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Ep5. 숙청의 밤 (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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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지. 황태녀의 마르지 않는 내탕금.”
은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달밤이 시작되는 저녁 7시 30분. 2박 3일동안의 훈련으로 잔뜩 지친 병사들을 몇 시간이나 굶긴 황태녀가 꺼낸 회심의 반전.
<무제한 소고기 파티>
친위대를 동원해 부대 연병장에 천막을 쳐놓고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 화로에 숯불을 올려 자신의 이름으로 소고기를 무한정으로 제공해주기 시작한다.
“잘 먹겠습니다!”
장병들의 열렬한 환호에 은서가 밝은 미소로 답했다.
“훈련 하느라 고생 많았어!”
술이 빠진게 섭섭했지만 나라지켜야 할 장병들을 헤롱헤롱 만취상태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아쉬운대로 사이다를 제공해주었다. 마크에 별이 7개 달린 우리나라 기업의 토종 사이다였다.
고된 훈련으로 지쳐있던 장병들이 뜻하지 않은 바베큐 파티를 만나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별빛이 아름다운 달밤 아래, 중대 전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앉아 2박 3일간의 고된 훈련이야기를 주고 받는 우정의 시간들.
먼발치에서 친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나무 기둥에 기대어 사이다나 홀짝이고 있는 은서는 무척이나 외로워보였다.
‘나도 저렇게 전우들이랑 웃음꽃을 피웠어야 했는데···.’
은서는 갖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월남에서 3년을 싸우는 내내 부하들을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던 은서였으니까. 그나마도 이젠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장병들의 웃음꽃을 보면서 박철민 상사와 10명의 부하들을 떠올리곤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옛날 생각하냐?”
김훈 중령이 물었다.
“그냥, 철민이랑 애들 생각이 좀 나서···.”
"그러네, 철민이가 고기는 참 기가막히게 잘 구웠는데... 모닥불에 같이 둘러 앉아 소주도 한 잔씩 마시고, 재훈이가 연주하는 통기타 노래도 듣고... 그랬으면 참 좋았을텐데···."
“얘네들은 전역할 때까지 사람 죽여보는 일은 없을거야. 그치?”
“소중한 전우를 잃는 경험도 없겠지.”
“좋겠다···.”
김훈 중령이 한숨을 푹 쉬며 은서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뭐가?"
“옛날부터 그런 생각을 했거든. 처음부터 잘 해줄걸. 괜히 깔보고 무시했다가 마음 고생만 시켰잖아.”
그것은 김훈과 은서의 옛날 이야기. 이은서 소위의 고생길을 선언했던 월남에서의 선언.
<됐고, 넌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마.>
그 이후로 한참을 마음고생 했던 은서에게 옛 선배인 김훈이 죄책감을 담아 사과를 올렸다. 그러자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해줬는데 뭐."
"그게 잘해준거냐?"
"처음엔 진짜 못된 선배였는데. 생각해보면 아니었던 거 같아. 이리 저리 갈구긴 했어도 내심 다 챙겨줬던 오빠잖아. 다친 덴 없나 봐주고, 총 잘 쏘는 법이라던가, 체력 단련이라던가, 특히 지도 보는 법. 나 진짜 그게 왜 햇갈렸나 몰라.”
지도를 잘못 읽어서 혼쭐이 났던 소위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은서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어쩐지. 그게 왜 추억이 되버린것인지···.
“오빠랑 장군님 없었으면 월남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걸?”
“너도 참···.”
"안 좋은 추억도 추억이라는데, 돌아보면 다 그런 거 같아."
그 후 머쓱한 분위기의 10초가 지났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거야?"
"진희 언니는 물품 체크하러 갔고, 진혁이는 오늘 머물 관사 점검하러 경호실 애들이랑 갔고."
"그 진혁이라는 애. 진짜 니 신랑감이냐? 정략결혼 같은?"
훈이의 말에 은서가 사이다를 마시며 답했다.
"걔? 내가 사귀자고 고백하니까 뻥 차버리던데?"
"차버렸다고? 크하하하!"
“아버지 하는게 딱 봐도 의도적이었거든. 나랑 악연이 있는 애를 데려다가 유학보내놓고, 친위대 임관시켜서 엘리트로 만들어놓고, 옆에 두면서 직접 가르치고 이젠 감시란 구실로 붙여놓는데···.”
"사윗감으로 키우시는거 맞네."
“그치? 딱 봐도 결혼하란 거잖아. 나도 싫진 않아서 살짝 고백해봤는데 데이트 한 번 안해본 사이라고 뻥 차버리는거야. 바보 멍청이.”
