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Ep2. 소년 이야기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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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십시오."
덕수궁의 비서실장 집무실이었다.
이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끝도 모르고 쌓인 서류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진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로만 대답하고 있다.
"보다시피 바쁜 몸인데요?"
"폐하께는 안 간다 그러시고, 마음의 병이라도 치유해드리자니 저는 여인의 마음을 모릅니다. 군인이니까요."
"저라고 알까요?"
"그래도 똑같은 여성이시잖습니까?"
"저도 서류에 파묻혀서 산지가 10년이 넘어서요. 여성 심리에 관해선 조언이 어려울건데요."
"비서실장님!"
이화가 빙긋 웃으며 진혁에게 말했다.
"예, 비서실장입니다. 폐하의 개인사부터 국정운영까지 모든걸 보좌하는 직책이라 늙어죽기 딱 좋답니다. 이렇게 산처럼 쌓인 서류를 보고도 업무를 더 얹어줄 생각인가요?”
"늙어죽다뇨?"
이화가 눈을 굴리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실례. 늙어죽다가 아니라. 과로로 죽다인데 말이 잘못 나왔네요."
"비서실장님은 공주님의 입맛이 변한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야, 얼마 전까지 중앙정보부 1차장이었으니까요. 서류로 보고받아 다 읽고 있었는데요?"
"그럼 공주님의 마음의 병도 속속들이 알고 계실테죠. 구체적으로 어떤 병을 갖고 계신지, 어떻게 치료해야하는지. 조언이라도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화가 펜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진혁군, 마음의 병은 외로운 병이에요. 심각한 걸로 따지면 대장암과도 맞먹는데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거든요."
"......"
"쟤 왜저래? 미친거 아니야? 나쁜 새끼네. 다들 이런식으로만 바라보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서 병이란 걸 인지조차 못하죠."
이화는 서랍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어 말했다.
"이건 전임 비서실장님이 제게 남겨주신 서류인데요. 진혁군에 대해서 적혀있어요."
"저 말씀이십니까?"
"폐하의 지시에 따라 11년전 비서실장님이 손수 조사하신 기록과 대응에 관해서 적혀있죠. 간단히 요약하면 이래요."
진혁의 아버지는 공사판 인부였다. 할 줄 아는건 몸쓰는 것밖에 없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슬하에 아들 한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김진혁이었다.
"진혁군의 아버지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식구를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어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죠.
찢어지는 가난 속에 가장의 무게가 심리적인 압박으로 작용했고, 마음 속을 짓누르기 시작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드시고 그게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되고. 그러다 점점 술이 늘어나 알콜중독자가 되셨죠."
그 때부터 진혁의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렀다. 툭하면 아내와 싸우기 시작하고 그러다 참다 못한 아내가 집을 나가며 가정은 파탄을 맞이했다. 불행한 가정 속에 진혁은 외롭게 성장하고 학교에서도 겉돌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 심정은 어땠을까요? 남편은 매일같이 술만 먹고 들어오는데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겠죠.
집은 가난하고 아이 학교는 보내야하는데 반지하 쪽방에서 매일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셨어요. 아침엔 밥을 차려주고 점심엔 식당을 전전하며 맞벌이를 하시고. 저녁이 되면 남편과 싸우며 잠이드는 생활이 매일같이 반복됐어요. 그러다 집을 나가신거죠."
"그런 이야기를 이제와서 하시는 이유는···."
"마음의 병이란거에요. 남편도 아내도. 각자가 마음의 병이 있었는데 서로 알아주지 못했던거죠. 저 남자 왜저래? 저 여편네 왜저래? 그렇게 서로 싸우기만 하고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했던게 진혁군의 가정이 파탄난 이유였대요."
"그럼···."
"두분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서로의 상처를 이해해줄 수 있었다면 가정은 파탄나지 않았을거에요. 그래서 폐하는 늦게나마 두분을 앉혀놓고 시간과 여유를 제공해드렸답니다.
집도 주고, 멋진 일자리도 주고, 두분의 유일한 아들인 진혁군이 훌륭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드리니 금방 화목해지셨대요."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주시다니···."
이화는 냉담히 말했다.
"진혁군. 지금 약 같은걸 생각하고 있죠? 집도 주고 일자리도 드렸던 것처럼. 공주님께 물질적으로 뭔가 줄 수 있는게 없는지 그런 생각."
진혁이 놀란 눈으로 이화를 바라보았다.
