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Ep3. 애국자들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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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6일 저녁 9시.
서울의 저녁 하늘에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길거리엔 경찰과 군병력이 곳곳에 배치되어 차량을 하나하나씩 검문하고 있었고, 곳곳에 군견들이 냄새를 맡아가며 어디론가를 바쁘게 다니니 사람들은 그 날 간첩이라도 들이닥친 줄 알았을 것이다.
진혁은 특임대의 검정 군복을 차려입은 채로 길거리를 한참이나 배회하고 있었다.
"납치일까요?"
부하의 물음에 진혁이 답했다.
"납치였으면 요구 조건이라도 말했겠지."
"아니 도대체, 황궁에 수행원이 몇 명이나 지키고 있었는데 거길 뚫고 잠행을···."
"특전사셨잖아."
"......"
공주가 실종된걸 깨달은건 몇분 되지 않아서였다. 황제와 이화가 집무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대화하고 있었을 때, 공주의 잠자리를 확인하러간 진혁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공주 방은 텅 비어있었고 그 즉시 친위대장을 찾아가 실종 사실을 보고했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으니 마치 마법이라도 쓴 것 같았다. 그 때가 8시.
하지만 정작 은서가 황궁 밖으로 도망친건 저녁 8시 30분이었다. 실종 사실이 알려진 것보다 30분 지난 후였다. 덕수궁에 비상이 내려져 한참을 수색했을 때 은서는 벽을 타고 올라가 석조전 지붕에 숨어있었다.
한참을 찾아도 공주가 발견되지 않자 8시 20분 쯤에 '공주님이 황궁 밖으로 나가셨다'는 결론이 나왔고, 국방부와 경찰청까지 수색 명령이 내려와 서울에 비상이 떨어진다. 덕수궁 경호처도 수색에 동원돼 황궁 밖을 나가기 시작하니, 요란한 황궁 속에서 경호원으로 위장한 은서가 유유히 탈출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기 수색이 부실해서 섣불리 결론을 낸게 실패의 원인이었다.
"소주 세병만 주실래요?"
은서의 첫번째 행보는 슈퍼마켓이었다. 소주 3병을 구매한 은서는 덕수궁 의무동에서 훔쳐온 안정제 한 통을 들고 유유히 길거리를 걸어갔다.
"아무도 모르잖아. 멍청이들."
머리가 아파왔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권력다툼 속에 머리를 잠식해나간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안정제를 탈탈털어 소주와 함께 꿀꺽 목구멍으로 삼켜낸다.
검은 정장 차림으로 길거리를 유유히 다녀도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건 진혁이와 데이트를 할 때 알아낸 것이다. 서울시민 누구도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신기한 사실이었다.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난 은서 얼굴이지만 어디까지나 '월남전에 파병된 이은서 대위'로서의 자신이었고, 그녀가 대한제국의 공주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한제국 공주는 경호상의 이유로 기밀에 붙여져 있었으니까.
서울시민 대부분은 '황제폐하 슬하에 따님이 한 분이 계신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어떻게 생긴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황궁 밖으로 도망치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어'
황태녀가 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권력다툼을 해야할 경친왕 전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진혁이에겐 미안했지만 공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난 누구도 못 알아봐. 이대로 멀리 도망쳐버리면 영원히 자유인이 되는거라고!"
은서의 얼굴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행복의 미소가 활짝 피어 있었다.
"너희들이 말했지? 행복하게 살라고. 행복하게 살게. 황궁에서 도망쳐버리는 게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 될테니까. 그렇지? 평범한 시민으로 평범하게 살면 나도 행복할 수 있는거잖아! 굳이 공주로 살 필요 없는거잖아!"
술과 약에 취한 은서의 눈에 11명의 전우가 아른거렸다. 그들은 분명 자신에게 말했다. 행복하게 살라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보기로 했다.
***
황제가 도착한 곳은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였다. 대한제국 친위대에 속해있어 차지연 대장이 총사령관 노릇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제국 황제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사령부에서 의견은 두가지로 나뉘었다.
"공주님의 신변을 대대적으로 알려 공개 수색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공개 수색으로 전환하자는 친위대의 차지연 대장과
"군과 경찰을 물리고 중정에 맡겨주십시오. 요원들을 풀어 샅샅이 뒤져보겠습니다."
더욱 엄격한 비밀 수색으로 전환하자는 김재필 부장이었다.
"인원을 더 줄여서 어쩌자고?"
황제의 물음에 중앙정보부 김재필 부장이 차근차근 답했다.
"공주님의 신상정보는 지금까지 국가 기밀로 붙여져있었습니다. 지금도 군경은 '부잣집 여식으로 보이는 28세 여인'을 찾아라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 어떻게 생긴 누구를 찾아야 하는진 모르는 상태 아닙니까?"
"......"
상황이 모순적이란 건 황제도 이해하는 부분이었다.
"기밀을 해제하여 공주님의 수색을 공개적으로 실시하면 효과가 있긴 할겁니다. 하지만, 간첩이나 경친왕 전하의 지지 세력도 공주님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될건데, 그들이 먼저 선수를 치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정 요원만 데리고 수색을 하자고?"
"중정과 친위대 특임대만 동원하여 은밀히 수색해야합니다. 이들은 폐하께서 믿고 쓰실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차지연이 반박했다.
"그래서야 언제 공주님을 찾아! 간첩들 손에 넘어가기 전에 깡패 손에 넘어가면 공주님이 어찌 되겠어?"
"대한제국 특전사가 고작 깡패 새끼들한테 당할까?"
이연이 피곤한 표정으로 이화에게 물었다.
