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Ep3. 애국자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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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3일.
D-Day.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가 몇 달동안 서류더미 속에서 과로를 해온 이유. 황제를 대신하여 국방부와 함께 준비해 온 이날의 행사.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개선식.
하늘을 날아다니는 헬기 위에서 황제가 말했다.
"멋지구만. 이 실장이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폐하."
"이틀정도 휴가를 줄테니 푹 쉬었다 와."
그 말에 이화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 없으면 업무가 모두 폐하께 쏠릴겁니다."
"쏠려도 어쩔 수 없잖나? 자네와 한 소중한 약속인데."
지상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그렇게 답한다. 그의 눈엔 꽃가루가 휘날리는 서울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게 이화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행사를 주관하는 경찰들의 통제 속에 참전용사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하면, 오색빛깔 예쁜 꽃가루가 장병들 머리위로 눈처럼 휘날려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중년 이상의 어른들은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그들의 어린시절 서울은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는 식민지 신세였다. 그곳을 행진하던 고압적인 일본군의 모습은 조선 사회 전체가 갖고 있는 민족 단위의 트라우마였다.
이화는 그런 모두를 위해 개선식이라는 기회를 빌려 행사를 준비했다. 꽃가루가 휘날리는 예쁜 서울 도심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강건한 조국의 군대가 행진하니, 기억 속 트라우마와 눈에 보이는 풍경이 선명히 대비되었다.
독립된 조선에 태어나 자유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저마다 꽃목걸이를 만들어와 지나가는 군인들 목에 걸어주었고, 들뜬 마음에 포옹해주는 젊은 여학생의 모습에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니 지켜보는 부모세대 입장에선 감동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이제 전쟁을 끝낼 차례다.
서울운동장에 모인 장병들은 무사 귀환을 황제에게 보고했고, 총사령관인 채명진 중장 손으로 월남원정군 총사령부의 깃발이 반납되니 8만 5천 장병의 지휘권이 다시 황제에게 돌아왔다.
이연은 이 행사에서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몸 건강히 돌아와서 기쁘다. 그대들이 있어서 지금의 대한제국이 있다. 자유 월남 정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너희 모두가 이 땅의 새로운 영웅이라고 그런식으로 짧고 강렬하게 말하며 행사를 마쳤다.
짧은 행사 뒤로 이어지는 가족과 장병들의 만남 행사는 그동안의 노력을 모두 씻어낼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품에서 서럽게 우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 모두를 기쁘게하고 한편으론 슬프게 했다.
대한제국의 월남전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대한제국 공주를 간호장교로 오인하고 있었고 월남에서 돌아와 국민 앞에 나타날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유관순의 후예'라며 연신 주목받았던 최초의 여성특전사 이은서 대위의 부재가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중앙정보부의 검열을 받아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았고, 궁금증은 암암리에 증폭되고 있었다.
'두 여자'는 어디로 갔는가?
황실과 군부의 무거운 침묵 속에 사람들은 대한제국이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
그 시각 은서는 덕수궁의 자기 방에 틀어박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은서 대위 혹은 대한제국의 공주 이은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월남전의 영웅이 서울운동장에도 나가질 않고, 시가행진에도 나가질 않아 비서진들 속을 까맣게 태웠다.
"공주님."
은서는 진혁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아버지와 불꽃튀는 대화가 있은 뒤로 온 정신을 거문고 연주에 쏟아부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건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공주님,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됐다."
이연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딸이 연주하는 거문고 연주를 감상했다. 불안, 분노, 고뇌. 그런 일말의 감정들이 섞여있는 듯 빠르고 거친 연주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녀석, 고민이 생기면 항상 이랬거든."
"......"
"얘가 왜 거문고를 배웠는 줄 아느냐?"
"태후마마께 배우셨다 들었습니다."
진혁은 얼마 전 경회루에서 들었던 기억을 되짚으며 그대로 폐하께 올렸다.
"알려달라 한참을 졸랐지. 조선의 공주면 조선의 가락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거문고랑 가야금, 서예, 자수까지 배워놓곤 나한테 시집을 보내달라 하더구나. 다른 데도 아니고 영국 왕실로."
진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황제에게 물었다.
"영국 왕실이라면 설마?"
"그래,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남 찰스 왕세자가 48년생, 46년생인 은서와 비슷한 또래라 이론상으론 가능했지."
"정말로 혼사가 오간겁니까?"
진혁의 물음에 이연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이론상이라고 했잖냐? 콧대높은 영국 왕실이 동양 촌구석 조선 공주를 쳐다봐줄리 없지."
이연이 딱한 표정으로 은서를 바라본다.
"그래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어. 누구든지 자기랑 결혼할 왕자님이 있을거라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며 필사적으로 배운거야."
그 말에 진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폐하. 유럽쪽 왕가에 들려주겠다면 거문고보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가 낫지 않을런지요?"
"그래, 정말 바보같은 논리였지. 오케스트라에 익숙한 서양 왕실이 거문고에 무슨 감동을 느낀다고."
"......"
"저 녀석이 영어를 배우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야. 정작 아비인 나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이연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짓는다.
“꿈이란 거겠지.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살며 백마탄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거. 이 애비는 그런 것조차 해줄 수 없는 무능한 황제였어.”
“폐하···.”
이연의 손엔 훈장이 들려 있었다. 새하얀 리본에 붉은줄이 새겨진 무공훈장은 '자응장'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은서가 받을건 1등급에 해당하는 최고 등급이었다.
