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28화 (28/131)

〈 28화 〉 Ep4. 덕수궁 비서실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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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은 의외의 인물에서 시작됐다.

1973년 3월 10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범석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1900년 12월 11일 출생으로 올해로 73세가 된 총리는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2인자였고, 황제를 지지하는 친위정당인 한국독립당의 총재이기도 했다.

황제 이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조선 민족 영웅중의 영웅인 영웅왕. 1960년 5월 16일 황제의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실력자의 부재가 정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총리께서 쓰러지셨답니다!"

"뭐야?!"

소식을 접한 김종규 의원이 충격에 빠졌다. 동료 의원들과 함께 중앙청 로비를 걸어나오던 검은 양복의 그는 한국독립당의 부총재였고 차기 총리로 유력시 되는 인물이었다.

"자세히 말해봐! 쓰러지시다니?"

"오늘 아침에 관사를 나오시던 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답니다. 수행원들이 응급조치를 해서 목숨은 부지하셨는데, 당분간 정치 활동이 힘들것 같다십니다."

"이런 젠장, 당장 차 대기 시켜! 당사로 갈거니까!"

"예!"

이 소식은 평양의 서북방위사령부에서 근무하던 경친왕 귀에도 들어간다.

"이범석 장군님이 쓰러지셨다고? 심근경색???"

"예."

부관의 말에 경친왕이 식은땀을 흘렸다.

"작년에도 심근경색이셨잖나? 분명 다 나으신걸로···."

"아무래도 재발하신 듯 합니다."

집무실에서 경친왕이 식은땀을 흘린다. 파르르 주먹을 떠는 그의 마음속엔 진심어린 걱정과 분노가 가득했다. 누굴 향해야 할지 모를 그런 분노에 경친왕이 덧없이 책상을 내리쳤다.

"장군님이···."

집무실 한켠에 앉아있던 한국독립당 의원 박영철이 입을 연다. 그는 평양을 기반으로 둔 대한제국 하원 의원이었고 강경파의 수장이었다. 평양 토박이라 서북 방언이 술술술 나오는 이북지역 사람이기도 하다.

"차라리 잘됐습네다."

그 말에 경친왕이 진노하여 소리쳤다.

"잘 되다니! 그분은 민족의 영웅이야!"

"우리의 정적이기도 했디요."

"지금 정치적 논리로 따질때인가?"

"이럴 때이니 더더욱 따져야 하는 겁네다. 공주님의 황위 계승을 인정하는 조선황실법 개정안이 올라올것인데 막아야 하지 않갔습네까?"

"조선황실법 개정안?"

"그 법이 있기에 전하께서 황위 계승 서열 1위로 인정되시는 거이디요."

"그래, 공주는 여자니까."

"그 법이 개정되면 어찌 되갔습네까? 공주님은 황태녀로 즉위하실테고 황제 폐하의 유일한 적장녀인 그분이 막강한 정통성을 가지실겁네다."

경친왕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즉, 자네 말은. 이범석 장군님의 부재가 계승법 개정을 막을 절호의 기회가 될거다. 그 말인가?"

"이범석 장군님은 국회 권력을 틀어쥐고 한독당을 장악한 폐하의 오른팔이셨디요. 내각 총리란 무게가 결코 가볍디 않습네다."

"그분의 부재로 권력 공백이 생긴거군···."

박영철 의원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는 바로 서울로 가보갔습네다. 강경파 의원들을 모아 계승법 개정을 막아보디요."

"황제가 가만두지 않을텐데?"

"일없습네다. 한독당의 반이 이북출신이디요.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당이 반으로 쪼개질겁네다."

박영철 의원의 표정에 각오가 서려있었다.

***

"차기 총리 인선을 서둘러야 할 거 같습니다."

덕수궁의 황제 집무실에서 이화가 말했다. 그녀 앞에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있는 이연이 있었다.

"총리 상태는?"

"빠른 응급조치로 위기는 넘기셨지만, 워낙 고령이셔서 국회 등원은 당분간 어려우실 것으로 보입니다."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군."

이연은 국회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다. 한독당이 둘로 쪼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속에도 있었고, 대책을 고심하는 남자의 표정에 주름이 생기고 만다.

"국회 하원의석 300석 중 185석이 한국독립당. 그 중 85석이 이북출신의 강경파입니다. 그들은 서북방위사령관 경친왕을 지지하고 있죠."

"그들을 달래고 정치적으로 장악할 능력자가 이범석 총리였는데 이래서는··· 종규로는 힘들겠지?"

"당내 장악력이 완전하지 않은 분입니다. 부총재님 힘만으론 버거울겁니다."