"이 실장 자네 생각은 어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공주님이 자유를 찾기 위해 도망치셨다면 하루가 됐건 이틀이 됐건 옥체에 위험은 없으시겠으나, 자결을 목표로 나가셨다면 일분 일초가 급할테니까요."
김재필이 물었다.
"자결을 목표로 하셨다면 황궁에서도 가능했을겁니다. 목만 매달아도 죽을 수 있는게 사람인데 굳이 야반도주까지 하실 필요가···."
이화가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사람 심리는 모르는거에요. 자유를 찾기 위해 나갔다가 인생에 회의감을 느끼고 자결을 결심해도 이상하지 않겠죠. 인간의 심리는 복잡한거니까요···."
"......"
"일단, 서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길목에 군경을··· 아니, 그럴려고 해도 일단 공주님의 용안을 알아야 가능하겠군요."
"......"
"폐하께서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공주님의 신상정보를 군경에 알릴지 말지. 그것만이라도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이연이 괴로운 표정으로 고심끝에 말했다.
"군경 모두 철수시켜."
"폐하!"
차지연의 외침에 이연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몇시간 전까지 경친왕 그놈과 으르렁 대고 있었어. 군경이 요란을 떨면 공주의 실종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겠지."
"정녕 이렇게 공주님을 포기하실 요량이십니까?"
"친위대랑 중앙정보부. 너희 둘만 믿을테니까. 아비로써 부탁하지."
"폐하···."
"진혁이는 뭐하고 있나?"
이화가 답한다.
"현장에서 공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화 자네랑 진혁이 둘이 해봐. 내가 공주라면 어디를 갔을까? 어디를 가고 싶어할까? 그렇게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지."
"예, 폐하···."
***
“등신···.”
저녁 밤 길거리를 걷던 은서의 말이었다.
덕수궁으로부터 하염없이 남쪽으로 걷기 시작한 은서는 가는동안 군인을 10번 만났고 경찰을 25번 만났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은서가 대한제국 공주라는 건 상상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보내주고 있었다.
“죄다 등신 새끼들이라니까”
비틀비틀 걸어가며 은서는 나지막히 읊조렸다.
“이래봬도 대한제국의 공주니까 이렇게 도망가는 것도 조선왕조실록 같은거에 다 기록되겠지?”
조선왕조의 전통 중엔 기록유산이 있었다. 왕실의 모든 행위와 발언 등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이 볼 수 있게 역사책으로 편찬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로 나라가 망해 이 전통은 끊겨버렸지만, 지금도 덕수궁에선 서기관들이 열심히 받아적으니, 은서의 모든 행동도 새로운 대한제국 실록으로 기록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언젠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내 이야기도 막 드라마 같은걸로 나오나? 재밌겠다. 헤헤···.”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며 은서는 상상한다. 월남전에서 공주가 고생하는 모습, 월남에 돌아와 경복궁에서 아버지와 싸우던 공주의 모습,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서울의 밤거리를 외로이 걸어가는 공주의 모습까지. 언젠가 수십 수백년 뒤 작가들이 상상력을 덧대어 사극으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우는 누구일까? 나랑 닮았을까? 작가의 상상력이 덧댄 나의 일대기는 어떤 내용일까? 상상해봤지만 부질 없었다.
“그래봤자 내 심정은 10%도 이해 못하겠지. 에휴···.”
머리속에서 박철민 상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오실겁니까?>
환각같은 30대 아저씨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응, 갈거야.”
<무리하지 마십쇼. 지난번에도 우리 무덤 앞에서 졸도하셨으면서>
환청같은 소리에 은서가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잔뜩 술을 마시잖아. 안정제도 몇 알을 먹었는데.”
머릿속의 박철민 상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오늘은 꼭! 니들한테 사과하고 만다. 니들 무덤 앞에 찾아가서 내가 여기 술도 한잔씩 따라주고, 군가도 불러주고. 사과하면··· 용서해줄거지?”
밤거리를 혼자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지나가는 행인들 눈에 띈다. 머리까진 중년의 아저씨, 여관을 찾아 헤매는 젊은 남녀, 통금시간을 앞두고 부리나케 뛰어가는 대학생들. 그들 모두 은서를 미친년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거봐, 다들 아무도 안 알아준다니까. 내 마음 같은건. 그냥 다들 미친년처럼 쳐다보잖아.”
눈물 반 웃음 반. 배시시 웃으며 은서는 비틀거리 듯 한강다리를 향해 걸어간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것조차 지나가는 행인들은 알아주지 못한다.
병신새끼들.
***
현충원의 문은 닫혀있었다. 저녁 6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높디높은 정문을 넘어가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이씨! 내가 방문하겠다는데.”
그렇게 술병이 담긴 비닐봉지를 담벼락 위로 던져버리고 가뿐하게 뛰어넘는 은서는 대한제국의 특전사였다. 애국지사들이 보면 기겁을 하며 혼낼 일이지만 알게 뭐야? 내가 대한제국 공주인데.
그렇게 은서는 어둠이 짙게 깔린 고요한 현충원 속에서 자신의 전우를 찾아나섰다. 베트남전 참전용사 묘역과 독립운동가 묘역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한걸음씩 다가가니 얼마전 자신이 졸도했던 그곳이 눈에 보였다.
“이번엔 갈 수 있어. 할 수 있다!”
그렇게 볼을 탁탁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한 은서의 발걸음은 자신의 전우 11명의 묘역을 향해 있었다.
그 때 멀찍이서 한 남자가 말했다.
“이제왔냐?”
은서가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남자의 모습을 구별해내기 시작했다. 검은베레를 쓰고 특전사의 전투복을 차려입은 젊은 장교. 계급은 대위. 이름은 김훈.
“팀장님?”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할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한 옛 선임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