"공주님이 마음의 병에 걸리신건 11명의 전우가 전사했기 때문이에요. 죽은 전우를 다시 살릴 순 없잖아요?"
"네."
진혁은 무거운 마음으로 답했다.
"물질적인 보상은 수단일 뿐 진정한 약은 대화와 이해라는걸 명심해야돼요."
"명심하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알았으면 다시 가보세요. 우리 공주님 잠자리에 무사히 드실 수 있게 말동무좀 해주시구요."
"네."
그렇게 진혁이 비서실장실을 빠져나가고 10분 정도가 지나자 이화가 전화를 돌렸다.
[예, 중앙정보부장입니다.]
"이화에요."
[예, 비서실장님.]
"부탁드렸던 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마침 보고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미국의 2차대전 참전용사와 월남전 참전용사의 차이를 비교해보라고 하셨던거 맞습니까?"]
"예."
[차이점을 찾았습니다. 이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시잖아요? 우리의 철칙."
[사소한 정보라도 놓치지 않는다.]
"예, 그럼 조만간 찾아 뵙죠."
[알겠습니다.]
***
"으아악!!!!!!!!!!!!!"
저녁 9시가 되자 공주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서진과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 들이닥치니 은서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공주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공주님! 정신차리십시오! 공주님!"
경호원들이 공주를 흔들어 깨워도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방도 환하게 켜져있고 커텐도 겉혀져있는데 왜 이러시는거야?"
"일단 주치의 선생님부터 부르자!"
비서진들은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봤지만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저 한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오늘 저녁에 불꽃놀이가 있었다는 것. 덕수궁에서도 환하게 보이는 오색빛깔 불꽃이 아름다워보여 공주의 태도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창문부터 다 열어!"
"예? 그건 갑자기 왜···."
"불꽃이 예쁘잖아. 저거라도 보시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렇겠죠?"
그렇게 비서진들이 공주방의 모든 창문을 열어재끼자 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무기! 무기 내놔!"
경호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은서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녀 눈에 총이 들어온다. 경호원이 지니고 있던 흑색 리볼버였다.
"고, 공주님!"
순간적인 주먹질에 친위대 경호원이 나자빠졌다. 공주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총까지 뺏기자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지, 진정하십시오! 친위대입니다!"
"가까이 오지마!"
"공주님!"
"다 죽여버릴거야···."
그 때 소란을 듣고 뛰어온 진혁이 외쳤다.
"창문 닫아요! 당장!"
비서진들이 화들짝 놀라 진혁을 바라봤다. 진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공주에게 한발짝씩 향했다. 그러면서 비서진에게 말했다.
"당장 창문 닫고, 커텐부터 쳐요. 빨리!"
하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자신들의 공주가 실탄이 장전된 총을 겨눈 채로 위협하고 있어 한걸음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주님, 접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은서가 총을 겨누고 말했다.
"가까이 오지마···."
"누구도 공주님을 해치지 않을겁니다. 여긴 대한제국 황궁이고 여기 있는 모두 철저히 신원이 확인된 아군이니까요."
"거짓말하지마···."
은서가 처절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총을 꽉 쥔채로 절대로 놓지 않는 모습이 진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까 전 기억하시죠? 백화점에서 저랑 같이 쇼핑하셨잖습니까? 결국엔 아무것도 못 샀지만 함께 상상했죠. 전우들과 함께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면 행복했을 거라고."
그렇게 천천히 은서를 달래며 진혁이 비서들에게 눈짓을 주니, 한 명씩 천천히 숨을 죽이며 창가로 다가가 문을 닫고 커텐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 그러시는 모습 전우분들이 보시면 슬퍼하실겁니다. 행복하게 살기로 하셨는데 여기서 누군가가 다치게 되면 어떡합니까? 영원한 죄책감이 생길텐데 그래도 총을 쏘실겁니까?"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제가 공주님의 칼이 되고 방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무기를 드실 필요 없습니다. 제발···."
진혁은 그렇게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까지 은서 앞으로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은서는 손을 떨고 있었다. 갈등과 분노 속에서 자신의 마음조차 해아리지 못한 채 총을 줘야할지 아니면 쏴야할지. 모든 게 검은 안개속에 가로막힌 혼돈 속이었다.
포탄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처럼 보였고, 또 누군가는 오진수의 특수부대 처럼 보여 식은 땀이 흘렀다. 겁에 질린 은서의 마음 속엔 작렬하는 포탄 속에서 공포에 떨던 1년 전의 자신이 있었을 뿐이다. 허겁지겁 부비트랩을 설치하며 권총하나에 의지한 채 몸을 숨기던 자신은 분명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제가 지켜드릴테니 제발···."
