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Ep5. 숙청의 밤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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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웠다. 그 남자의 일상.
진희가 설치해놓은 칼라 텔레비전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은서가 뉴스를 보면서 느낀점.
‘엄청 돌아다니네.’
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하고, 제철소에 다녀오고, 자동차 공장을 시찰하더니 왜 안어울리게 봉사활동을 하고 그러나? 하루 종일 덕수궁 집무실에 앉아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의 바쁜 모습에 은서는 혀를 내둘렀다.
“와, 저건 사기지!”
은서가 경악한 부분은 그 남자의 봉사활동. 꼬마 아이를 안아주며 환하게 웃어주는 황제의 모습이 너무도 사기적이었다.
“나 어릴적에도 저렇겐 안했거든!?”
은서의 반응에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기억을 못하시는군요. 한국전쟁 끝나자마자 부산에 내려오셔서 얼싸 안고 좋아해주셨다고 전임자분께 들었습니다.”
“부산은 내려온 적도 없는 양반이 얼어죽을···.”
“뭐, 아무튼···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 7시간을 빼고 매일같이 업무를 보시는 분이니 뉴스거리가 차고 넘치시겠죠.
은서는 아버지의 근무시간에 한번 더 놀랬다.
“17시간?! 주 120시간 가까이 일한다고???”
“공주님 말씀처럼 폐하는 독재자니까요. 권력이 많을 수록 일거리도 많아지는 법이죠.”
그 말에 진혁이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전 공주님 편이에요. 공주님이 폐하를 독재자라 생각하시면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하지만 이왕 독재자의 딸이 되셨다면 최대한 이용하시죠. 목표 달성을 위해서.”
그러더니 손목시계를 보며 숫자를 센다. 셋, 둘, 하나.
컬러TV로 화사한 28살 여자가 나온다. 곱디고운 한복을 입고서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는 여성.
은서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TV를 본다.
"저건··· 나잖아?"
“지난번 시장을 돌으셨을 때 방송사 기자들이 취재를 했었죠. 그거 알고보니 비서실장님이 보내신거라더군요.”
“......”
“몇 년 전부터 내각에서 TV보급에 열을 올리고 있었어요. 문화 진흥이라고 하지만 황실의 지원을 받는 국영방송사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현 상태를 본다면 프로파간다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버지가 그런식으로 독재를 하는구나···.”
은서가 중얼거리듯 말하는 걸 보며 진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프로파간다의 주인공은 공주님이 되겠죠. 이왕 그렇게 됐다면 최대한 이용하셔서 이북 주민들의 민심부터 사시는게 좋을거에요.”
은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TV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집어먹던 모습이 생생히 잡혀있었다.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자신이 의도했던 모습 그대로. 그것은 분명 좋았는데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지고 만다.
“나를 위해 뉴스가 만들어지고, 나를 찬양하는 뉴스만 TV에 나오고··· 설마 그렇게 되는거야?”
진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공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죠. 이북 주민들과 장병들. 나아가 대한제국 국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최고의 권력.”
의외로 김훈 중령이 거들었다.
“뭐, 아무래도 괜찮지 않냐? 예쁘게 잘 나왔구만.”
“괜찮을리가 없잖아! 민주국가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국회에서 당당히 말했는데, 근데 하려는 짓이 지금··· 언론을 장악해서 나를 찬양하는 뉴스만 생산해낸다고?”
망설임을 담아 중얼거리는 은서에게 김훈 중령이 말했다.
“난 니가 국회의원으로 출마한다고 해도 뽑을거다. 월남에서부터 봤던 네 녀석은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을 만큼 착해빠졌거든.”
“내가 착해? 거기서 죽인 사람이 몇 명인데···.”
김훈 중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더욱 너여야지.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입으로만 평화를 떠드는 새끼들보단 네가 낫지 않겠냐?”
진희가 이상하다는듯 물었다.
“군인은··· 싸움을 싫어하나요?”
진희의 물음에 김훈 중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싸우면 죽는 건 우립니다. 싸워보지도 않은 놈들이 전쟁을 운운하지, 거기서 부하들을 잃어본 우리 같은 사람이 전쟁이 유쾌할리 없죠.”
