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Ep3. 애국자들 (6)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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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날 숙청하지 못해."
국방부로 돌아가는 리무진에서 경친왕이 말했다.
"중정은 지금 그 여자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보안사도 예전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만약을 대비하시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경친왕의 말에 답한건 자신의 아들인 이환이었다. 이 녀석의 계급도 대위. 아버지가 있는 사령부에서 말단 장교로 일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미국이 지켜주는 몸이야. 암살은 무리지. 그나저나 넌 서울까지 왔으면 애비 따라 입궐을 할것이지 왜 숨어다닌거냐?"
"권력을 놓고 다투는 사이입니다. 가급적 얼굴을 안비추는 게 안전하겠죠."
경친왕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지. 그림자 속에 숨어다니며 경험이나 쌓고 있어. 애비가 황제가 되면 공개석상에 올라와 황태자가 되고. 그러다 다음 황제가 되면 돼."
"은서는 어떻게 하실겁니까?"
경친왕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등만 두들겨줘도 지레 겁을 먹어 잔뜩 토해내더구나. 월남전에서 충격을 받았다더니 아직도 후유증이 그대로야."
"하기사, 부하 11명을 잃었으니···."
"어차피, 은서만 없으면 형님은 좋든 싫든 내게 황위를 물려줘야 해. 나 말고 다른 이에게 물려줄려면 영친왕 쪽을 찾아봐야 하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땅에서 작위 받고 살아온 자들을 황위로 앉히는건 불가능에 가깝지."
"이 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나라니까요."
"그래, 독립운동가의 핏줄이 아니면 황제조차 될 수 없는 나라야. 이몸은 혜조대제(의친왕)의 둘째 아들이니까."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영웅이기도 하십니다."
"그래, 그러니까 은서만 없애면 돼."
"아버지 부대에 이은서 대위의 선배가 한 명 있었지요?"
"그래, 김훈 소령이 있었지 아마. 은서가 죽인 11명의 부하는 그의 부하기도 했으니까 화가 잔뜩 나있을게야."
"그분을 은서에게 보내보시죠. 부하 11명을 잃은 팀장이 자신의 옛 팀장을 만나면 속이 아주 뒤집어질겁니다."
팀장의 팀장이란 말에 경친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죄책감에 폐인이 돼 버리겠군. 죽일 필요도 없겠어."
"김훈 소령이 분노에 휩쌓여 은서를 죽여주기라도 하면···."
"더할 나위가 없지."
두 사람을 태운 리무진이 국방부에 도착했다.
***
휴가 같은건 애저녁에 포기한 이화가 비서실장의 집무실에 돌아왔다.
"에휴···."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당근과 잡지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10년은 늙어버린 기분이다. 피부가 축 늘어져 더 이상 옛날의 피부를 유지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이화의 등골을 서늘케 한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대한제국 친위대를 이끄는 차지연 대장이었다.
"친위대장님?"
"비서실장님!"
"무슨 일이신데 휴가중인 저에게···."
풀린 눈으로 힘없이 중얼거리는 이화에게 차지연의 씩씩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공주님의 기운을 북돋아 줄 계책을 찾았습니다!"
그 말에 이화가 불안감을 느꼈다.
"으음··· 친위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불안한데요···."
"공주님께 아직 1명의 전우가 남아있는거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이화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분 말씀하시는구나."
"알고 계셨군요! 바로 그분입니다! 소위 시절 공수지구대 3팀을 이끌던 팀장이 있었는데, 월남전 도중 소령으로 진급해서 본국으로 돌아왔죠. 지금은 서북방위사령부쪽에서 참모로 일하고 있다는데 만나뵙게 하면 큰 도움이 될겁니다!"
"근데 차 장군님은 그걸 어떻게 아신거죠?"
"공주님의 인사기록을 뒤져보다 찾은겁니다."
"흐음···."
이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친위대장님?"
"예, 비서실장님."