"천하의 공주님이 남자에게 차여도 보고. 재미있네 두 사람."
"오빤 어때? 나랑 월남에서 같이 있었는데. 남자 대 여자로서 마음에 든적 없었어?"
은서의 예리한 물음에 김훈 중령이 코웃음을 치며 방어했다.
"끔찍한 소릴. 너같은 띨띨이는 내 취향 아니거든?"
"우씨! 그놈의 띨띨이!"
김훈 중령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걔랑 잘 해봐. 딱 봐도 니 생각만 하던데."
"내 생각만 하다니?"
"나랑 비서관님이랑 처음 여기 온 날. 걔가 말했던거 생각 안나냐? 니 마음을 줄줄이 꿰고 있던데."
김훈이 말했던 그 때 그 순간. 은서의 수행원 김진혁의 말.
<걔네들 요리는 전하의 입맛에 안 맞아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매일 식사 때마다 반찬을 남기시니까요.>
공주의 입맛을 훤히 꿰고 있던 남자. 그리곤 잠자리까지 걱정해주던 공주의 남자.
<식단으로 끝이 아닙니다. 황태녀 전하는 지금 경친왕 전하가 쓰시던 관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계시는데, 잠자리가 불편하신지 매일 뒤척이다 새벽 1시쯤 잠에 드십니다.>
"에이 설마 그냥 일 때문이겠지···."
"매일 밤 뒤척이는 공주님 곁에서 잠들 때 까지 기다려주는 남자면 어지간하지. 그렇게 새벽 넘어 잠이들면 다음날 제일 먼저 일어나서 마중 나오는 거 아냐? 나라면 그렇게 못 해."
“그런가?”
그 때 대본 뭉치를 들고 달려오는 사람이 은서 눈에 들어왔다. 1973년 3월경 국영방송에서 황실 직속으로 옮긴 한국방송공사 KBC(Korean Broadcasting Corporation)의 관계자였다. 안경을 쓴 땅딸막한 체격의 남자. PD로 보이는 이 사람은 얼마 전 시장통에서도 은서를 찍어대더니 이젠 대놓고 방송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전하!"
은서가 사이다를 마시며 태연하게 묻는다.
"무슨 일이세요?"
"슬슬 촬영 시간입니다. 여기 시나리오대로만 해주시면···."
"흐음···."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
그 시각 진혁은 은서가 밤을 보낼 7군단 기갑연대의 관사를 점검하고 있었다.
“퀘퀘하구만···.”
진혁의 눈에 들어온 방 3개짜리 작은 관사는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는지 먼지가 퀘퀘할 지경이었다. 이건 좀 어쩔 수 없었으려나? 미리 온다고 알려줬다면 부대원들이 청소해줬을텐데.
“비서관님은?"
진혁의 물음에 검정 양복을 입은 경호실 부하가 답했다.
"장병들 먹일 식자재를 관리하느라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긴 내가 청소할테니까 1팀은 황태녀 전하의 동선을 확보하고, 2팀은 관사 주변 10m를 샅샅이 수색해서 이상점 없는지 확인하고. 3팀은 경호 전략 수립하고."
"예."
그렇게 일상적인 명령을 내려놓고 진혁은 제복을 벗어던졌다. 와이셔츠의 팔을 걷어 붙이고 문을 활짝 열고서 스타트. 달밤에 먼지털이를 하고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고, 창틀 하나하나까지 꼼꼼이 체크하며 닦아내는 남자의 손길이 예리해보인다.
이 남자의 마음 속 상처.
<아마 관사에 퀘퀘한 남자 냄새가 나거나···.>
좀 더 청소해둘걸. 운동기구도 정리해두고 환기도 시켜두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황태녀 전하가 좀 더 편안하게 잠을 주무실 수 있으셨을텐데. 그러지 못했던 후회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친위대에 두 번은 없어!'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구슬땀을 흘리며 청소를 끝낸 남자의 귀에 나지막히 함성이 들려왔다.
"뭔 소리지?"
경호실 부하가 달려와 허겁지겁 보고를 올린다.
"큰일났습니다! 황태녀 전하께서···."
"......!"
대답조차 듣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1초라도 더 빨리 황태녀 전하께 달려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니까. 제복을 챙겨입는 것도 까먹은 채 권총 한 자루만 들고 달려가는 진혁의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해보였다. 관사에서부터 연병장까지 100m. 단련된 군인의 속도로 11.56초를 끊어낸 스피드로 도착한 그곳엔 병사들 한 가운데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자신의 공주님이 보였다.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
"아, 아니··· 저··· 그러니까···."