한쪽 벽에 기대어 말없이 대화를 듣던 진혁이 말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권력을 쥐어야 하고, 어차피 독재국가라면 차라리 황태녀 전하가 이어받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민주주의건, 독재건 어차피 황제만 되면 그 다음부턴 마음대로 정치를 할 수 있을텐데, 그 전까지만이라도 폐하의 힘을 빌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진혁의 말에 은서가 망설임을 섞어 물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거야?”
진혁이 냉소적으로 답한다.
“과정을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겁니다. 자기 부대 장병들조차 지휘 못하는 판에 과정을 고를 여유는 있으시구요?”
“......”
“황태녀 전하는 무능력자입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권위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28세 여자일 뿐이죠. 갖고 있는거라도 써야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진혁의 말을 들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은서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뭐··· 할 수 있는거라도 해야지."
“어디··· 가실려구요?”
“부대 시찰하러 가야지. 방송에 나올려면 카메라 앞에 더 자주 나가야 할 거 아냐? 부사령관 오라 그래. 일정 잡아야 하니까.”
***
그 시각, 7군단의 구남철 중장은 기갑연대의 막사를 돌아다니며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고생 많았다."
"충성!"
흙먼지를 뒤집어 쓴 병사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장군의 표정에 대견함이 뭍어있었다. 그런 장군의 격려를 받는 병사들 표정에서도 긴장 보다는 존경심이 묻어나오니, 훈련 끝나고 돌아온 어수선한 막사에서도 훈훈한 분위기가 꽃을 피웠다.
"3대대 애들이 유달리 피곤해보이는구만."
구남철 중장의 물음에 기갑연대장이 답했다.
“2박 3일간의 강행군으로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이번 훈련이 강도 높긴 했지. 훈련갔다와서 피곤할테니까 이틀 정도 푹 쉬게 해주고, 성적이 우수했던 중대를 골라서 순차적으로 휴가 돌려.”
"예, 군단장님!"
그 때 부군단장이 달려와 구남철 중장에게 허겁지겁 말했다.
"군단장님! 큰일났습니다!"
"왜 그래? 최 준장."
"지금 황태녀 전하께서 여기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구남철 중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 사전 연락도 없이 여긴 무슨 일로?"
"그게 훈련으로 고생하는 장병들을 격려하시겠다며 즉흥적으로 계획을 잡으셨다고···."
부군단장의 보고에 구남철 중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옆에 서있던 기갑연대장이 새파랗게 질려 겁을 먹은 눈치다.
"새파랗게 젊어가지곤 머리에 피도 안 마른게 자기가 지금 무슨 위치에 있는지 몰라?! 황태녀에 별 다섯 개 씩이나 단 총사령관이면, 장병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거 정도는 알아야지! 여기가 무슨 시장 바닥인 줄 알아!"
"지금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로 전하를 맞이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동원해 막사를 청소하고 전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는게···."
"훈련 갔다와서 피곤에 지친 애들한테 청소는 무슨 청소?"
"하오나···."
구남철 중장은 부군단장의 제안을 무시하며 연대장에게 말했다.
"황태녀는 내가 상대할테니까 넌 애들 그대로 휴식시켜! 니 밑으로 대대장들도 나서지 말라그래!"
"예, 예··· 군단장님···."
"내 새끼들 쉬는거 방해했다간 너나 대대장이나 모두 내 손에 뒤질줄 알아."
그렇게 30분 쯤 지났을 때 7군단 기갑연대로 5성장군의 성판이 달린 리무진이 들어왔다. 혼자 온 것도 아니다.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자랑하는 친위대가 장갑차를 타고서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부대 정문에서 이은서 원수를 기다리던 구남철 중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중얼거렸다.
"부대 순시에 장갑차까지 끌고와? 이런 정신나간···."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경례 구호를 올렸다. 얼마나 컸는지 부대 끝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찬 소리였다.
초병의 계급이 병장이라고 쳐도, 무려 11계급이나 차이나는 장군님. 그냥 장군님도 아니고 대한제국 황태녀 전하였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병사들 입장에선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압감이었다.
