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17화 (17/131)

〈 17화 〉 Ep2. 소년 이야기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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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어디 좀 가자!"

다음날 아침 10시의 일이었다. 씩씩하게 아침 수라를 챙겨먹고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소녀가 진혁의 손을 꼭잡고 나들이를 나가니, 마치 데이트를 앞두고 들뜬 어린 소녀의 모습 같았다.

"어딜 가자는 겁니까?"

"잔말말고 따라와봐!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았으니까!"

행복에 젖은 환한 미소로 은서가 데려온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대한제국 내각이 정부청사로 사용하는 중앙청.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로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다.

"중앙청? 정치라도 하실려구요?"

"아니, 여기 말고 뒤에!"

그렇게 한복차림의 소녀는 다시한번 씩씩한 걸음으로 중앙청 뒤로 돌아 나가니 그곳에 나무로 지은 조선왕조 시절의 전통 궁궐이 숨어있었다.

"경복궁?"

"응! 경복궁!"

"여기 오자고 한복 차림으로 오신겁니까?"

"응!"

은서가 말했던 행복이란 일단은 고궁 나들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궁'으로 표현하고 있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45년 광복 이래로 대한제국 황실은 경복궁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대접은 받지만 민간에 개방한 것도 아니며, 황실 고유의 재산으로 '별장'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어 사실상 버려진 상태에 가까웠다.

문화재 관리를 맡은 내각의 담당자가 직원 10명 정도를 파견해 관리하고 있지만, 황실이래봐야 혜조 대제(의친왕) 밑으로 남은 직계 혈통은 몇 안되기 때문에 별장으로 사용할 주인도 마땅치 않은 상태. 경복궁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궁궐치곤 너무 작지?"

"그야,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훼손을 당했으니까요."

"하지만 조선 왕조의 숨결은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어."

"그 조선 왕조의 공주님이 제 눈앞에 계십니다. 그래서 여기 오신 이유가···."

"데이트하러."

"네?"

뒤에서 거문고를 든 비서진 3명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

조선의 공주님이 말했던 데이트란 이랬다.

경복궁의 넓은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회루에 앉아 일방적으로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는 것. 한복차림의 28세 소녀가 양복을 차려입은 또래 남자아이를 앉혀놓고 열심히 거문고의 가락 소리를 들려주니 데이트보단 연주회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 시대에서 28세 소녀가 연주하기엔 대단히 낮선 옛날 악기였지만, 조선의 공주여서 그런지 거문고를 연주하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 연주 잘하지?"

"이런건 어디서 배우신겁니까?"

"우리 할머니한테!"

"황태후 마마 말씀이십니까?"

"응!"

은서가 말하는 황태후마마란 의친왕비 김씨. 대한제국 황제 이연의 어머니였다.

의친왕과 혼인하여 궁에 들어왔고, 그를 따라 러시아와 미국땅에서 망명정부 생활을 떠돌 당시 손수 밥을 지어가며 독립운동가들을 배불리 먹인 것으로 유명했다. 슬하에 아들이 둘 있으니 장남 이연과 차남 이열이다. 둘 외에 의친왕이 둔 자녀는 없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을 때 황후의 신분이 되었고, 1955년엔 황태후 신분이 되었으며 1964년 세상을 떠나니 정계의 거물이 된 독립운동가들이 어머니가 떠난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거문고를 연주할 줄 아셨습니까?"

"전통문화를 보전하는게 평생의 숙원사업이셨거든!"

은서가 연주하는 거문고 산조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진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거문고를 연주하는 조선의 공주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황홀감에 젖어들고 말았다.

'정말 공주님이셨어···.'

거문고 산조 연주가 끝나갈 때 쯤 은서가 진혁을 보며 말했다.

"어젯 밤에 네 품에 안긴 이후로 밤잠을 설쳤어. 부끄럽지만 남자품에 안겨본건 부모님까지 통틀어도 네가 처음이었거든."

"설마, 그건 아니겠죠."

"진짜야. 우리 아버지 나 태어났을 땐 대한제국 살려내느라 바쁘셨고, 그 다음엔 한국전쟁으로 바쁘셨어. 그 이후로도 쭈욱 바쁘셔서 나 같은건 쳐다도 안 봤단 말야.”