진혁은 그렇게 한걸음을 더 내딛었다. 공주가 더욱 크게 손을 떨기 시작한다.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용기있게 행동으로 나서자고. 진혁은 최후의 결심을 내려 손을 뻗었다.
펑.
창밖의 불꽃 소리와 방 속의 불꽃 소리가 복잡하게 얽혀 공주의 방을 울렸다. 커텐을 치던 비서도 공주 앞에 서있는 경호원들도 모두가 숨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본다.
"해냈어···."
막내비서가 중얼거렸다.
은서가 총을 쏜 곳은 자기 방의 벽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을 뺏어낸 진혁은 4발 남은 리볼버 총알을 모조리 빼내어 경호원 쪽으로 던져버렸다. 겁에 질린 은서를 품에 안으며 진혁은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은서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진혁의 양손이 은서의 귀를 틀어막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게 안아주고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심장 소리는 들릴지 모르지만 가급적이면 창밖의 불꽃 소리는 안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더 이상 공주님의 행복이 될 수 없었으니까.
진혁이 물었다.
"오늘 불꽃놀이가 있었습니까?"
"예··· 참전용사분들 귀환을 앞둔 환영 축제가···."
"당장 취소하라 그래요. 빨리!"
"하지만 이건···."
"미친거 아닙니까? 참전용사분들 귀환하는데 불꽃축제를 해요? 누구 머리에서 나온겁니까? 그건?"
진혁은 연신 은서의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요' 소리를 반복했다. 품속에서 은서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감동도, 슬픔도 아닌 공포의 눈물이었다.
진혁이 은서의 등을 두드리며 경호원들을 나무랐다.
"니들, 공주님이 어떻게 살아 돌아오셨는지 몰라?!"
"죄송합니다."
"월남전에서 맨몸으로 포격을 당하셨어! 바로 옆에 포탄이 수십발이나 떨어졌다고! 그정도 정보를 들었으면 불꽃놀이는 알아서 막아야 할 거 아냐! 폭죽 소리랑 포탄 터지는 소리랑 종이 한장 차이인데 그거 하나 제대로 조치 못해?"
"......"
"비서실장님과 친위대장님께 연락해! 아니, 황제 폐하께 직접 보고 올려! 불꽃놀이 취소해야된다고!"
"예!"
***
그로부터 13분뒤. 서울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던 오색빛깔 불꽃이 일시에 소멸을 맞았다. 이연은 비서실장과 친위대장, 중앙정보부장을 집무실로 불러 노발대발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거야!!!"
이화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확인해보니 서울시장이 즉흥적으로 실시한 축제였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그 새끼 당장 탄핵시켜. 서울시 의회에 압력을 가하든 검찰과 경찰을 동원하든.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라고."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선출직 공무원입니다. 지자체장의 탄핵 규정도 마땅치 않으니 일단 고정하시고···."
"내가 고정 안하게 생겼나? 월남에 보낸 장병들 귀환이 내일이야! 선발대는 오늘 저녁 7시에 귀환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사전 통보도 없이 이런 짓을해? 황궁 앞에서?!"
그 말에 친위대장 차지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도대체 불꽃놀이가 얼마나 큰 문제기에 그러십니까?"
"차 장군 자네는 전쟁터 나가본적 없지?"
"그렇습니다. 폐하."
“김부장은?”
중앙정보부장 김재필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있긴 합니다만···.”
“전쟁터 포탄 소리는 들어봤겠지?”
"그렇습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게 화약 터지는 소리야. 왜? 총이랑 포탄이 여기저기 펑펑 터지면서 자기 목숨을 위협했거든."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린다.
"그게 여기에 각인돼 버린다고."
그 말에 이화가 냉담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여 차 장군을 교육시켰다.
"그래서 참전용사분들을 환영할 땐 불꽃 축제를 생략하는 게 관례입니다. 그게 아니면 사전 경고라도 했어야 하는데 덕수궁 코앞에서 이런 짓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잘라버리자고 하잖나?"
"폐하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두 번을 누빈 참전용사셨지요. 그런 폐하의 눈앞에 불꽃을 터트렸으니 화가 많이 나신건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나 때문에 그런게 아니야."
"그럼···."
"내 딸이 놀랐잖아."
"아···."
그날 저녁, 김부장은 서울시장 관사에 요원을 보냈고, 15분 37초만에 사직서를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