전면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리무진 행렬을 보며 구남철 중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5성 장군이면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포가 된다는걸 진짜로 모르는건가?”
자기 앞에서 리무진이 멈춰선다. 문이 열리고 중령 계급장을 단 젊은 청년이 에스코트를 해주니 문제의 여자. 28세의 5성 장군. 거기에 황태녀 직함까지 달고있는 황제의 딸 이은서가 리무진에서 내렸다. 장군의 말끔한 제복 차림이었다.
"이야! 여기가 기갑부대구나? 넓다~!"
세상물정 모른채 환하게 웃는 황제의 딸을 보며 구남철 중장이 경례를 올렸다.
"충성! 7군단장 구남철 중장입니다."
"어? 군단장님이 직접 와계시네? 반가워요!"
라고 환하게 웃는 그녀지만 묘하게 자신을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구남철 중장은 화를 마음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아 힘주어 말했다.
“여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방금 훈련이 끝났다고 들어서요. 병사들한테 격려라도 해주려고 왔어요."
"방금 훈련이 끝나서 병사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막사는 어수선하고, 장병들도 지쳐있으니 일단 돌아가시고 나중에 다시 오시지요.”
그러자 은서가 미소지어 말했다.
"그래서 기습적으로 온거에요."
"네?"
"부사령관이 그러더라구요. 3일 정도 미리 예고를 해놓고 가야 좋을거라고. 근데 저라고 모를 거 같나요?"
"뭘 말씀이십니까?"
“황태녀가 온다 그러면 부대가 뒤집어지겠죠. 화단에 잡초를 뽑아내고, 화장실부터 복도, 창틀에 먼지 하나까지 티끌 하나 남지 않도록 환경 미화를 해놓을 거 같아요.
오래되거나 낡아 보이는 시설이 있으면 병사들을 시켜 싹 다 뜯어 고치겠죠. 막사에 페인트도 다시 칠해서 말끔하게 고쳐놓고, 화단에 없던 꽃도 심어놓고, ‘황태녀 전하 사랑합니다!’ 같은 낯뜨거운 플랜카드를 만들어 본관 정문에 걸어놓겠죠.
왜? 잘 보여야 하니까. 별 다섯개 달린 황태녀가 부대에 방문하면 연대장이나 대대장이 얼마나 병사들을 닥달하겠어요? 격려하러 왔는데 고생만 시키면 안되지. 그럴 바에야 기습적으로 와서 준비할 시간을 안 주는게 나을거 같았어요.”
은서가 막사를 바라보며 자신있게 말한다.
“훈련 힘들었죠? 2박 3일정도 나갔다 왔을까요? 춥고 딱딱한 곳에서 텐트를 쳐놓고 잠을 잤을 거 같은데. 낮에는 진흙탕을 박차고 전차를 끌고 다니며 화약 냄새를 맡아가며 포탄을 쐈겠죠. 무거운 포탄을 하나 하나 옮겨가며 팔이 빠지도록 전차로 사격 훈련을 했을 거 같아요. 제 말이 맞나요? 구남철 중장님?"
은서의 추측에 구남철 중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모두 맞습니다.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제가 원수 계급장은 낙하산으로 달았어도, 소령까지는 실력으로 달았어요. 여기보다 더 힘들고 최악인 월남 땅에서 3년을 보냈죠. 새파랗게 젊은 년이라고 무시하시면 섭섭할거에요.”
"하하··· 그럴리가요? 황태녀 전하."
은서는 잔뜩 기를 펴며 구남철 중장에게 말했다.
“부대 복귀한지 얼마 안됐으니 한참 씻고 있겠네요. 또래 남자애들이 발가벗고 샤워하고 있을텐데, 그 사이로 여자가 들어가긴 피차 민망하겠죠. 병사들은 조금 있다 만나기로 하고 일단은 장군님이랑 커피나 한 잔 해볼까요?”
생각치도 못한 배려에 구남철 중장이 피식 웃는다. 이 여자가 '여자'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민망한 상황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여자군. 시험해 볼 가치가 있겠어.'
구남철 중장도 환하게 비즈니스 미소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