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29화 (29/131)

〈 29화 〉 Ep4. 덕수궁 비서실장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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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가 이범석 총리에게 쩔쩔매는 사이 은서는 덕수궁에서 난초를 그리고 있었다.

덕수궁 함녕전.

고종 황제 시절에 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검정 기와 지붕이 멋진 전통 양식의 목조 건물이다. 그러나 1973년 현재. 이곳은 공주의 취미생활 장소로 쓰이고 있어 과거와 비교하면 위상이 떨어진 상태.

황제의 공간이 공주의 공간으로 강등 아닌 강등을 당해버린 건 그놈의 석조전 때문이다.

은서의 아버지 대한제국 황제 이연이 서양식 궁전인 석조전만 애지중지하면서 나머지 전각들이 모두 용도를 잃어버렸는데, 경호처나 비서실,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해주는 건물, 기타 사무실로 용도를 탈바꿈되어 버려지는 것만은 피했다.

이를 두고 얼마전에 경친왕이 ‘실용적’이다라고 비아냥댔지만, 사실 1973년 현재 황실의 구성원이래봐야 아버지와 딸만 남은 상태니까. 황태후 마마도 돌아가시고, 황후 마마도 돌아가시고, 그렇다고 이 나라가 일부다처제를 하는 것도 아니므로 덕수궁에 적막감이 흐르는 건 당연했다.

어쨌든 그 함녕전. 조선의 전통이 은은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동양풍 건물이 은서의 고운 한복과 어울려 여인의 공간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가 하고 있는 현재의 취미 서예. 붓과 먹물을 갖다놓고 한지에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게 그녀의 현재 모습이었다. 이럴 때면 한복을 차려입어 공주의 자태를 뽐내는 건 덤.

"......"

그런 그녀를 보좌해야 할 김진혁 대위는 오늘도 넋을 잃는다. 자기 또래의 28세 여인이 대한제국 공주라는 신분으로 화려한 붓놀림을 뽐내니 남자로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 잘 그리지?"

"아, 예··· 이것도 태후마마께 배우신겁니까?"

"응!"

"태후마마께서 공주님을 많이 사랑하셨나보군요."

"어머니 돌아가신뒤로 쭉 할머니 손에서 컸거든."

지엄하신 황태후 마마를 할마마마도 아니고 할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 열띤 미소로 거침없이 난초를 그려나가는 그녀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큼지막한 한지에 멋진 난초를 그려넣고 구석에 한자로 뭐라뭐라 적으니 아마 이런 글자.

大韓帝國 公主 李銀誓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

필체조차 품격이 느껴지는 여인이라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황위에 오르면 대한제국을 전통문화의 강국으로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문고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붓글씨조차 잘 쓰는 공주님.

"필체가 예쁘십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진짜 지겹게 썼거든."

그렇게 피식 미소지으며 은서는 자기가 그린 난초를 천천히 감상했다.

"내가 봐도 정말 잘 그린거 같아."

"나중에 한 70년 지나면 황제 폐하의 젊을적 그림이라고 경매에 붙어서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올겁니다. 분명히.”

"그렇겠지? 지금 많이 그려둬야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겠지?"

그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지를 한장 더 까는 은서였다.

"근데 그거 아십니까? 한독당에서 공주님 이야기가 오간거."

"뭐라는데?"

"공주님의 황위 계승을 놓고 다툼이 많았나봅니다. 당이 두개로 쪼개질 정도로 설전이 오갔다더군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떠보라 시켰구나?"

"그걸 어떻게···."

은서의 물음에 진혁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니 표정 훤히 보이거든? 아버지가 감시하라고 내 옆에 붙인거잖아. 너."

"아, 아니 감시가 아니라···."

"아니면, 사위로 붙인거라고 할래?"

그 말에 진혁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 그냥! 감시라고 하겠습니다!"

"그치? 그편이 편하겠지?"

은서가 붓에 먹물을 묻히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 만사 될대로 되라는 여유로운 표정이 그림을 그리는 공주님 얼굴에 담겨 있었다.

"괜찮아. 감시든 사위든 상관 없으니까. 어차피 정치할 생각도 없는데 뭐."

"예? 얼마전 국회 연설에선 분명···."