"공주님을 위해 노력해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그래도 선임을 만나게 하는건 좀 아니지 않나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그 시절 공주님은 소위였잖아요. 신입 장교였다구요. 군생활 하면서 얼마나 많은 갈굼을 당하셨을지 상상이 안되는데 얼굴만 봐도 겁에 질리지 않으실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게다가, 전임 팀장이었잖아요. 저라면 자기 전우를 모두 죽였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을 거에요."
차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닐겁니다."
"어째서요?"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니까요."
이화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 앉았다.
"전우라···."
"비서실장님은 군생활을 해본 적 없으시니 모르실겁니다. 전장에서 전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전장 안나가본 건 차지연 장군님도 같을텐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애초에 중령 전역으로 끝날 분이셨잖아요. 폐하 눈에 들어 대장까지 낙하산으로 승진했으면서."
그 말에 차지연이 뜨끔하여 몸서리쳤다.
"그, 그래도 중령까지는 제 실력으로 올라갔습니다!"
"장군님은요. 충성심. 딱 그거 하나만 보여주시면 돼요. 나머지는 저랑 중정부장이 알아서 할테니까."
"그래도 제 말씀을 한번만 더 들어주십시오! 군인에게 전우는 비서실장님이 생각하시는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흠···."
"분명 공주님께 도움이 될겁니다!"
차지연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의도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 있었다는걸. 하지만 그 주제의 당사자는 이미 서울에 와있었다는걸.
차지연이 비서실장실을 떠나고 한 10분이 지났을 때, 생각에 잠겨있던 이화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재필씨도 군인 출신이었지?"
그말에 대뜸 소파에서 일어나 중앙정보부로 전화를 거니 중정부장 김재필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중정입니다.]
"저에요."
[예, 비서실장님.]
"갑자기 생각나서 여쭤보는건데. 군인에게 전우란 어떤 관계죠?"
[음··· 뭐라고 해야할까···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켜주는사이.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럼 공주님과 김훈 소령은 어떻게 생각해요? 월남전 시절 선후배 사이였다던데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어째서죠?"
[그야, 자기의 옛 부하 11명을 잃은 후배 아닙니까? 김훈 소령 입장에서 공주님은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못난 후배일겁니다.]
"역시 그렇겠죠?
[그나저나, 지난번에 지시하셨던거. 아직 보고를 못 드렸습니다만.]
"예, 그것도 같이 말씀해주시죠."
[밖에 나가신 사이 부하를 시켜 보냈습니다. 비서실 직원에게 여쭤보시면 보고서가 와있을테니 한번 읽어보시지요.]
"고마워요."
30분뒤. 이화는 휴가 쓰는걸 완전히 포기하고 황제의 집무실로 달려가야 했다.
***
"그래서, 내게 해병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그렇습니다. 폐하."
이화의 물음에 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나?"
"황제 폐하께선 일제강점기 시절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 사관학교를 나오셨습니다. 이후 미국 해병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셔서 일본군과 싸우셨지요."
"그랬지."
"광복 이후론 군생활 경험을 살려 대한제국군 재건을 주도하셨고, 1950년 한국전쟁에선 직접 지휘관으로 참전해 전쟁터를 또 누비셨습니다."
"어째··· '또'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데?"
"예. '또' 입니다. 폐하께선 전쟁터를 두번 참전하신 참전용사십니다. 헌데 공주님과 비교했을 때 후유증이란게 안보이니까요."
"그야, 정신적 스트레스란건 사람마다 강도가 다르니까."
"그것 뿐인가요?"
"내게 전쟁은 영광의 연속이었지. 조국을 독립시키는 영웅적인 투쟁이었고, 분단된 조국을 합치는 투쟁의 과정이었으니까. 거기서 얻은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 인생의 성과야."
이화가 손에 들려있던 종이 봉투 속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 중정을 통해 미국 2차대전 참전 용사와 월남전 참전 용사를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2차대전의 성취감과 월남전의 성취감은 완전히 다르게 작용했죠."
