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Ep3. 애국자들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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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6일.
국회 상하원합동연설일 하루 전. 육군 부원수 경친왕이 서울에 도착했다. 국방부 청사에 헬기를 타고 나타난 그의 옆에는 주한미군사령관 도널드 V. 베넷 대장이 함께 하고 있었다.
경친왕 이열.
27만 대한제국 육군을 거느린 5성장군. 과거 북한의 수도였던 평양에 사령부를 틀고 이북지역 절반을 영향권으로 거느리고 있는 황제의 동생. 황위계승서열 1위. 혜조대제로 불리는 의친왕의 둘째아들.
북방의 강인한 추위로 단련된 키 185cm의 장신. 1922년생으로 5살 아래의 동생이라서 그런지 형과 하나도 닮지 않은 마적같이 생긴 남자. 경친왕 이열.
그의 눈앞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로 유명한 국방대신(국방부장관) 김신이 주한미대사 필립 스미스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부원수 각하."
국방대신의 깍듯한 인사에 만족한 경친왕 이열이 거친 손으로 악수하며 답했다.
"오랫만이오, 국방대신!"
김신은 쓴맛을 다셨다. 국방대신이면 대한제국 국군 전체를 총괄하는 내각의 장관. 군부 자체로만 따지면 경친왕보다 자신이 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황위계승서열 1위에 해당하는 황실의 남자. 이북지역의 절반을 군벌처럼 다스리고 있는 통제불가의 남자였기에 김구선생의 후손으로 백작위까지 하사받은 귀족 타이틀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다못해 주한미군사령관까지 저러고 있으니···.'
경친왕 옆에서 환하게 웃고있는 백인 남자도 껄끄러웠고, 자기 옆에서 경친왕과 악수하고 있는 백인 남자도 껄끄러웠다. 한 명은 주한미군사령관, 한 명은 주한미대사. 이 놈이고 저 놈이고 경친왕 옆에서 정치적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경친왕, 국방대신 김신, 주한미군사령관 도널드 베넷, 주한미대사 필립 스미스까지 4명이나 되는 고위급 인사가 리무진을 타고 덕수궁에 방문하니 비서실은 난리가 났다.
***
"허허허··· 주한미대사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집무실에서 덕수궁 밖을 바라보던 이연이 기가찬듯 웃어댔다.
"제가 보기에도 미국이 경친왕 뒷배 노릇을 하는 것 같군요."
이연 뒤에는 다부진 체격의 나이 지긋한 노인 한명이 정정히 서있었다. 내각총리대신 이범석. 세종대왕의 다섯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으로 황실의 먼 친척이었다.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대첩의 영웅으로 불리던 남자. 광복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며 이연의 황태자 시절부터 전우로 함께한 또 다른 영웅. 1960년 5월 16일 황제의 친위쿠데타를 진두지휘하며 제국을 반석위로 올린 개국공신.
간단히 요약하면. 이연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태극기를 꽃은 남자. 조선민족 영웅중의 영웅. 영웅왕이었다.
"녀석이 너무 컸어."
"혜조 대제(의친왕)께서 힘을 너무 많이 실어주고 가셨습니다."
"그 시절엔 인재 한명이라도 귀했던 때니까. 한국전쟁에서 이겨볼려면 황실이든 친일파든 다 긁어모아야 했지."
"전쟁도 끝났겠다. 나라가 안정을 찾은 지금. 하늘 아래 태양은 두개일 수 없으니 경친왕은 정리해야 맞겠지요. 친일파를 정리하셨듯 말입니다."
"정리를 하긴 해야하는데··· 미국이 저렇게 나와선 전쟁이고 암살이고 어렵겠군."
"중정을 시켜 뒷조사를 해보시지요. 비리든 뭐든 구실이라도 하나 나오면 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소용없네. 저 마적같이 생긴 놈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청렴결백하거든. 아들딸한테도 재산한푼 안 준 녀석이야. 사돈을 털어도 나오는 게 없으니 합법적인 방법으론 어렵겠지."
