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Ep5. 숙청의 밤 (9)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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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년 전 월남에서의 기억. 은서의 마지막 전투.
정글이 우거진 산에서 폭음이 들렸다.
'이 소리는 설마?'
11m 떨어진 뒤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였다. 연이어 괴성이 들려온다. 놈들이 폭격을 요청한 것이다. 북한군의 요청아래 월맹군이 쏘았을 포탄의 빗줄기가 은서의 머리위로 날아오고 있었다.
- 콰앙!
"으아악!!!"
은서가 비명을 질렀다. 하늘에서 강철의 비가 내렸다. 수풀에 숨어 저격을 하던 은서를 잡기 위해 북한군이 요청한 포격. 전달받은 좌표에 따라 월맹군이 쏴준 포탄이 은서의 머리 위로 수십 발씩 날아와 여기 저기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살려줘···."
수풀에 납작 엎드려 몸을 웅크린 은서는 겁에 질려 있었다. 바로 옆에서 무수히 많은 포탄이 떨어져 대지를 찢어 발기고 있었다. 친위대도, 아버지도, 전우들도 없이 오롯이 공주 혼자서 맨몸으로 위협받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포격은 10분 정도 계속된 거 같다. 아니면 20분? 40분? 한 발 한 발이 떨어질 때마다 제발 그만 쏘라고 간절히 빌었던 시간이 엉겁의 세월처럼 느껴져 몇 분이나 계속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포격이 멈췄을 때 자신의 든든한 무기인 모신나강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수중에 남은 건 수류탄과 권총 한자루. 그 상태에서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러 올 북한군을 상대해야 했다. 최소 10명 이상일진대. 분명히 죽을 거라고 식은 땀을 흘렸다.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자기도 모르게 발현된 생존 본능이 머리 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지식을 일깨운다. 교범에서 봤던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방법. 철사 한 가닥과 수류탄 두 발, 옷 한벌이 있으면 만들어낼 수 있는 간단한 함정이었다.
베트남 민간인으로 위장하고자 갖고 왔던 하얀색 베트남 전통의상에 나뭇가지나 잎사귀, 흙 따위를 채워넣어 사람처럼 꾸며놓고 거기에 수류탄을 설치해 건드리면 폭발하게 끔 함정을 만들어놨다. 그리곤 한켠에 숨어 숨죽인 채 공포에 잠겨있던 엉겁의 시간들.
기적이 일어났다.
"찾았습니다! 저격수의 시신입니다!"
북한군 한 명이 자신의 부비트랩을 발견했다. 그걸 시신으로 오인해서 자신의 동료들을 불러모은다.
"뒤져라 이 나쁜년!"
그렇게 원한을 담아 자신이 설치한 함정에 발길질을 한 순간, 옷가지에 숨겨져 있던 수류탄 두 발이 동시에 격발했고 북한군 5명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고갔다.
기회였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 탄창에 남아있는 총알의 갯수를 확인하곤 곧바로 달려나가 모조리 쏴죽였다. 별다른 기교도 필요 없었다.
총은 남자든 여자든 병졸이든 특수부대든 똑같이 한방에 죽이니까. 먼저 보고 먼저 쏘는 놈이 이기는 것이 전장의 룰이었다.
은서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리곤 깨달았다. 자신은 부하들을 사지로 걸어들어오게 한 나쁜 군인이었음을. 부하들 11명이 모두 참혹하게 죽어버림을 깨닫고서 이성을 잃고만 은서는 두번 다시 총을 들 수 없었다.
***
"이런 씨발!"
은서가 땅바닥을 내리쳤다. 1973년 현재의 일이다. 대낮의 사격장. 병사들과 약속한 3시가 되기 전에 사격 훈련에 매진하던 은서는 좌절하고 있었다.
"그 때처럼 정확한 사격이 나오지 않아···."
사격장에서 은서를 코칭해주던 김훈 중령도 고개를 숙였다.
"너 지금 총쏘는 걸 두려워 하고있어.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그 때 같은 실력이 나오지 않을거야."
"난 두렵지 않아···."
"지금도 봐봐. 손을 그렇게 떨고 있는데 총이 정확히 맞을리 없잖아.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하자. 컨디션이 안좋아서 힘들겠다고. 그냥 그렇게 말하고···."
"책임을 져야지."
은서가 총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부터 텔레비전, 영화관까지 뉴스를 뿌려대면서 월남의 영웅이니 19번 도로 전투의 영웅이니 그렇게 떠들어댔잖아. 그렇게 포장했으면 진짜로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은서야."