"이북출신 강경파를 빼면 내 딸을 지지하는 국회 하원의원이 100여명. 국회 과반을 넘지 못하는 수치니 계승법 개정은 힘들겠군. 무소속 20석에 신민당 95석은 어떤가?"

이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의 친정에 반대하는 자들이라 계승법 개정에 관심이 없을겁니다. 그쪽 강경파 중에는 암암리에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자도 있다 했으니 우군으로 끌어들일려면 협상이 골치아프겠죠."

"예컨대, 나더러 정치에서 손을 떼라. 그런 조건이 튀어나오겠군."

"예, 분명 그렇게 나올겁니다."

"그럼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겠어."

황제의 정치 개입이 초읽기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

3월 10일 오후 7시. 저녁식사도 거른 채 부리나케 달려온 한국독립당의 유력 의원들이 당사에 모여 대책회의에 나섰다.

비어있는 총재 자리(이범석 총리의 자리)를 가운데에 두고 우측엔 이북 출신 의원들이, 죄측엔 남쪽 출신 의원들이 각각 강경파와 온건파를 자처하여 자리에 앉으니 그들의 대표는 김종규 의원과 박영철 의원이었다.

"이건 반역입네다!"

이북출신 강경파 박영철 의원이 말했다.

"내래 공주님 연설이니까 참고 있었디요. 근데 상황이 이러니 직진해서 말하갔습네다. 이 나라가 누구 나랍네까?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나라디요. 이씨 조선 그 자체란 말입네다!"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는가?"

온건파 김종규 의원이 답했다.

"근데 입헌군주제요? 헌법을 개정해서 전제군주제를 만들어도 모자랄판에 민주주의가 무슨 소리요? 이건 공주이기전에 신하로서 불충한 사상이라요!"

"하원 의원이란 작자가 헌법 공부도 안하나? 이 나라는 입헌군주제야! 민의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란 말일세!"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데 그깟 민의가 중요합네까? 김종규 의원도 개헌에 찬성하는 분이디요!"

김종규 의원은 기가찬 표정으로 웃어제꼈다. 황제 폐하를 찬양하며 마치 충성파 의원이라도 된 마냥 주장하고 있지만, 그 속에 '차기 황제' 경친왕이 들어있음이 뻔히 보였다.

'네놈들의 위대한 영도자는 경친왕이겠지!'

그렇게 속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아직 스물여덟밖에 안되신 분이네. 자네가 말하는 그 위대한 영도자. 황제 폐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어린분이시지. 그 점은 감안해야 하지 않겠나?"

"황제 폐하더러 독재자라하신 분입네다!"

그 말에 김종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했다. 담담하고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의원을 향해 선언적으로 말한다.

"그래! 폐하는 독재자시시네! 근데 하나만 묻지. 여기 있는 모든 의원들에게 하는 질문일세."

담담하게. 다시한번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숨을 가다듬으며 하는 한국독립당 부총재의 말.

"독재자가 나쁜가?"

"......?"

난데없는 질문에 한독당 유력 의원 전체가 꿀먹은 벙어리마냥 김종규를 바라보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독재자였네. 혁명으로 왕을 쫒아낸 공화국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 그럼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됐고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부르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네다! 그는 전범이라요!"

"그래서 우리 폐하가 더 위대한 것이 아닌가? 나폴레옹은 민중의 지지를 전쟁에 악용했지만, 우리 폐하는 민중의 지지를 조국 수호에만 쓰고 계시지!"

김종규 의원이 박영철 의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나라는 입헌군주제일세. 입헌군주제에서 군주가 직접 통치를 하는건 독재자라 비판 받아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왕 독재를 할거면 떳떳하게 하잔 말일세!"

"떳떳한 독재라니 기게 무슨 어거지같은 소립네까?"

"나폴레옹이 어떻게 황제가 됐나? 프랑스 민중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됐지. 프랑스 대혁명으로 자기네 왕 모가지를 자른 작자들이 직접 황제를 인정했다고.

우리 황제 폐하도 그런 분일세. 식민지배 당하던 조선을 독립시키고, 한국전쟁에서 북진통일을 달성하고, 경제 개발까지 하는 위대한 영웅이 되어 민중의 지지를 얻은 위대한 황제!

그런 우리가 독재자라 지적 받는다고 기분 나빠할 이유가 있나? 하늘을 우러러 우리의 독재에 한 점 부끄럼이 있던가?"

"그건... 부정하지 않갔디요···."

"그럼 주제를 알아야지! 폐하를 등에 업어 금뱃지를 달았으면 충성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공주님은 황제 폐하의 유일한 적장녀일세!"