"정치에 뜻을 두고 있으니 더더욱 멀리하는거야. 난 대한제국의 공주잖아."

"이해가 잘 안됩니다. 정치에 뜻을 두고 있으니 멀리하신다니···."

"아버지 권력이라면 날 황제로 만들고도 남겠지. 그런 내가 황제가 되면 어떤 정치로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할까?"

진혁은 얼마전 공주의 국회 연설 내용을 떠올리며 요약해서 말했다.

"입헌군주제가 바로선 나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뜻을 자유롭게 펼치는 민주 정치의 나라. 그게 공주님이 원하시는 대한제국이었죠."

"맞아. 내가 만들고 싶은 나라는 그런 나라야. 그 나라는 민의에 따라 선출된 의원들이 내각제라는 시스템을 통해 정치를 하는 나라지. 거기에 황제는 어떤 간섭도 안한다는 게 차이점이야."

은서는 난초에 빨간색 꽃을 그리며 말했다. 거무칙칙한 먹물 색 난초에 활짝 핀 빨간 꽃. 그것은 은서 본인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될 이은서.

"난 이렇게 상징적인 존재로 활짝 피어있으면 돼. 굳게 솟은 줄기, 우아하게 뻗은 잎, 그 위에 활짝핀 꽃. 이렇게 꼭대기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예쁘게 미소짓고 손을 흔들면 되는거라고."

그 말에 진혁이 주먹을 쥐고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거 아닙니까?"

"난초에 핀 꽃이 쓸모가 없을까? 꽃은 꽃만의 역할이 있는거고, 역할을 못한들 예쁘게 피어있는 시각적인 효과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

은서가 진혁을 바라보며 말한다.

"한 나라의 군주로 민족 통합의 상징이 된다는 건 이런 의미야. 난초에 피어난 예쁜 꽃처럼 국가의 이미지가 되어주는거지. 뿌리가 뭘하든 잎사귀가 뭘 하든 꽃이 예쁘게 피어있으면 모두가 좋아하잖아."

"그래서 공주님은 정치에 뜻을 둘수록 더더욱 멀리하시는거군요."

"그래, 황실에게 정치란 중립. 민주 정치가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게 황실의 의무인거야."

그렇게 말하며 은서는 꽃에 빨간 잎을 하나 더 그려넣는다. 그런 그녀에게 진혁은 돌덩이 같은 말 한마디를 던진다.

"정치를 못하시면 어찌됩니까?"

그 말에 난초의 꽃이 흐트러졌다.

"정치를 안하는데 못할 수가 있어?"

"그 말이 아닙니다. 정치를 해보기도 전에 할 기회를 잃어버리면 어찌하냐는 물음입니다."

"그럴리가 없잖아. 우리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황제야. 실권을 거머쥔 독재권력이지. 그런 아버지가 계승법 하나 못 바꿀까?"

"민주적 절차로 계승법을 바꿀 수 없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뭐?"

진혁이 은서에게 돌덩이를 하나 더 날렸다.

"한국독립당은 황제 폐하의 친위정당입니다. 그런 정당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공주님을 황태녀로 만드니 마니 싸우고 있죠. 여당이 그지경인데 민주적인 방법으로 어찌 계승법을 바꾸겠습니까?"

"그말인 즉···."

"강경파가 지금처럼 버티고 있다면 계승법은 못 바꿀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폐하의 뜻이 꺾일리도 없죠. 굽혀지지 않는 강경파와 굽혀지지 않는 절대권력자가 충돌하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게 뭔 소리야?"

"진짜 모르십니까?"

은서가 붓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야! 김진혁!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폐하께서 일전에 공주님께 경고하셨죠? 공주님이 황태녀가 되든 말든 경친왕은 죽을거라고."

그건 몇 일 전 공주가 광란의 거문고 연주를 할 때 일이었다.

<그래도 한가지는 알아둬라. 네가 황태녀가 되지 않아도 경친왕은 내 손에 죽을거다.>

<니 애비는 싸울거고 이길거다.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라면 그대로 따라오는게 너한테도 좋을거야. 3월 7일에 국회 상하원 합동연설이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황태녀가 되겠다고 밝혀라. 그렇게만 해주면 니 애비가 모든걸 책임져주마.>

은서는 떠올렸다. 그 남자의 마지막 한마디를.

