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Ep3. 애국자들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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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전이라도 치르실 셈입니까?"
황제의 집무실에서 채명진 장군이 물었다.
"내가 이길건데 뭘 걱정하겠나?"
집무실 책상에 기대어 12년산 시바스 리갈 위스키를 마시는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친왕 전하는 서북방위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압록강 방위를 책임지는 5성 장군입니다. 그런 경친왕 전하 밑에 보병사단만 12개고 총병력이 27만에 달하는데, 정말로 내전을 벌이셨다간 자칫 1950년 한국전쟁꼴이 반복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럴일은 없을거야."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이연이 말했다.
"서북방위사령부의 병력 대부분은 압록강에 집중되어있거든. 강줄기 하나를 두고 중공과 대치중인데, 냉전시대 최전선인 서북지역에서 병력을 빼온다는건 불가능에 가까워. 주한미군사령관도 경친왕이 숙청됐으면 됐지 그런 일은 동의하지 않을테고 말이야."
"허면···."
"어차피 중앙정보부 선에서 정리될거야. 경친왕이 정리되면 그 자리를 자네에게 주지. 압록강부터 평양까지 서북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총사령관이 되어 황태녀가 될 내 딸을 지켜줬으면 하네."
채명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이연에게 물었다.
"정말 공주님을 황태녀로 삼으실 것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닌가? 부모처럼 살뜰히 대해준것도, 공을 세울 수 있게 작전을 몰아준 것도 모두 그런 의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전 몰랐습니다."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는군. 중장."
"모르는것이 그분과의 약속이었으니까요."
이연이 피식 웃으며 위스키를 마셨다.
"내 딸이 양아버지가 되어달라 했다지?"
"죄송합니다. 폐하."
채명진은 이은서 대위의 친아버지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냥 친아버지도 아닌 대한제국의 황제. 생각해보면 '양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은 것부터가 반역죄가 될지도 몰라 노심초사하고 말았다.
중년의 나이가 된 한국전쟁의 영웅. 이제는 월남전의 영웅으로 불리게 될 채명진 장군이 자기 앞에서 그러는 모습을 보니 이연은 미안한 느낌이 반, 흥미가 반이 되어 아끼던 12년산 위스키를 채명진 장군에게 따라주었다.
"고맙단 말을 하고 싶은거야. 3년동안 신경쓰지 못한 내 딸을 대신해서 키워준 셈이니까. 아비된 자로서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채명진 장군은 황제가 따라준 위스키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높은 도수의 위스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맛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술이 위스키건 막걸리건 대한제국의 황제가 권하는 술은 모두 어사주니까. 군주가 하사하는 술은 무조건 맛있어야 했다. 그래서 채명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황제의 위스키를 꾸역꾸역 받아 마시고 말았다.
“다시 권하지. 서북방위사령관이 되어 군부를 장악해주게. 그 힘으로 나와 내 딸의 권력을 지키는 군부의 실세가 된다면, 자네는 내 딸의 양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가 되는거야. 어때?”
"......"
중장은 한참을 고민하다 각오를 다져 말했다.
"저는 사직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연이 놀라 물었다.
"사직하겠다고?"
"군인은 정치를 해선 안됩니다.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도 안되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이연이 비웃는 투로 채명진에게 말했다.
"1960년 5월 16일. 자네는 내가 주도한 친위쿠데타에 참가했었지. 그럴 땐 언제고 이제와서 양심적인 군인인 척 하는건가?"
"......"
“우린 혁명 동지야. 부패하고 무능한 내각을 몰아내고, 조국 근대화를 달성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뭉쳤지. 그 의지는 어디가고 이제와서 다른 소리를 하다니. 월남에 있는 동안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건가?”
"폐하, 저는 월남이 패배할거라 생각합니다."
이연이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휴전한지 몇일 되지도 않았는데?"
"저는 월남에서 싸우는 7년이란 시간동안 최선을 다했습니다. 월남의 자유 정부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이자 임무로 삼으며 백방으로 노력했지요."
"백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자네의 그 대의가 마음에 들어 7년 내내 사령관을 맡겼어. 자네가 아니라면 그 대의는 지켜지지 못했을 거 같거든."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노력한 7년이 월남 사람들의 자유를 지키는데 최선의 노력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근데 질거 같다고?"
"거기서 보았습니다. 월남은 군부가 장악하고 있지요.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쿠데타로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부패하고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정부 부터가 국민을 괴롭게 하는데 어찌 전쟁에서 이기겠습니까? 월남 정부는 스스로 무너질겁니다.”
"채명진 중장!"
이연이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자네의 그 말이 나를 향하는 것으로 들리는데?"
"폐하는 영웅이십니다. 정치도 전쟁도 모든 면에서 완전 무결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셨지요."
"근데 어째서?"
"폐하 다음에 공주님이 즉위하시고, 공주님 다음에 그분의 아드님 혹은 따님이 즉위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채명진 중장의 말을 기다렸다.