"그래, 미국에서 월남전은 반전여론에 집어삼켜져 침략전쟁이라 손가락질 당한 명예롭지 못한 싸움이었으니까."
"그 외에 한가지 차이점이 더 있었습니다."
"어떤 차이점인가?"
"2차대전의 참전용사는 배를 타고 귀환했고, 월남전의 참전용사들은 비행기를 타고 귀환했습니다."
"비행기?"
"예. 그 이후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참전용사들의 삶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월남전의 참전 용사분들은··· 대부분이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범죄에 빠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죠."
"자네는 즉. 배와 비행기의 차이가 작용했을거라는 건가?"
"예."
"그래서 내게 듣고싶은건?"
"태평양을 누비던 뱃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걸 듣고싶습니다."
"흐음···."
이연은 천천이 눈을 감고 태평양전쟁 시절의 일들을 떠올린다. 어두컴컴한 망망대해 속에서 배를 타고 다니던 젊을적의 일들.
이연은 처음엔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백인들 사이에서 싸웠는데, 여러 섬들을 오가며 상륙작전에 뛰어들었다. 이름모를 섬과 바다에서 무수한 전우들이 쓰러지는걸 지켜보면서 사투를 벌였고, 그렇게 승리를 쟁취했을 때 잃어버린 전우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인게 수어번이었다.
그러다 다른 전장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다니면 기약없는 먼 뱃길 속에서 남아있는 전우들과 전쟁터에 있었던 일들, 먼저 떠난 전우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 집에 살아 돌아가면 뭘 할거고 어떻게 살아갈건지 그런 희망섞인 꿈들을 주고 받으며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빛을 감상하던 시간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연은 OSS라는 조직에 차출되었다. 대한제국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함께 조선땅에 사전 침투해 미국의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민간인 사이에 섞여들어가며 첩보전을 벌이고, 무수한 일본군을 암살하고, 지도를 그려가며 미국군에 건네줄 작전지도를 준비하는 일들.
그러다 미국군과 함께 조선땅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싸우던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엔 조선총독부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걸면서 전우들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시간들.
그런 일련의 일들을 이화에게 설명했을때 이화는 공포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 안색이 안좋은데?"
"폐하···."
"왜 그래? 이 실장 자네 답지 않게."
"공주님은 비행기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래, 내 딸. 편하게 오라고 황실 전용기를 보내어 데려왔지."
"그곳엔 전우가 없었습니다."
이화가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서의 비행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월남전의 미국 참전 용사들이 왜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을까요?
단순히 반전 여론 때문은 아닐겁니다. 거기에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죠.
전우들과 전장의 기억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시간이 턱없이 적었을겁니다. 비행기 속에서 수 많은 장병들이 우겨지듯 타서 죄인처럼 끌려왔겠죠.
돌아와선 침략자라고 자국민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죄책감 어린 시간들을 보냈을겁니다. 자기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어가며 싸우고 왔는데 누구도 반겨주지 않으니 슬프고 괴롭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겁니다. 전쟁은 국가 벌였는데 욕은 자기들이 먹으니까."
"......"
"공주님의 환경은 그보다 최악이었습니다. 전우도 없이 7시간을 혼자···."
그 말에 이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혼자가 아니지."
"11명의 전우 그리고 죄책감을 더 할 원죄 한 명까지···."
"이거 완전 날아다니는 장례식장이었겠구만. 자길 지키다 죽은 전우 11명의 납골함 사이에 앉아 7시간을 날아왔으니···."
"죄송합니다. 폐하."
“내가 딸래미 영혼을 저승길 삼도천에 던져놓은 셈이군···.”
이화가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이연도 마찬가지였다.
"내 딸 지금 어디에 있나?"
"방에 계실겁니다."
"당장 가지."
그렇게 두 사람이 공주 방에 찾아갔을 땐 저녁 8시였다. 방은 텅 비어있었다. 뒤에서 친위대장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공주가 실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