"그럼 역시 강행돌파입니까?"
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내 딸을 황태녀로 앉히는 거지. 그렇게 해서 녀석을 도발하면 빈틈이 생길지도 몰라."
***
대한제국 황제부터 총리, 국방대신, 미국대사, 주한미군사령관, 경친왕까지. 으리으리한 사람들이 모여 열린 덕수궁의 만찬은 3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겉보기론 웃음이 가득했고 덕담들이 오가면서 정치이야기는 1g조차 곁들여지지 않은 채로 그냥 어디서나 볼법한 만찬 자리였다.
하지만 눈빛엔 각자 이런 메시지들이 담겨 있었다.
'동생아, 하늘 아래 태양은 두개일 수 없단다.'
'형님의 뒤를 이을 사람은 오직 저 뿐입니다.'
'미국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폐하.'
가시방석 같은 자리 속에서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가 끼어 있었다. 이연의 외동딸이자 경친왕의 조카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대한제국 공주는 어마어마한 거물들 사이에 낑겨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우리 조카가 벌써 28세라니!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가, 감사합니다. 전하···."
"이제 곧 황태녀가 되실 몸인가?"
경친왕의 말에 은서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 그건···."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네 작은 아버지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 무서워할 거 없다! 하하하!"
만찬자리가 싸늘해지자 이연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헴헴. 밥먹는데 그런 이야기를···."
"거 참 형님도. 그래도 우리가 한 핏줄 아닙니까? 거 좀 쌀쌀맞게 대하지 마시고. 친하게 좀 지냅시다."
황실의 대화를 바라보는 이범석 총리의 눈에 은서가 보였다. 손을 파르르 떨고 있는 여린 소녀. 꾹꾹 참고 있지만 울먹이는게 훤히 보이는 몸짓. 대한제국 공주는 경친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주님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쯤에서 자리를 마치는 게 어떠신지요?"
이범석의 제안에 국방대신 김신이 거들었다.
"월남에서 돌아오신지 얼마 안되어 힘드신 줄 압니다. 공주님의 옥체가 걱정되오니 이쯤에서 자리를 옮기시는게···."
"아, 그런가? 우리 조카딸이 많이 피곤했나보구만! 말을 하지 그랬느냐?"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경친왕은 은서의 등을 사정없이 토닥여줬다. 넘어가던 밥이 입으로 튀어나와 은서가 사정없이 콜록거렸다.
덕수궁의 만찬은 이렇게 끝났다.
돌아가는 길, 주한미대사 필립 스미스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음 황위는 경친왕이 차지하겠군."
그 말에 주한미군사령관 도널드 베넷이 답했다.
"어쨌든 저희한텐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경친왕은 우리 영향력에 있으니까요."
"저 여자 오래 살긴 틀렸어."
필립 스미스는 고개를 돌려 은서를 바라보았다. 왼쪽엔 아버지 이연, 오른쪽엔 경친왕 이열. 양대 권력자 사이에 낑긴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공주였다.
***
식사가 끝난 뒤 이연이 향한 곳은 덕수궁 내에 위치한 중화전이었다. 수행원 몇 명을 동원한 채로 경친왕과 단둘이 나간 나들이의 끝에는 1층짜리 전각이 있었다. 동양식 목조 건축물로 용도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데 크기는 좀 더 작다.
"궁금한게 있습니다. 형님."
경친왕이 물었다.
"말해봐라."
"덕수궁 말입니다. 너무 작지 않습니까?"
경친왕이 중화전을 둘러보며 말한다. 그의 눈에 들어온 중화전의 모습은 퀘퀘한 먼지들이 쌓인 작은 별장. 그정도의 이미지밖에 없었다.
"작다니? 이만큼 크고 아름다운 궁전이 또 어디있느냐?"
"크다구요? 정전인 중화전조차 딸땅만해가지곤 천장에 용 두마리 있는거 빼면 그냥 별장 수준 아닙니까? 이정도 규모의 건축물은 중국의 제후들도 안 썼을겁니다."