은서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 옆에서 마찬가지의 표정을 짓고 있는 김훈 중령에게 대충 상황을 짐작해냈다.
'물리적인 위험이 아니야. 경호상의 위기였다면 김훈 중령님이 해결해주셨을테니까. 그럼 대체···.'
"꼭 보고 싶습니다!"
"월남의 영웅!"
"와아-!"
사이다가 잔뜩 담긴 컵을 치켜 올리며 공주님을 외치는 그들의 얼굴에 젊음의 열기가 담겨 있었다. 뭐지? 적대적인 느낌은 아닌데? 황태녀 전하를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이란건 대체 무엇일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은서 앞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구남철 중장의 입에서 나왔다.
"보십시오, 황태녀 전하. 장병들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월남에서 잘 싸웠어도··· 총을 안쏴본게 1년짼데···."
"1년 정도로 사격 실력이 녹슬진 않습니다. 전하."
그제서야 진혁은 상황을 파악했다. 이 남자. 은서에게 사격시범을 종용하고 있다.
‘안돼, 지금 전하껜 마음의 상처가···.’
장병들은 생떠올릴 것이다. 월남에서 멋지게 승리하고 돌아온 공주님의 모습을.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 여인의 기개. 황실 주도로 포장된 은서의 명성엔 모두가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무기! 무기 내놔!>
<다 죽여버릴거야···.>
덕수궁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던 서울 하늘의 불꽃놀이만 봐도 겁에 질려버리는 공주님. 화약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월남에서 겪었던 월맹군의 집중포화를 떠올려버려 이성을 잃고 마는 상처받은 영웅.
‘그런 모습은··· 여기 있는 장병들이 몰라. 왜냐하면···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후회감이 들었다. 자신이 주도한 게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한 것 같은 후회와 죄책감. 아무것도 모른 채 영웅의 모습을 기대하는 장병들에게 둘러 쌓여 난처함을 느끼고 있는 ‘조선 여인의 기개'와 그런 그녀에게 쐐기를 박는 구남철 중장.
"아니면, 뉴스에서 보아온 공주님의 모습이 거짓인걸까요?"
그의 말에 은서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뭐?!"
구남철 중장은 거만하게 뒷짐까지지며 말한다.
"신문이건, 텔레비전이건 스크린이건, 뉴스 속에 나오는 공주님의 모습은 항상 용맹하고, 영웅적이며, 총을 쏘는 족족 백발백중을 하는 여전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여기있는 장병들에게 보여주신다면, 신들린 솜씨에 감탄한 장병들이 더욱 분발해 남은 군생활을 열심히 하겠지요.”
구남철 중장의 썩은 미소가 진혁의 눈에 들어온다.
“물론, 뉴스에 나오는 모습이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아니야··· 나는 분명···."
당황한 은서를 대신해 김훈 중령이 말했다.
김훈 중령이 말한다.
"전하의 활약은 선임이었던 내가 보증한다! 내가 직접 가르치고 이끌어준 후배였으니까!"
"그렇다면 보여주실 수 있겠군요! 마다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건···."
"저흰 그저 군인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실사격 훈련을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구남철 중장의 이야기를 듣던 진혁이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저 남자, 황태녀 전하에 대해 뭔가 알고 있어!'
분명 기밀이었을텐데. 공주님이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는 분명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는 기밀 사항이었을진대.
"마침 방송사도 와있지 않습니까? 황태녀 전하의 활약상을 카메라에 담아가 뉴스 하나라도 더 올리고 싶은 황실의 나팔수들 말입니다."
"저 작자가!"
진혁은 다시금 떠올린다. 창밖에 불꽃이 터지던 공주님께 맹세했던 자신의 각오. 두번 다시 총을 들지 않게 해주겠다던 호기로운 맹세.
<제가 공주님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무기를 드실 필요 없습니다. 제발···.>
그 맹세를 지킬 때다.
진혁은 소리친다.
"무엄하다! 어딜 감히 황태녀 전하께···."
"할게!"
은서가 진혁의 말을 끊어버린다.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 서북방위사령관 이은서 원수, 월남전의 영웅 이은서 대위가 장병들 앞에 맹세했다.
"내일 오후 3시. 사격장에서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줄게. 다른 건 몰라도 월남에서 전우들과 싸웠던 3년의 시간은 진실이니까."
은서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보여주면 되잖아···."
고개를 떨구며 부르르 떠는 은서를 보며 진혁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 두번 다시 무기를 들지 않게 해주겠다는 친위대의 맹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