역자 새끼!!"
그렇게 외치곤 구남철 중장에게 침을 뱉어버렸다. 군복의 옷소매로 침을 닦아낸 중장이 진희에게 싸대기를 날렸다.
"으악!"
"딱 한대로 끝내지."
"......"
"너희들이 잘못한 게 뭔 줄 아나? 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어. 소고기 좀 사주고 사격시범 보여준다고 끝날 거라 생각하다니. 멍청해도 유분수지."
"뭐라고?"
"군은 말이야.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거든. 병사들 마음이 어떻든 간에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따르게 되어있는거야. 그게 군율이니까.
내가 너였다면 소고기 살 돈으로 장군들 뇌물이나 돌렸을텐데. 그랬다면 적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
그러면서 구남철 중장이 손짓을 한다. 진희가 병사들에 붙들려 트럭으로 끌려갔다.
"다음엔 더 분발하도록. 김진희 비서관."
트럭 속에 꿇려앉혀진 진희에게 안대와 재갈이 씌워졌다.
***
은서가 인질이 됐다는 소식과 사령부를 장악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부사령관 최형욱 중장에게 보고됐다.
"됐어!"
장군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부사령관님!"
1군단장이 물었다.
"이제 다음 계획은 역시 군권을 틀어쥐는 문제겠지요?"
"그래야지. 이참에 대한제국의 군권을 틀어쥐어야 영구적인 안전이 보장될테니까."
2군단장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황태녀를 인질로 삼아 황제와 협상. 군부의 주요 자리를 독식하는겁니까?"
"그래, 황제의 약속만 믿고 황태녀를 풀어줘봐야 배신당하면 끝장이니까. 경친왕 전하와 백선경 장군님의 명예를 유지하려면 약속을 유지할 힘을 확보해야 해."
"그럴려면···."
"보안사령관, 친위대 수도경비사령관, 각 공수특전여단 자리를 확보해야하고, 국방대신으로 백선경 장군님을 모셔야 할거야. 황제가 우리를 두려워하고 약속을 어기지 못하게 총구를 겨눠야지."
"덕수궁의 그 여자도 끌어내려야 할겁니다."
"누굴 말인가?"
2군단장이 확고한 태도로 단호히 말했다.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 그 여자가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를 틀어쥐고 있는걸로 압니다. 그 여자랑 김재필을 쫓아내고 우리 사람을 앉혀야 저희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최형욱 중장이 아차 싶은 생각으로 답했다.
"하긴 그렇군··· 수성군을 협박해서 경친왕 전하도 암살한 놈들인데. 정보 조직을 틀어쥐지 않으면 언제든지 암살 당할 수 있겠어."
그 때 VIP룸으로 부관 한 명이 달려와 말했다.
"총리께서 여기로 오고 계신답니다!"
"뭐?! 이범석 장군이?"
"예! 황실에서 보낸 협상단인 것 같습니다."
"쳇, 그 능구렁이가 협상단장으로 오는구만. 협상이 쉽지 않겠어."
그의 걱정에 참모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봐야 황태녀가 저희 손아귀에 있지 않습니까? 구남철 그 작자. 처음엔 망설이는 척 하더니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비서관한테 손찌검까지 했다더군요.
"풉···."
"군단에 심어둔 첩자가 올린 보고니 믿어도 될 거 같습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
저녁 11시. 은서는 양팔이 결박된 채로 7군단 기갑여단에 걸어 들어온다. 자신이 병사들에게 소고기를 사주었던 그곳. 전투적인 각오로 사격 시범을 보였던 어쩌면 추억이 될지도 모를 장소가 지금은 비극의 장소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은서의 푸념에 김훈 중령이 물었다.
"뭘 말이냐?"
"오빠 손에 끌려와서."
"......"
김훈 중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를 끌고오고 있는 장본인이 친위대와 7군단 휘하 특공여단이라는 점이 왜 위로가 되는건지 모르는 눈치였다.
"생각해봐, 내가 소고기를 사주며 마음을 얻고자 했던 애들이야. 그런 애들한테 배신당해 끌려오는 거였으면 얼마나 슬펐겠어?"
"......"
"차라리 오빠 손에 끌려오는게 낫지."
"미안하다···."
은서가 조용히 물었다.
"왜 배신한거야?"
