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Ep5. 숙청의 밤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그 후 몇일간, 은서는 총사령관의 집무실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은서가 부임한 서북방위사령부. 규모로 따지면 군단보다 높은 야전군급 사령부인데, 업무에 관해 공부한답시고 교범들을 가져왔다가 정신붕괴에 빠져버렸다.
이 여자. ‘공부하면 내 전문이지!’ 하면서 당당하게 한뭉치 가져왔다가 뼈저리게 후회중이다.
“안돼··· 이건 무리야.... 초등학생이 대학 수학을 배우는 꼴이라고. 중고등학교 수학은 어디로 갔니? 으아아···.”
"공주님···."
교범 책을 내팽개치듯 덮어버리고 은서는 또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기랄! 초장부터 서명해야 한다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뭐가 뭔지 알아야 할 거 아냐!”
"......"
머리가 아픈건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사령관이 된 은서의 부관으로 부임했는데 당최 부관이란 직책이 뭘 해먹는 자리인지 아는 게 없었다. 커피라도 타와야 하나? 아니면 경호원? 하던대로 수행원의 일을 하면 되나? 평소에 보면 장군님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데 그게 전부는 아닐진데.
계급은 어느새 중령. 은서가 5성장군으로 올라가면서 거기에 맞춰 특진을 했다.
'이거 계급장만 중령이지 아는게 하나 없으니···.'
"너도 참 골치겠다. 기껏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코스의 장교인데, 나 따라다닌다고 커리어 다 망가지네."
"커리어라 하시면?"
"소대장, 중대장 해보고 참모도 해보고 그렇게 착착 지휘관 보직을 거쳐 올라가야 제대로 된 장군도 해볼거 아냐? 근데 나 따라다닌다고 대위때부터 지휘관 노릇도 못 해보고, 중령으로 2계급 특진했는데 나 지키는거 외엔 아무것도 없잖아? 이래선 유학 다녀온 의미도 없을걸?”
"......"
은서가 다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공허히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보고서에 싸인해달라고 이렇게 툭 던지듯이 결재서류가 쌓였는데 이게 무슨 내용인데? 뭘 보고 하는거고 뭘 확인해서 가부를 결정해야 하는거냐고!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
“아니 이런거··· 참모장이나 부사령관이 와서 조언도 좀 해주고 그래야 하는거 아냐? 다 어디간거야?"
이 질문에 대해선 확실히 대답할 수 있을 듯 했다.
"다들 황태녀 전하를 신뢰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낙하산 인사구나 취급하면서 불신하나보죠."
"그래도 황태녀인데. 잘 보이면 인맥 쌓아서 진급도 팍팍 되고 그럴만한 기회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으··· 머리 아파··· 이거 완전히 고립이잖아. 불순분자랑 충신을 구분해야 하는데, 낙하산에 의한 불신까지 섞여서 구분이 안돼."
“......”
"살려줘··· 제발···."
머리털이 73가닥은 빠진 기분이다.
***
"황태녀 전하께서 많이 힘드실겁니다."
덕수궁의 집무실에서 이화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고심하는 황제는 은서의 아버지. 진심어린 표정으로 자기 딸을 걱정하고 있었다.
"진희는?"
"스카웃했습니다. 조만간 자리를 정리하고 덕수궁으로 돌아올겁니다. 그 외에 함께 일하고 있던 직원들도 모두 돌아오는 걸로 정리해놨습니다."
"친위대에 그 녀석도 있지? 은서의 선임이었다는 놈."
"예. 김훈 소령이 덕수궁 경비대 참모로 있습니다."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친위대 대대 하나를 맡겨놓지. 은서의 직속 부대로 삼아서 서북방위사령부와 별개로 움직이게 하자고. 지금 편제로는 너무 위험해."
이연의 책상엔 서북방위사령부의 편제도가 있었다. 무수히 많은 부대와 각 분야 참모실들이 총사령관 이은서 원수 밑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28세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비대한 조직이었다. 이제 28세다. 일반인이었으면 최전방 말단부대의 장교로 일하고 있을 나이다. 사회로 따지면 밑바닥 대리한테 대기업 사장 자리를 맡긴 셈이다.