은서가 헛기침을 하며 재차 강조했다.

"그러니까. 그게 내 첫 경험이었다고."

진혁이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쳤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고마웠어. 그때."

은서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진혁에게 말했다.

"나랑 사귀어보지 않을래?"

은서는 거문고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하게 펼쳐진 한복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여 꽃이 휘날리는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참아내는 진혁에게 한걸음씩 다가가며 은서는 말했다.

"너한테 반한거야. 조선의 공주가."

"공주님···."

"못 믿겠지만 지금 내 마음은 진심이야."

진혁이 조심스레 뒷걸음질치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자에게 한 번 안겨봤다고 반해버리는 여자가 세상에 존재할리가···."

"그냥 안아준 게 아니잖아. 공포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죽일뻔한 나를 구원해준거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또다른 죄책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겠지."

은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3년의 전쟁으로 미쳐버린 나를 말려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런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포옹이었다 해주면 안될까?"

"그래도 이건 너무···."

“왜? 너무 갑작스러워? 갑작스러운 전개면 어때? 삼류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로맨스면 나쁜가? 여성으로선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한 심리적 변화면 그게 내 잘못이야?"

"그런 말이 아니라···."

"내 눈에 이 남자가 정말 멋지고 든든했는데!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안정감을 찾은 그 때의 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그게 너무 편안하고 안심이 되어 이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는데! 이게... 내 잘못인거야?"

"공주님···."

은서가 눈물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서웠어. 잠자다가 창밖에서 펑! 하고 소리가 들리는데 포탄 소리 같았다고. 북한 놈들이랑 싸울 때 폭격을 당하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데 내 손에 들려있는 무기는 하나도 없는거야. 너무 무섭잖아!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은서가 눈물을 지으며 진혁에게 호소했다.

"그런데 그 때 니가 나를 안아주며 말해준거야. 여기에 적은 없다고. 내가 지켜주겠다고. 내 눈을 가려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알아?"

은서는 남쪽을 가리키며 진혁에게 말했다. 그 손의 끝에는 분명 덕수궁이 있었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놈이 날 군대에 보냈어. 사관학교에 던져져서 교관들 손에 뚜드려 맞으며 4년을 보냈고, 월남전에 던져져 3년을 보냈어. 그러다 1년을 미친년처럼 보냈는데 지금 내 나이가 몇이야? 28이야. 남들은 다 결혼하고 자식까지 가졌을 나이라고. 지금 시대에선."

"공주님···."

"그래서 내가 찾은 행복은 이런거야. 너랑 같이 여자 대 남자로 사랑을 나눠보는거."

은서는 눈물섞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옷고름을 매만졌다.

"여기서 템포를 올려도 돼. 이왕 급진적인 거 끝까지 한번 달려보는거야."

반쯤 풀린 눈동자로 입술을 탐하려는 은서에게 진혁이 외쳤다.

"공주님!!!"

쿵쾅거리는 속마음을 어거지로 진정시키며 진혁이 말했다.

"이건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넌 나 안 사랑해? 안 사랑하면 왜 이렇게 잘 해주는거야?"

"공주님을 지키는 게 황제 폐하의 명령이니까요."

"내 마음도 지켜주면 안돼?"

"공주님!"

"너한테 안겼던 날 심장소리를 들었어. 그런데 넌··· 날 안 사랑한다고? 심장이 그렇게 뛰었는데?"

“가슴이 뛰는거랑 사귀는 건 다르잖습니까?”

"어째서? 우리 둘의 신분 차이 때문에? 공주랑 평민이니까? 그딴건 필요 없잖아. 그냥 우리 둘이 손잡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안되는거야?"

"동화속 주인공의 사랑에도 기승전결이란게 있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이 어느 여자가 남자 품에 한번 안겨봤다고 입술까지 탐합니까?"

"......"