박영철 의원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북방의 안정을 위해 이 자리에 온겁네다! 강력한 리더쉽으로 공산주의자들과의 정면대결을 승리로 이끌어줄 이념적 영웅이 필요하디요! 우리 이북 사람들은 민주주의 같은 약해빠진 사상을 입에 담는 공주님은···."

김종규가 성을 내며 말했다.

"그분도 전쟁영웅일세! 월남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베트콩을 무찌르고, 북괴군 첩자를 무찌른 반공소녀 이은서! 유관순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선여인의 기개! 그렇지 않은가?!"

"반공소녀 이은서···."

"애국소녀이기도 하지! 1분 50초 전 자네가 말한 이념적 영웅일세! 공산주의자들과 정면 대결을 해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월남전의 영웅!"

김종규 의원이 한술 더 떠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내가 친위대장 출신으로 보증하지! 황제 폐하와 친위대, 중앙 정보부, 보안사령부, 군부까지! 누구도 이은서 대위를 돕지 않았네! 모든 공은 그분 스스로 쟁취하신거니까 어줍잖은 이념 논쟁은 집어치우고! 애국심 타령도 집어 치우고! 정통성을 따지게! 영웅의 딸인가? 영웅의 동생인가!"

"경친왕 전하도 한국전쟁의 영웅이십네다!"

"그분은 고작 황제 폐하보다 다섯살 어릴 뿐이지! 나이차가 얼마 안나잖나!"

"다섯살이면 천지가 개벽하고도 남을 시간입네다!"

한국독립당의 내분은 이후 5시간 30분 57초 동안 계속됐다.

***

"이념 논쟁은 마무리 됐습니다. 국회 연설에 기반한 반대는 더 이상 불가능할겁니다."

이범석 총리의 관저에서 이화가 말했다. 그녀 앞에는 침대에 앉아 수액을 맞고 있는 총리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2인자 치곤 대단히 소박한 관저는 다양한 정치 서적과 광복군 시절에 찍힌 사진들이 장식되어 있을뿐, 값비싼 예술품이라던지 사치품 같은건 전혀 보이지 않아 옷걸이에 걸려있는것도 허름한 양복이나 군복이 고작이었다.

"이북지역 애들이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안됐으니 논리에 빈약함이 많았겠지."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각하."

이범석 총리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린 책장을 넘긴다. 손에는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의 전기가 들려 있었다.

"월남전에 다녀온 공주님께 이념 논쟁을 펼치다니. 쯧쯧쯧···."

"이걸로 강경파들이 고개를 숙여줬으면 좋겠는데요."

"어려울게야. 녀석들이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경친왕 때문이니까. 이념 논쟁 같은 건 구실이었을 뿐이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이화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계승법 개정으로 소란스러운 때에 하염없이 책만 읽고 계시는 야속한 총리님을 향해서. 그러나 이승만 총리 시절부터 정치를 해온 경험 많은 정치9단을 향해서. 자신의 스승 뻘인 총리에게 덕수궁 비서실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구했다.

"폐하께서 답을 내리신 걸로 아는데."

"어떤···?"

"경친왕을 암살하는 것. 정적을 제거하는데 그만한 게 또 없지 않은가?"

이화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미국 때문에 그런가? 무슨 상관이야? 우린 독립국일세.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하건 감놔라 대추놔라 간섭받을 이유는 없지. 하물며, 걸리지 않으면 그만인것을. 자네의 중정이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능력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며 총리는 책장을 넘겼다.

"암살이든 진짜 사고든 지금 타이밍에 경친왕이 죽으면 미국 정부가 의심할겁니다. 국민들도 폐하와 공주님을 의심하겠죠."

"그리 눈치가 보이면 가만있자··· 기습인사는 어때? 황제 폐하와 나의 이름을 빌려 경친왕을 서북방위사령관에서 해임시키는거지."

그 말에 이화가 17초 동안 망설이며 생각에 잠겼다. 18초쯤 되었을 때 나지막이 말했다.

"자충수입니다."

"어째서?"

"한독당 강경파와 경친왕의 커넥션은 자발적 동맹 관계니까요. 황제가 되고 싶은 군부 인사와 이북지역의 안전을 걱정하는 지역유지들의 동맹 관계를 기습 인사만으로 끊기엔···."

"서북방위사령관이라는 군권이 없으면 경친왕은 아무것도 아닐세. 권력이 없으면 이북 사람도 매력을 못느끼지 않겠나?"

"군복 벗은 경친왕이 족쇄 풀린 것 마냥 정치판을 헤집고 다니면 어찌하겠습니까? 이 나라는 황족의 정치 관여를 법적으로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부터 그리하고 계시니까요."

그녀의 대답에 이범석 총리가 미소를 지었다.