"이들 중 단 하나도 통제 못하겠지."
이연의 생각에 비서실장 이화가 말한다.
“폐하 같은 초인이 아닌 이상···.”
“초인이 아니야. 그 때랑 지금의 군대는 완전히 다르니까.”
“그 말씀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내가 독립군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성공시킨게 29세였어. 독립군, 미국교포, 중국군,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까지 애국자건 매국놈이건 모조리 긁어모아 창군을 주도했지. 그렇게 발악을 해서 한국전쟁을 승리로 매듭지은게 34세인데···.”
“초인이 맞으신 것 같습니다만···.”
이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시 일본군은 미국과 소련에게 두들겨 맞아 누더기가 된 상태였고, 한국전쟁 당시엔 우리군이나 북한군이나 모두 경험 부족의 젊은 장군들이었지. 백선경 장군만 해도 고작 30살이었으니까.”
이화는 그제서야 황제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지금 대한제국의 장군들 평균 연령이 40~50세군요.”
"그래, 군생활 경력이 그 때랑 지금이랑 차원이 달라. 자부심과 연륜으로 무장된 베테랑들이야.”
"그럼 즉시 지원군을 준비해서 보내겠습니다."
"김훈 소령을 믿어도 될까? 은서의 선임이었는데."
이화가 미소지으며 답했다.
"믿어도 될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네살 소녀를 이리저리 갈구며 베테랑으로 만들어 낸 뛰어난 선배였으니까요."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갈궜다 이거지?"
자기 딸을 갈군 못된놈이었다. 하지만 갈굼의 실력은 군인 대 군인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물론 부작용이 컸고 그 탓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딸아이에게 남은 마지막 전우인 만큼 특별히 신경써줘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
이화의 지원군이 준비된 건 6월 30일이었다.
덕수궁에 저마다 가지각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스튜어디스로 일하던 30대 여성부터 교사로 일하던 공무원, 박물관에서 일하던 큐레이터나 호텔리어, 중앙정보부 요원, 외교관, 그 중 재취업이 잘됐다 싶으면 대기업에 취직한 회사원까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을 모시던 비서 한 명이 있었다.
덕수궁 제2부속비서관 박진희.
비서관을 그만두자마자 화학쪽을 개척하던 대기업 L사에 스카웃되어 일했고, 연봉이 마음에 안든다며 퇴사. 2년간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했는데, 그러면서도 대기업 다섯 곳과 몸값 협상을 벌이며 간을 보고 다녔다. 그렇게 최후의 두곳이 남았을 때 건설과 자동차로 유망한 H사를 걷어차고 전자쪽으로 유망하던 S사의 비서실로 들어가니 그녀가 바로 ‘원하는 대기업을 골라서 들어간’ 콧대 높은 슈퍼 을 되시겠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
'공주님을 모시던 비서관이라는 커리어를 이렇게까지 활용한 사람이라니 악착같은 여자···.'
그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화가 비즈니스 미소를 짓는다.
"반가워요.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라고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박진희라고 합니다."
이화가 덕수궁 한켠에 마련된 강당에서 모두를 불러놓고 말했다.
"여러분들은 8년 전 제2부속비서실이 해체되면서 각지로 흩어졌던 덕수궁의 비서들입니다. 이렇게 다시 모인 이유가 뭔지 오시면서 충분히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모두들 굳은 각오로 이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8년전 모시던 공주님은 월남에서 영웅이 되어 몸 건강히 돌아오셨고, 중앙청의 콧대 높은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신 분. 스스로의 힘으로 황태녀 자리를 차지한 영웅의 딸, 그 자체로 영웅인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평양의 서북방위사령부에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시어 군부 내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가 적인지도 모를 총성없는 전쟁터죠.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황태녀 전하를 보좌하며 그분의 모든 것을 보좌해주셔야 합니다. 8년 전 처럼 다시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걸···."
"예, 모든것입니다. 공주님의 사생활부터 식단, 건강관리, 경호, 정치, 스케줄까지 모든 걸 보좌할 두뇌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죠."