"은서야."
이연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방으로 들어간다. 코앞까지 다다랐음에도 거문고 연주를 멈추지 않아 다시한번 불러야 했다.
"이은서!"
그제서야 거문고 연주가 멈춘다. 은서는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비서실장에게 못 들었어? 아버지가 내 방 문턱을 넘는 날엔 자결을 하겠다고 경고했는데."
"그게 애비한테 할 소리냐?"
"뭐하러 온거야?"
이연이 훈장을 건네며 말했다.
"네 훈장이다. 행사에 빠지는 바람에 못 받았잖느냐?"
은서는 훈장이란 말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잘한 것도 없는데 무슨 빌어먹을 훈장이야?"
"네 훈장이다. 네 실력으로 따낸 피와 땀이 서린 훈장. 아비 도움은 1g도 없는 순수한 너의 것이지."
"......"
“난 너한테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다. 왜? 떳떳하게 네 손으로 쟁취했으면 했으니까. 그래서 이건 받아도 돼.”
이연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곤 훈장 하나를 더 꺼내어 은서에게 보여줬다. 붉은 리본과 푸른 리본이 조화롭게 섞인 태극장이었다.
“3년동안 고생하지 않았느냐? 그럼 보상을 받아야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살아돌아와놓고 이러고 있으면 어찌하느냐?”
훈장을 달아주려는 아버지의 손길, 거부하는 딸의 몸짓. 덕수궁의 쓸쓸한 황궁에서 아버지와 딸은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먼 심리적 거리가 있었다.
"그럼 이거라도 달아라."
이연이 건넨 마지막 훈장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대한제국의 최고 등급 훈장. 대훈위 금척대수장이었다.
"황실의 직계만이 달 수 있는 훈장이다. 내 딸인 너라면 기본적으로 달고 다닐 수 있는 그런 물건이지."
"알고 있어."
"너도 알겠지만 이건 황실을 제외하면 정말 극소수만 달 수 있다.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극소수. 정말 극소수의 영웅들만 허락되는거지.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이시영 선생, 여운형 선생, 안중근 장군이나 윤봉길 의사. 안창호 선생과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 등. 영웅 중의 영웅이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 최고의 등급의 훈장.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공로를 인정하여 황실의 권위를 하사한다는 의미를 가진 명예로운 훈장이다."
"그걸 나보고 달라고?"
"넌 대한제국의 황태녀가 될 몸이니까."
"안한다고 했잖아!"
"황태녀가 아니더라도 넌 공주다."
"날더러 그분들과 동급이 되라고? 내가 뭘 했는데? 황실이면 다 그분들이랑 동급이 될 수 있는거야?"
"황실의 일원이니 다는 것이고, 그분들이 특별했기 때문에 허락되는 것이다. 앞뒤가 바뀌었잖느냐?"
은서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는 딸의 모습이 아버지의 눈에 가엾게 느껴졌다.
"우리가 왜 이런 훈장을 다는줄 아느냐?"
"고귀한 핏줄이니까."
"그래, 고귀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이 훈장은 더더욱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되지. 이걸 다는 순간 황실의 권위와 동등해진다는 뜻이니까."
이연은 은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걸 다는 순간 사람들이 수근댈거다. 저분 가슴에 황제 폐하의 것과 동등한 것이 달려있다고. 저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면 황제 폐하와 같은 것을 달고 계실까? 역사를 잊고 민족을 잊고 살아도 황제의 권위를 아는 자라면 이 훈장을 보면서 그들의 위상을 알게 되겠지. 그래서 우린 이 훈장을 달아야 돼. 훈장의 가치를 높여줘야 하니까."
"내가 달면 훈장에 얼룩이 질거야. 왜 저런 애가 이런걸 달고 있냐면서."
"......"
은서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고귀하지 않아. 11명의 부하를 사지로 이끌었다고. 부하를 모두 잃은 지휘관이 뭐가 고귀해?"
"......"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말했다.
"날 좀 내버려둬. 가만히 이러고 있는것도 죄책감 들어서 미칠 거 같으니까. 제발···."
"그래, 미칠 거 같다면 할 수 없지."
아버지는 굳은 각오로 일어나 딸에게 말했다.
"평생동안 거문고나 치며 살고 싶다면 그래. 그렇게 해. 돈이고 집이고 뭐든지 줄 테니까 평생 그것만 치면서 살아.”
울먹이며 미소짓는 딸의 얼굴에 희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걸 포기해버린 폐인의 웃음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계획을 솔직히 말해야 했다. 그걸 위해서 온거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딸을 끌고가고 싶으니까.
그래서 이연은 말했다.
“그래도 한가지는 알아둬라. 네가 황태녀가 되지 않아도 경친왕은 내 손에 죽을거다.”
"아버지, 제발!"
“경친왕이 꿈꾸는 대한제국과 내가 꿈꾸는 대한제국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니까. 하늘 아래 태양은 두개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와 니 작은 애비는 싸울 수밖에 없다.”
“제발···.”
이연은 자기 딸의 손에 3개의 훈장을 쥐여주며 말했다.
“니 애비는 싸울거고 이길거다.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라면 그대로 따라오는게 너한테도 좋을거야. 3월 7일에 국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이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황태녀가 되겠다고 밝혀라. 그렇게만 해주면... 니 애비가 모든걸 책임져주마.”
은서는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