"정치 감각이 늘었군."

"저를 시험하고 계시는군요."

"시험하는김에 하나만 더 하지. 중정을 시켜서 박영철 의원과 강경파 유력 의원들을 체포해봐. 그 다음에 남산 지하실로 끌고가 협박을 하는거야. 조선황실법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며 놈의 콧수염을 뽑아버리면 오줌을 질질 흘리며 파벌을 해산하고 영원한 굴복을 맹세하겠지. 그렇게 되면 한독당 내 온건파만 남아서 폐하의 권력이 굳건해질텐데. 확실한 해결책 아닌가?"

"각하!!"

기겁하는 이화의 태도에 이범석 총리가 책을 덮고 말했다.

"자넨 민주주의자군."

"예?"

"정말 보기드문 인재야. 중앙정보부랑 보안사령부를 틀어쥔 덕수궁 비서실장.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그림자 권력이 민주주의자라니 허허허···."

"저는···."

"1년 전 중정 국내파트랑 보안사령부를 숙청한 것도 자네의 작품이겠지?"

이화가 이범석 총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민주정치를 염원하는 폐하의 뜻으로 포장됐지만 그럴리가 있나? 그들은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수족이었어. 일제 시대 때부터 전수받은 고문기술 덕에 정적을 협박하는데 도가 텄거든. 언론을 장악해서 여론전을 펼치는 실력도 자네의 몇 배이상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가져서 공포정치를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는데."

이범석 총리가 매서운 눈초리로 이화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런 그들을 자네가 숙청해버렸지. 그래놓곤 비서실장으로 올라가 자신의 수하들을 앉혀놓고 모든 정보라인을 틀어쥔거야. 자네는 폐하의 손발을 자른 비선실세일세."

"제 충성심은 순수합니다! 각하!"

성내는 이화의 모습에 이범석 총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공포 정치 없이도 절대권력을 누릴 수 있다.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폐하의 권력을 무결점으로 유지해보겠다. 그러니 한번 믿어달라. 그런식으로 간언을 했겠지. 그렇게 마음을 얻어 비서실장이 된 게 아닌가?"

이범석 총리의 말에 이화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이화란 이름은 중정시절에 쓰던 가명일거야. 본명은 빅토리아고 성은 최. Victoria Choi. 그게 자네의 진짜 이름이겠지. 한국식 이름이 뭔진 모르겠지만 폐하의 배려로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왔다지?"

이화가 살기어린 눈으로 이범석 총리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품에서 소음기가 달린 권총이 튀어나온다. 언제든지 이범석 총리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시킬 수 있는 정교한 요원의 총이자 이화의 비밀 무기였다.

"너무 많은걸 알고 계시는군요. 제 본명과 신분, 유학에 관한 사항은 폐하만이 알고 계시는 비밀 정보입니다. 정보의 출처를 바른대로 말씀해주지 않으시면 이 자리에서 총리님을···."

이범석 총리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이래봬도 총리 생활만 13년이야. 폐하께서 진행하시는 사안을 내가 모를거라 생각하는가? 폐하의 총애를 받은 건 자네만이 아닐세. 비서실장. 나는 자네보다 먼저 폐하를 만났고, 자네보다 먼저 대의에 찬동했어. 이승만 총리를 배신하고 혁명을 설계한 것도 나 이범석이지."

이범석 총리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이화를 바라보고 말했다.

"자네는 내 후임에 불과해."

"각하···."

"모든걸 알고있다 착각하지 말게. 정치인의 독은 자만이야. 비서실장의 몸으로 정치가 하고 싶거든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부터 인정하게."

"......"

"애국심이 가득한 친구니 조언을 해주지. 이 싸움은 말야 공주님을 황태녀로 앉히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싸움이잖나?"

"예, 각하···."

"그럼 해결의 실마리도 공주님에서 나오는게야. 필요하면 공주님을 직접 중앙청으로 모시고 가봐."

"그건···."

"왜? 의원들에게 시달릴 공주님이 걱정되나?"

"아직 완전히 회복됐다고 자신하긴 어렵습니다. 다시 트라우마에 빠지셨다간···."

"자넨 그게 문제야. 공주님이야 말로 싸움의 당사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언제까지 새장에 모셔둘 셈이야?"

"공주님이 싸움을 원하실거라 판단하시는겁니까?"

"의지만 부여되면 뭐든 해내시는 분이야. 싸움에 이유만 생긴다면 무엇이든지 능히 해내시겠지."

"......"

"타인의 마음을 섣불리 재단하지 말게.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내 조언은 여기까지 하지."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조선 공주 이은서는 덕수궁에서 난초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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