"보여주지 못하면 거짓말이 되는거잖아···."
은서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내 마지막 양심이야. 프로파간다가 됐든 여론 장악이 됐든 최소한 거기 담겨지는 메시지 만큼은 진실들로 채워졌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난 거짓말쟁이가 되는거잖아···."
"......"
그녀의 말에 진희도 진혁도 훈이도 모두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들 누구도 은서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나한테 사격실력 보여달라고 했던 애들 표정 봤어?"
은서가 나지막이 눈물을 흘렸다.
"존경이 담겨 있잖아."
"그건···."
"월남의 영웅이니까. 독립운동부터 한국전쟁까지 모든 곳에서 이긴 영웅 대한제국 황제 이연의 딸이니까. 대단해보였겠지. 구남철 중장은 몰라도 병사들 만큼은 순수했다고.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그러더니 은서는 다시 사격장에 엎드려 총을 잡았다.
"다시 연습할게. 탄 줘."
"......"
***
그 시각 7군단 기갑연대의 연대장 집무실. 군단장 구남철부터 부군단장, 참모장, 기갑연대장까지 사이좋게 둘러 앉아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고? 분위기는 어때?"
구남철 중장의 물음에 연대장이 답했다.
"죽을 쑤고 있습니다. M16 소총을 가져와서 30발을 쏘는데 한 발도 못맞추지 뭡니까? 하하하!"
연대장의 말에 모두가 사이좋게 웃어재꼈다.
"역시 낙하산은 낙하산인가봅니다!"
연대장의 말에 구남철 중장이 말했다.
"흠··· 그래도 월남전에서 활약한 건 사실이라 들었는데···."
그의 말에 부군단장이 말했다.
"그거 역시 황실이 언론을 조작해서 꾸며낸 가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월남에서 활약했던 많은 장교들이 하나같이 황태녀를 칭찬하고 있었어. 장병들 분위기도 남달랐고 말야."
"그럼 역시···."
"그래, 돌아가신 경친왕 전하의 말씀이 사실인거 같아. 부하 11명을 잃고 정신적인 후유증을 겪고 있는거지."
"그게 사실이면 오늘 사격시범은 끝장이군요."
"바보같은 족속들이야. 정신적인 충격이 있으면 솔직히 털어놨어야지. 언론을 조작해서 아주 그냥 완전무결한 신처럼 만들어놨잖나?"
"그 덕에 장병들이 들떠서 사격시범까지 요청했었지요."
"내가 부추겼던거지만."
"중장님께서요?"
"그래, 고기 한점 더 주면서 황태녀 전하의 사격실력이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봤거든. 그러더니 그 병사가 그러더군. 백발백중일거라고."
"......"
"그러면서 대뜸 황태녀한테 제안을 건거야. 사격시범을 보여달라고. 그렇게 한 명으로 촉발된 열기가 기름통에 불붙듯 퍼져나간 게 어제의 일이었어."
"여론 조작의 효과가 그정도로···."
"이 나라는 그런 나라야. 경친왕 전하의 죽음조차 쥐도새도 모르게 묻힐 만큼."
연대장의 집무실이 싸해지는 순간이었다.
***
결전의 시간 오후 3시. 사격장에 수 많은 장병들이 모였다. 기회를 놓칠새라 방송국 카메라까지 들이닥쳐서 은서의 사격시범은 그 어느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야··· 드디어 전하의 사격실력을 보는구나!"
"19번 도로 전투의 영웅이라고 하셨지? 북괴군을 때려잡은 영웅!"
은서의 등장을 기다리는 장병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언론을 통해서 완벽한 28세의 영웅만 접했던 그들이기에 기대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영웅의 딸. 그 자체로 영웅. 이은서 대위의 등장을 간절히 기다리던 3시 15분. 마침내 그녀가 나타났다.
"오··· 오오!!!"
"우와아아!!!!!!"
자신들의 황태녀 전하를 보고 장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은서 대위. 이제는 원수 계급을 단 서북방위사령관 이은서는 다름아닌···.
"한복 차림이라고!?"
사격장이 훤히 보이는 장군의 자리에서 구남철 중장이 경악하듯 외쳤다. 이은서 원수.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 영웅의 딸이자 그 자체로 영웅인 월남전의 이은서 대위는 공주의 한복을 차려입은 고고한 자태로 사격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사격장에 전투복도 아니고 한복을 차려입고 나타나는 군인이 어디있나!?"