"반하고, 사랑해도, 동화속 주인공들처럼 모든걸 던져버리고 사랑을 찾아 뛰쳐나간다해도 과정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

"저흰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2층짜리 경회루에 앉혀놓고 일방적으로 거문고를 연주해주는데 이게 어딜봐서 데이트입니까? 저는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

"공주님이 저에 대해 아는게 하나라도 있으신가요? 취미는 뭔지, 내가 좋아하는 게 뭐고 싫어하는 건 뭔지. 그런것도 하나도 모르시면서!"

"사귀고나서 알아가면 안돼?"

"그런것도 모르는데 저를 어떻게 사랑하시죠? 이름 석자 알고, 11년전 기억으로 싫어했고, 학교 폭력으로 고생하다 자살까지 할 뻔했었고. 이거 말고 저에 대해 아시는 게 뭐냐구요."

은서가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네가 우리 아버지의 수족이라는 것."

"네?"

"나를 위해서 아버지가 키운 사람이라는 것."

은서가 눈물을 거두며 담담히 말했다.

"뻔한거 아냐? 사위 삼으려고 내 옆에 붙여놓은 키워진 엘리트."

"그게 무슨···."

"의도적으로 접근한거라 생각했어. 근데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는 게 보이니까. 그래서 그냥 얘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로 한건데."

"예?"

"됐어. 이 고자야."

은서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외쳤다.

"아버지! 밑에 있지? 당장 나와!!!"

그러자 경회루 1층에서 한 남자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품속에 권총을 지닌 검은 양복의 사내. 대한제국 황제 이연이 그곳에 있었다.

"황제폐하?"

진혁이 놀라며 황제를 입에 담았다. 그의 눈앞에 그가 있었고 그의 뒤에는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가 있었으며 그 밑으론 아마도 친위대가 있었을 것이다. 은서조차 예상하던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젠 용서해줄 맘이 들은 것이냐?"

"집어 치우고, 당신이 말해봐. 이 녀석 나랑 결혼시킬려고 붙인거지? 11년 전부터 사위로 키운 남자애!"

이연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위감은 맞다."

"어째서 저같이 미천한 녀석을···."

그 말엔 은서가 답했다.

"보나마나지. 나랑 얘를 혼인시킨 다음 둘 사이에 남자애가 태어나면 황태자로 만들려는 거잖아."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왜? 대한제국은 남자만 황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그게 조선왕조 500년 전통의 계승법이니까."

"네 말대로 남자만 황제가 될 수 있다. 그건 유교적 관습으로 내려오는 적장자라는 개념이지. 정실부인의 장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맞아. 그것 때문에 여자인 난 당신의 후계자가 될 수 없어. 그러니 나한테서 아들을 얻어 황태자로 만들 속셈인거잖아."

"근데 하나 착각을 하는구나. 이 나라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자손이 태어나면 남자 성씨를 따라간다. 이은서와 김진혁이 결혼하면 그 사이에 태어나는 남자는 김씨가 되는데 어찌 황제가 되느냐?”

"성씨 따윈 갈아치우면 되는 거잖아. 진혁이 부모님은 아무 뒷배도 없는 무권력자니까. 황제가 자기 성씨 붙이겠다는데 어떻게 막겠어?"

"......"

둘간의 다툼에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재밌다는 듯 즐기고 있는 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은서에게 답했다.

"넌 정말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결혼할게 얘랑. 나 얘가 진심으로 좋아졌어. 내가 졌으니까 그만하자 우리."

"내가 고른 사윗감이랑 결혼해준다는 건 고맙지만 오해는 풀고 가야겠다."

"오해는 무슨 얼어죽을 오해야?"

"네 말대로면 나는 11년 전부터 정치적인 목적으로 진혁군을 끌어들인 것이고, 내 딸을 황태자 생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약점을 잡아 어거지로 결혼시킨다는 건데 이걸 어떻게 넘어가겠느냐?"

"다 명명백백한 진실이네. 당신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니 애비를 그만 좀 괴롭히거라."

이연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진혁아."

"예··· 폐하."

“넌 내 수족이다. 수족으로 삼은게 먼저고 사위로 생각한게 두번째니 사위가 되든 말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

“......”

그렇게 말하곤 자기 딸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넌 나의 세종이 될것이다."

은서는 그 말뜻을 이해하는데 3분 47초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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