"공주님과 공주님의 자손은 폐하와 다를겁니다. 정치적인 능력이 폐하만 못한 그분들이 비대해진 군부 속에서 바른 정치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안계시는 대한제국 군부가 폭주를 거듭해 황실을 집어삼키면, 대한제국은 고려시대 무신정권꼴이 나는겁니다."
채명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오니 폐하. 군대를 더는 정치에 끌어오지 마시옵소서. 군대는 오로지 나라를 지키게 두시고, 전장의 군인들은 국가 밖의 적만 바라보도록 힘을 써주시옵소서. 군부는 나눠놓고 견제해둬야 폭주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려면 서북방위사령부도 쪼개거나 견제하는 게 맞습니다. 친위대도 지금보다 규모를 줄이셔야 할테구요."
"채장군···."
"저는 폐하가 없는 대한제국군의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나이다."
머리를 조아리는 채명진 장군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말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법이야. 군부가 받쳐주지 않으면 절대권력도 불가능한 것이지."
"정치는 순수한 정치인으로서 하시는 게 맞습니다. 경친왕 전하의 일은 법과 제도로 해결하심이 맞고, 그렇지 않고 군의 힘을 빌렸다간 안좋은 선례로 남아 두고두고 반복될 것입니다."
"싫다고 하면?"
"저는 이 자리에서 사직하겠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경친왕만 정리하고 자네 말을 따르겠다면? 그것도 안되는건가?"
"그렇게 하셔도 제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연은 무릎꿇은 채명진 장군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마음으론 이해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고. 절대권력을 가진 대한제국 황제 앞에서도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충신.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이야말로 나라에 필요한 진짜 인재라고 마음속의 이연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속의 이연은 다른 생각을 한다.
'이 나라는 아직 나의 절대권력을 필요로 한다.'
절대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니까.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물리적인 힘.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군부의 충성. 역사적으로 볼 때 군부의 힘이 수반되지 않은 절대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채명진 장군의 충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네 말처럼 나는 전쟁도 정치도 완전무결하게 해낼 수 있는 영웅 그 자체지."
"폐하는 일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명군이십니다."
"그러니 더더욱 절대권력을 포기할 수 없어. 완전한 영웅이 완전한 권력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 그것 또한 일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회니까. 난 월남과 다를거야. 약속하지."
"폐하!"
"아무래도 우리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것 같군."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자네를 스웨덴 대사로 보내겠네."
"폐하···."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 채명진은 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인 피로'이라는 이유로 전역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대화가 끝났을 때 쯤 덕수궁을 걸어나가는 채명진의 뒤로 공주가 달려온다.
"장군님!!!"
곱게 차려입은 한복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이은서 대위가 멀리서 아른거렸다.
'은서야···.'
그렇게 속으로 말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는 월남전의 이은서 대위가 아닌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로서 존재하고 있으니까. 황실의 여인인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순 없었다.
"장군님!"
"공주님!"
달려온 은서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친위대 애들한테 들었어요. 전역이라뇨? 잘못 들은거죠? 월남에서 공을 세우신 장군님이 왜 전역이에요? 대장 진급하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진급하고 전역하는겁니다. 공주님."
"그래도 스웨덴 대사라니 이건 귀양보내는 거랑 다를게 없잖아요!"
"허허··· 그리 말씀하시면 외무대신이 섭섭해하시겠습니다. 나라의 대표로 나가는 일을 귀양이라니요."
은서는 한발짝 더 걸어가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분의 품에 딸처럼 안겨있고 싶었다. 하지만 채명진의 손이 더 빨라 그녀의 걸음을 저지하고 만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양아버지가 되어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폐하께서 엄연히 계시온데 이러시면···."
"장군님···."
은서가 울음을 터트렸다. 3년동안 아버지처럼 따른 장군님을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그것은 자신의 친아버지인 대한제국 황제 이연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딸의 눈물이었다.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채명진 장군이 말했다.
"3년동안 공주님과 함께 월남땅을 누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 기억 소중히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십시오."
"못해요. 절대!"
"공주님···."
"장군님이 계시면 뭐든지 할게요. 황태녀가 되든 경친왕 전하와 싸우든. 장군님이 하라 하시면 뭐든지 할테니까···."
그 말에 채명진이 단호히 말했다.
"안됩니다. 공주님."
"장군님!"
"전쟁은 군인이 해야하지만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합니다. 저는 옳은 군인의 길에 대해선 알려드릴 수 있지만, 공주님의 진로에 대해선 조언을 드릴 수 없는겁니다."
"장군님···."
채명진은 활짝 미소지으며 은서에게 말했다.
"스웨덴에 가서 쉬고 오겠습니다. 편지도 꼬박꼬박 부칠테니 심려치 마십시오."
"장군님···."
결국 채명진 장군은 대한제국 공주인 이은서 대위를 품에 안은채 한참을 토닥이며 위로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10분을 끌어안고 있어서야 채명진은 겨우겨우 덕수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 은서는 한참을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마치 아버지라도 죽은 것 같은 슬픈 눈물이었다.
이연은 창문을 걸어잠근 채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