경친왕의 불만에 이연이 미소지으며 물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덕수궁이 온전한 황궁도 아니지요. 일제강점기 시절에 무수히 많은 전각이 철거되지 않았습니까? 대한제국도 산업화 할만큼 했는데. 경제가 커졌으면 황궁도 좀 새로 지으십쇼."
이연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난 황궁같은거에 욕심 없다."
"자금성까진 아니어도 일본의 고쿄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일왕의 궁전 말하는 것이냐?"
"예, 정 아니면 경복궁이라도 복원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때가 어느땐데 아직도 조선총독부에 가져려져서는. 쯧쯧··· 폐하는 너무 실용적이십니다."
"실용적인게 좋지. 황궁 지을 돈으로 공장이랑 도로나 더 까는게 국가를 위한 선택이다."
"그놈의 경제, 경제. 정 경제가 신경쓰이면 시멘트회사들 돈이나 벌라는 뜻에서 현대식 황궁을 지으십쇼. 경복궁의 낡은 전각들 다 헐어버리고 시멘트로 으리으리한 궁전을 지으면 그게 바로 토목공사를 통한 경제 발전 아닙니까?"
"멍청한 녀석. 돈만 쓴다고 다 경제발전인 줄 아는구나."
"형님!"
이연이 경친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열아. 형으로써 진지하게 말하마. 일선에서 물러나거라."
"예?"
"한국전쟁에서 네가 보여준 용맹한 활약. 형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넌 정치에 어울리지 않아."
"정치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해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나조차도 정치를 배우는데 한참이 걸렸다. 내 정적이었던 이승만 박사 한 명 이기지 못해 10여 년을 허송세월했지. 1960년이 되어서야 부하들 추대로 권력을 틀어쥐었는데, 처음에 얼마나 힘들었는줄 아느냐?"
"형님."
"부와 명예. 네가 원하는건 모두 주마. 네 아들이랑 딸도 부족함 없이 챙겨줄테니 미국가서 살아."
이연의 말에 경친왕이 답한다.
"결국 은서에게 황위를 물려주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녀석은 내가 직접 가르치면서 키울 대한제국의 황태녀가 될거다."
"녀석이 저보다 나은게 뭡니까?"
"너보다 신중하고 똑똑하단거지. 어린 나이로 영어랑 프랑스어, 베트남어까지 떼고 월남전에서도 혈혈단신으로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전쟁은 저도 잘했습니다. 부족한 머리는 빌리면 되겠지요. 신중? 난세중의 난세. 서슬퍼런 냉전시대에 신중한 리더쉽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폐하처럼 강력한 리더쉽. 오직 그것이 가치를 갖는 시대 아닙니까?"
"열아."
"한국전쟁때 북괴군과 싸우며 형님과 제가 한 약속이 있었지요. 우리 아들딸에겐 강한 나라를 물려주자고. 두번 다시 외적에게 나라를 뺏기는 수모는 없게 해주자고. 그런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형님과 저같은 강력한 리더쉽의 지도자가 필요한겁니다."
"그래서 미국 애들이랑 붙어다니는거냐?"
"......"
경친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좀 더 몰아 붙이며 이연이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미국 대사를 만나고 다닌 이유. 나 때문만은 아니었을거다. 내가 니 속을 모를 것 같지?"
"형님이 뭘 안다고 그럽니까?"
"미국에게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아부떨고, 그렇게 황제가 되면 미국을 위해 이것저것 갖다 바칠 생각만 했겠지. 뭘 주겠다고 했냐? 미국 무기 더 사준다고 했냐? 전시작전권을 다시 갖다 바치기로 했냐? 또 뭐했냐? 일본이랑 군사동맹 맺어서 한미일 삼각동맹이라도 맺자고 했냐?"
경친왕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대한제국은··· 미국과 함께할 때 더욱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군대는 우리가 지휘해야지!"