그러거나 말거나 장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공주님! 공주님!"
"와아!!!"
은서는 비장한 각오로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총을 바라본다. 모신나강. 월맹군으로부터 노획해서 쓰던 월남 시절의 소총에 자신감을 느낀 은서가 말했다.
"1사로 준비!"
"와아아아!!!!"
그녀의 왼쪽엔 김훈 중령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있다.
"괜찮겠냐?"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어."
"스코프도 없잖아. 이걸로 250m를 쏘기엔··· 뭐··· 평범하게 가능한 거리지만 지금의 너는 힘들 수도 있어."
"해야지. 그래도."
은서는 비장한 각오로 1사로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는다.
"엎드리는게 좋을거야. 그게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으니까."
"아니, 괜찮아. 앉아서 쏘는 걸로도 충분해."
"은서야."
걱정해주는 훈이 오빠에게 은서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내가 옆에 있어줄게."
"고마워, 오빠."
그렇게 말하며 은서는 모신나강에 탄창을 꽃는다. 옆에서 걱정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진혁이 간절히 말했다.
"이대론 위험합니다. 부디 방탄모라도 착용을···."
그가 걱정하는건 이 부분이었다. 사격장에 와서 총을 쏘는데 군복이 아닌 한복을 입고있고 방탄모도 없이 머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거추장스럽게 휘날리는 한복은 위험해보였고,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는 머리는 총알 하나만 날아와도 죽기 딱 좋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은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말했다.
"이건 쇼야. 저기 보이는 방송사 카메라를 거쳐 보게될 전 국민, 여기 있는 모든 장병, 그리고 날 업신 여기는 사령부 휘하 모든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쇼."
"하지만···."
"쇼는 화려해야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눈 먼 총알이라도 하나 날아왔다간···."
은서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월남에서 베트콩은 삿갓만 쓰고 싸웠는걸?"
"제발!"
그러거나 말거나 은서는 모신나강을 쥔 채 사격자세를 바로잡았다. 어깨에 올바르게 견착하고 가늠쇠를 통해 250m 거리의 표적지를 조준하며 조심스럽게 숨을 가다듬는 은서는 진혁에게 말했다.
"사격 끝나면 그 때처럼 안아주지 않을래?"
"전하···."
"공주라고 해도 돼. 그쪽이 편하니까. 그도 아니면 내 이름을 불러도 좋아. 은서야라고."
"......"
"이 전투가 끝나면 많이 무서워할거야. 그런 나를 달래줄 수 있는건 너 밖에 없어. 부탁할게. 뭐라도 좋으니까 끝난 뒤의 나를···."
"예. 공주님."
"이름은 기여코 안부르는구나?"
"그건 좀···."
"고자야."
은서는 피식 웃더니 김훈 중령을 불렀다.
"오빠."
"그래, 은서야."
"지금 사격장에 적군이 몇 명이나 있어?"
그 말에 김훈이 사격장을 응시한다. 잘 정돈된 흙바닥에 100m 거리 표적지가 10개. 200m 거리 표적지가 10개, 250m 거리에도 표적지가 10개씩 있었다.
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100m 거리에 베트콩 10명, 200m 거리에 월맹군 10명, 250m 거리에 오진수의 특수부대 9명, 그리고. 너희 아버지 대한제국 황제 이연. 한 명."
마지막 한마디에 은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젠장, 그렇게 말하면 전투 의지가 불타오르잖아!"
은서가 총을 쐈다. 다섯발들이 모신나강 소총을 한발 쏘고 다시 재장전, 또 한발 쏘고 재장전. 그렇게 다섯발을 내리 갈겨서 250m 표적지 다섯개를 연달아 맞췄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이야 씨발 봤냐?! 표적지 넘어가는거? 역시 영웅이셔!"
하지만 은서한텐 들리지 않았다. 전투의지에 사로잡힌 은서의 시야엔 총을 맞고 쓰러지는 오진수의 특수부대 5명이 있었을 뿐이다. 모신나강의 총알은 고작 다섯발. 비어버린 총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은서가 외쳤다.
"M16!”
“여기!"
김훈 중령이 은서에게 새 총을 건넨다. 대한제국군의 현역 무기인 m16 소총이다. 탄창에 들어있는 총알은 30발이다.
250m 표적지 다섯개에 한발씩 조준 사격을 날린다. 표적지 한 개가 넘어가고, 두개, 세개, 네개가 넘어가자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아버지!!!!"