<니 애비가 모든걸 책임져주마>

"설마, 그 모든게···."

"뭐가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중정부터 보안사, 군부까지 모든걸 틀어쥔, 공주님이 독재자라 비난하시는 절대권력자신데요."

"......"

은서는 함녕전을 박차고 나갔다. 그녀가 향한곳은 석조전. 아버지의 집무실이었다.

***

"나랑 얘기좀 해."

"저녁밥 먹자는 거면 그리해주마."

은서의 아버지. 대한제국 황제 이연은 어두컴컴한 집무실에서 스탠드를 켜놓은 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안경쓴 중년남자의 책상엔 서류가 산처럼 쌓여있었고, 그걸 하나하나 읽어보며 서명하는 눈코 뜰새없이 바쁜 업무 속에 딸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무심코 던지는 딸의 한마디.

"아버지랑 밥상에서 마주할 일은 10년이 지나도 없으니까 꿈 깨."

"허허 참··· 딸래미랑 밥한끼 먹을 수 없는 애비라니···."

"어쨌든 얘기좀 하자고. 할 말이 있으니까."

"해라. 들어줄테니."

은서는 홀로 팔짱을 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계승법 통과 안되면 어떻게 할거야?"

"통과 안될리가 있겠냐?"

"모든걸 책임져준다며. 근데 돌아가는 꼬락서니 보니까 통과 안되게 생겼던데. 국회 하원이 300석이고 과반 넘으려면 151석 이상 있어야하는데 당장 여당 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며."

"걱정마라. 그 녀석들도 곧 찬성표로 바뀔테니까."

"무슨 근거로? 무슨 방법을 쓸건데?"

이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서류더미에 파뭍힌 채로.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냐? 독재자라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네가 생각하는게 뭐냐?"

은서는 아버지로부터 30cm 떨어진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속삭였다.

"고문."

그 두글자에 남자의 펜이 멈춘다.

"스스로 새장에 갇혀 정치적 무관심을 선언하는 착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아는구나."

"나도 알건 다 아는 나이야. 빌어먹을 인간···."

"애비더러 빌어먹을 인간이라니. 너도 참···."

"내가 분명히 경고하는데, 아버지. 죄없는 사람 고문하기만 해봐. 내가 당장 이 궁궐 밖을 뛰쳐나가서 사방팔방에 다 떠들고 다닐테니까."

이연은 자신의 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봐야 누구도 믿지 않을게다. 난 국민들에게 신처럼 떠받들여지는 영웅이니까."

"미국 대사도 그럴까?"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살기가 퍼졌다.

"그런건 어디서 배운거냐?"

"어디서 배우긴. 경친왕 전하가 미국 대사랑 주한 미군 사령관을 데려와 아버지 앞에서 시위를 하던데. 그 만찬 자리가 그런 목적이란거 내가 봐도 알겠더만."

"경고하는데, 네가 그런 짓을 한다면 딸이라고 그냥 넘어가진 않을거다."

"아버지도 똑똑히 들어. 죄없는 사람 잡아다가 고문을 하거나 죽여버리면 나도 가만안둬. 혀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낼 테니까."

"그럼 막아봐라. 네가 움직여 계승법을 통과시키면 니 애비도 고문 같은 건 쓰지 않으마. 어떠냐?"

은서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약속 지켜."

그렇게 답하며 은서는 아버지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간다. 박차고 나가기 전에 남자가 아버지로서 말했다.

"강경파는 협조하지 않을거다. 녀석들 뒤엔 경친왕이 있으니까."

그 조언에 은서는 승리를 자신하는 미소로 답했다.

"그럼 간단하지. 야당을 설득해서 한독당 온건파랑 151석 이상을 만들면 되니까."

"신민당이라··· 쉽지 않을텐데?"

"난 민주주의자니까. 신민당에 붙어서 온건파들과 손을 잡으면 계승법도 고칠 수 있겠지."

"기여코 이 나라를 민주국가로 만들 셈이냐?"

"내가 황제가 되어 뭘 하든 그건 내맘이잖아. 그 때면 아버지도 없을건데."

"쉽지 않을거다."

"그건 해봐야 알지."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떠났다. 신민당 당사를 찾아간건 이틀 뒤 오후 4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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