"어차피 세계3차대전이 터지면 대한제국 단독으로 싸우진 않을 거 아닙니까? 이럴바엔 미군에게 전시작전권 넘겨버리고 한미연합사를 통해 통합된 지휘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거기에 일본놈은 왜 끼고 지랄이야!"
이연이 중화전을 쩌렁쩌렁 울릴 큰소리로 경친왕에게 소리쳤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법이니까요."
"우릴 식민 지배 한 놈들이야. 내가 독립운동할 때 넌 사관학교 다니고 있었지?"
"저도 일본을 미워하는 건 같습니다."
"미워한다는 놈이 일본놈들 재무장을 허용해주자고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아부를 떨어? 놈들은 전범국가야!"
"저랑 주한미군사령관의 대화는 비밀이었을텐데 마치 도청이라도 하신 것 마냥 훤이 꿰고 계시는군요."
"니가 생각하는게 뻔하지!"
경친왕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폐하는 이북지역의 분위기를 모르시지요? 저는 서북방위사령관이라 평양부터 신의주까지 그곳 사람들의 분위기를 훤히 꿰고 있습니다."
"말해봐. 니 거지 깽깽이 같은 소리. 얼마나 거창한지 들어나 보자."
"제가 생긴건 마적같이 생겨도 대한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제가 지키는 땅. 그곳에 사는 국민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단 말입니다.
형님! 이북지역의 국민들은 매일 같이 두려움에 떨며 삽니다. 압록강 너머 중국군이 수백만에 달하는데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죠."
"니가 공포를 심어준거겠지."
"아뇨, 그들의 공포가 먼저였습니다. 서북지역만 그런 줄 아십니까? 두만강쪽도 매한가지입니다. 강줄기 하나를 두고 대치를 벌이는데 거긴 백두산이 있잖습니까? 육로로 연결된 불분명한 국경을 두고 허구한날 충돌이 벌어지는게 대한제국의 안보 환경입니다."
경친왕은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며 호소했다.
"저도 일본이 싫습니다. 그 빌어먹을 쪽바리들 머리 위로 핵무기라도 던질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죠. 하지만, 대한제국 혼자의 힘으론 소련과 중공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일본놈이라도 무장시켜서 우리 땅에 데려오잔거냐?"
"예! 우리 혼자 놈들의 방패 노릇을 하느니 놈들까지 데려와서 함께 싸우는 게 나을겁니다. 어차피 세계3차대전이 터졌을 때 대한제국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일본일테니까요. 어차피 이렇게 된거 놈들의 피도 함께 흘리게 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면 미국, 한국, 일본, 대만. 이렇게 4개국이 군사동맹을 맺어 안보라인을 형성하는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그걸 국민들이 동의해줄 성 싶으냐?"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이 될겁니다. 민의가 필요없는 황제의 나라. 설득은 하면 되고 반대는 짓밟으면 됩니다."
"역시 넌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어선 안돼."
"형님도 대한제국을 전제군주제로 바꾸려 하시잖습니까?"
"난 국민을 위해서다."
"전 조국을 위해서입니다. 덕수궁이랑 중앙청을 내버려둘 실용주의면 외교도 좀 실용적으로 하시죠."
그 말을 끝으로 경친왕은 등을 돌려 중화전을 빠져나갔다. 천천히 멀어지는 마적같은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연이 물었다.
"어떤가?"
중화전 한켠에 숨어있던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가 걸어나와 말했다.
"경친왕 전하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국경에 발생하는 충돌 그로인한 이북 주민들의 불안감. 모두 사실이니까요."
"그렇다고 조선땅에 주한일본군을 주둔시키는 건 무리수가 아닌가?"
"상호방위조약만 체결해도 될겁니다."
"그렇다면 이참에 녀석을 우리 계획에 포함시키는 건 어때?"
이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려울겁니다. 뼈속 깊은 친미주의자라 저희 계획을 고스란히 불어버릴겁니다."
"그럼 역시 죽여야겠군."
"종착지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다르니 어쩔 수 없겠죠."
이연은 품에 있는 흑색 리볼버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