은서가 마지막 표적지에 총을 쐈다. 장병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아이고!"
"잘 쏘시다가 딱 한발이 빗나가시네!"
250m 거리에서 은서의 아버지는 썩은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일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겠지. 빌어먹을 250m 표적지.
은서는 괘념치 않고 다음 표적지 200m 표적지 10개에 총을 쏜다. 모두 명중이었다. 남은 총알은 15발. 남은 표적지는 100m 거리의 10개. 이쯤은 가볍지. 은서는 그곳 모두에 총을 갈겨서 10발을 명중시켰다.
참고로 100m 거리 표적지는 맞춰도 뒤로 넘어가지 않게끔 세팅했다. 단순히 맞추는 정도를 떠나 '얼마나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지' 보기 위해 과녁을 걸어놨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두 정중앙에 명중이다.
남은 총알 5발.
"에잇!"
그냥 연발로 바꿔놓고 냅다 쏴재꼈다. 다섯발 모두가 연발로 쐈는데도 정중앙에 꽃여 명중했다. 이제 탄창이 비었다. 총을 내려놓는다.
"오빠! AK!"
"여기!"
다음에 은서가 든 총은 소련제 AK-47 소총으로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이 쓰던 소총이었다. 특전사로 적진에 침투하는 일이 많았던 은서도 위장용으로 가끔씩 썼던 소총이다.
그걸로 3점사로 맞춰놓고 갈겨서 100m 거리의 표적지 정가운데에 30발을 모두 꽃아넣었다.
장병들이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총을 몇 개나 쓰시는거야···."
"그걸 다 맞추셨어···."
그럼에도 은서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무기를 종용하는 은서의 눈엔 광전사의 눈빛이 서려있었을 뿐. 피와 화약, 힘에 목마른 미치광이 전사의 영혼이 그녀의 모든것을 잠식해나고 있었다.
'어쩌면 저것 조차 마음의 상처가 만든···.'
그렇게 중얼거리던 진혁에게 은서가 외쳤다.
"진혁아, 권총!"
"예 공주님···."
진혁이 건넨 권총은 발터 PPK였다. 탄창엔 6발만 들어가 있었고 은서는 그걸로도 표적지의 정가운데만 뚫었다. 같은 곳에 구멍이 나고 또 그곳에 구멍이 나고. 광기어린 사격 솜씨에 지켜보는 병사들이나 관람하던 장군들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구남철 중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쳤어 이 여자···."
은서의 사격시범은 아직도 끝나질 않는다. 모신나강에 M16, AK-47, 발터 PPK를 거친 광기의 끝에 단검이 보였다.
"있는거 다 가져와!"
그러더니 그걸 들고 걸어가면서 표적지에 하나씩 투척했다. 정확히 꽃히고, 하나 또 던지고, 던지고, 다시 던지고, 그렇게 표적지가 걸레짝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끝에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갈 때 까지 은서는 계속해서 칼을 던졌다.
지켜보던 병사들은 이제 겁에 질려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기를 찾아 헤매는 은서에게 진혁이 말했다.
"공주님!"
"무기 더 가져와! 당장!"
"공주님!"
"저기 안보여? 아직도 적군이 남아있잖아!"
은서가 가리킨 곳엔 너덜너덜해진 표적지가 걸려있었을 뿐. 그걸 적으로 착각해 공포섞인 광기를 뿜어내는 은서가 걱정되어 진혁이는 외쳤다.
"공주님!!!"
달려가 품에 안는다. 포옹이라기보단 보디가드로서의 보호에 가까운 모습으로. 공주님이 지쳐서 쓰러지는걸 잡아내는 듯한 연출을 하며 병사들 앞에 은서를 꼬옥 안아주었다.
"지, 진혁아?"
"다 죽었어요. 적군. 월맹군도, 베트콩도, 오진수의 특수부대도 다 죽었으니까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진혁아···."
가파르게 뛰는 진혁이의 심장소리가 은서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따뜻한 온기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이번에도 죽지 않았다는 기쁨이 눈물에 섞여 나왔다.
박수 소리가 들린다. 장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맹렬하게 쳐주는 환호의 소리가 '아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라 사격장이었구나.'하는걸 깨닫게 했다.
"괜찮아요."
진혁은 나지막이 웃으며 은서의 등을 열심히 토닥여줬다. 사격장 끄트머리엔 250m 거리의 표적지 하나가 멀쩡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