이화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김훈 소령은 중령으로 특진해 있었다. 그를 포함해 300명의 정예 보병이 하나의 대대를 이루어 수도방위사령부의 연병장에 집합하니, 그 뒤엔 보병장갑차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모아놓은 친위대장 차지연의 훈시.
“내가 딱 한마디만 더 하겠다! 폐하가 곧 국가다!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를 지키지 못하고서는 안보도 무의미한거야! 그러니 죽을 각오로 지켜드려라! 지켜드리지 못하면 대동강 물에 몸을 던져 살아돌아오지 마라! 명심해라! 대한제국 친위대에게 두 번은 없다! 우린 절대 1905년을 반복하지 않는다!"
"충성!"
그렇게 말하며 김훈 중령을 포함한 300명의 정예부대가 은서를 지키기 위해 평양의 서북방위사령부로 진격했다. 덕수궁을 지나칠 때 쯤 그곳에서 나오는 버스도 북상을 시작하니 이들은 이화가 재조직한 덕수궁 제2부속비서실.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를 보좌할 참모 조직이었다.
이들을 위해 내부대신(행정안전부 장관)의 명령을 받은 교통경찰들이 서울 도심에서부터 고속도로까지 일사천리로 길을 열어줬고, 그 다음부턴 헌병대가 보조하여 2시간 37분만에 서울에서 평양까지 질주. 평양직할시 아미산 근처에 위치한 서북방위사령부 청사에 도착한다.
그러자 장갑차에서 300명의 병력이 내려 기습적으로 청사를 점거하기 시작하니 청사를 지키던 경비대와 대치를 벌여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됐다.
"이게 무슨 행팹니까!"
경비대를 끌고 정문을 막아서는 경비대장에게 김훈 중령이 장갑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현 시간부로 황태녀 전하의 경호는 저희 친위대가 담당합니다. 명령은 전하께 직접 받을테니 비키십시오.”
"상부로부터 들은 바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따르지 않을 경우 반역으로 간주해 체포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친위대란 보장이 어딨지?"
그러자 김훈 중령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3분 뒤에 이곳 초소로 전화가 올겁니다. 친위대가 올거니 문을 개방하라는 전화일테니 듣고 머리속에 입력하시면 되겠군요."
"이 무슨 억지가!"
전화는 바로 울렸다. 초병이 받자마자 기겁을 하며 큰 소리로 경례를 올렸고, 실시간으로 굳어지는 표정을 보아하니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할만했다.
"끝난 거 같습니다만?"
"......"
경비대장은 결국 길을 열었다.
***
"이건 쿠데탑니다! 쿠데타!"
[미안하게 됐네 부사령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부사령관실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사령관 최형욱 중장의 소리였다. 합동참모의장이 건 전화임에도 분노 어린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 폐하의 외동딸이시잖은가? 자네가 이해 좀 해주게.]
"폐하의 외동딸이시기 전에 저희 서북방위사령부의 사령관이십니다. 경호도 마땅히 저희가 하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게 실은, 보안사에서 보고서 하나가 올라왔네. 자네 사령부 휘하 장성들 중에 반역을 모의하는 자가 있다는 첩보야. 이러니 폐하와 군부에서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
[자네가 황태녀 전하를 살뜰히 보좌해주게. 이번 기회에 폐하의 눈에 들면 앞으로의 길이 탄탄대로 아니겠나? 군부대신도 한번 해봐야지. 정계에 진출해서 한자리 해보고.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겠나? 군인들 나라 아니겠나? 황제 폐하만큼 군인들 잘 챙겨주는 분이 또 어디있나?]
"......"
[우리가 없으면 나라도 없는거야. 군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외적도 막고 나라도 발전하는거지. 내 말 틀렸는가?]
"맞습니다."
[그래,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다스려주시는 황제 폐하시니까 이번 기회에 잘 해봐. 친위대가 코앞에 들이닥친건 오히려 기회야. 눈에 잘 보일 기회.]
합동참모의장이 헛기침을 한번 하며 부사령관에게 말했다.
[그럼 내 말 이해한 것으로 알겠네.]
"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