"그야 난··· 경친왕 전하의 부하로 있었으니까. 그분이 죽은건···."
은서는 망설임을 섞어 던지는 김훈 중령의 눈빛을 보며 말했다.
"거짓말."
"......"
"내가 오빠랑 보낸 시간이 그래도 2년이 넘는데. 경친왕이랑 있어봐야 몇 년이나 있었다고 어떻게 그래?"
"미안하다. 은서야."
"오빠, 지금이라도 그만둬. 죽을지도 몰라."
김훈 중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 없을거야."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은서의 얼굴엔 걱정이 서려있었다.
"알잖아. 나 여기 미끼로 온거. 오빠랑 오빠 상관들이 주도한 반란이 성공할 거 같아? 물고기가 미끼를 물어봐야 죽을 뿐이잖아."
“미끼만 뺏기고 놓칠지도 모르지.”
“오빠 제발!”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우리의 목적만 달성하면 다시 풀어줄거야. 그대로 서북방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나중에 황제가 되고. 우리의 기득권을 지켜주며 황제 노릇을 하면 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옆에서 담담히 걸어가고 있는 김진혁 중령을 쳐다본다.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녀석이 품에 담긴 총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내가 저 녀석한테 총기 소지를 허락한건 약속 같은거야. 너와의 약속.”
그렇게 말하며 김훈 중령은 진혁에게 경고했다.
"내가 재차 강조하지만, 그걸로 날 쏘진 않는게 좋을거다. 내가 친위대를 통제하고 있어야 특공여단 애들이 은서를 못건드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은서가 특공여단 애들에게 휘둘려 이리저리 치욕스러운 짓거리를 당하고 그러다 길거리에 시신으로 발견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호신용으로만 써. 그건 내가 허락해줄테니까."
"이걸로 공주님을 탈출시키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니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300명의 친위대랑 특공여단을 뚫어내고 탈출시킬 수 있을까? 경호실의 니 부하들은 모두 포박해놔서 아무 힘도 못쓰는데."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목숨을 걸어서 공주님 옆이나 지켜. 당분간 너 혼자서 24시간 철야로 공주님을 지켜야 할테니까. 여기 특공연대 애들 무시무시한 거 알지?"
"......"
“너 마저 없으면 공주는 혼자 남을거야. 그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니 알아서 지켜. 인질이 인질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말야.”
"당신이란 남자는 정말···."
"그래, 나 이런 남자야. 앞으로 더한 짓도 할거니까 똑똑히 봐둬."
“왜 선배씩이나 돼서 이런 짓을 하는겁니까?”
"그야 뻔하잖냐? 이런 짓을 할려고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거니까."
"......!"
"내가 설마 진짜로 평양에서 탈영했다고 생각해?"
"뭐라고?!"
김훈 중령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모든 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어. 은서가 월남에서 돌아온 그 순간부터 경친왕 전하가 들어둔 보험 같은거였지."
은서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김훈 중령을 바라보았다.
"오빠···."
은서는 떠올렸다. 그 날의 기억. 저녁 무렵 현충원에 있었던 오빠와의 재회.
<이제왔냐?>
<몇 번을 말해? 니가 걱정되서 왔다고. 이 모습이어야 월남시절의 날 떠올릴거 아냐?>
은서가 울먹이며 말했다.
"선배로서 날 걱정해서 온 게 아니라···."
"그래, 너한테 접근하려고 의도적으로 왔을 뿐이야. 그러니까···."
쓰디쓴 표정으로 진실을 털어놓는 김훈에게 은서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거짓말하지마!!!"
“......”
“뻔한 거짓말로 날 놀릴 생각 마. 그 날 내가 현충원에 갈 거 알고 있었잖아. 11명의 부하를 잃고 죄책감을 갖던 내가 자살을 할지 사과를 하러 갈 지. 오빠는 분명히 알고 있었어.”
은서가 흐느끼며 말했다.
“내 선배이자 전우였으니까. 걱정돼서 온 거잖아. 부정하지 마. 나한테 그 시간이 진짜였다고 말해. 오빠한테 위로받고 격려 받고 혼나서 정신 차렸던 그 시간은 소중하단 말야···.”
“은서야···.”
“배신은 그 이후라고 해줘. 그 때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말해.”
“......”
“그렇지 않으면 난 다시 무너지고 말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