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Ep1. 공주 이야기 (1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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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을까요?"
"죽었길 바래야지."
부하의 물음에 조선노동당 13과 특수부대장 오진수가 답했다. 그는 573번 고지에서 방해전파를 담당하던 중 저격수를 만났다. 못해도 600~700m 떨어진 거리에서 로프를 맞추는 정신 나간 솜씨로 인해 무전기 안테나를 상실했고, 팀의 지정사수까지 잃었다.
"녀석이 저격수를 찾아주지 못했다면 우린 다 죽었을거다. 당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어."
"덕분에 지원포격을 요청해서 저격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안테나는 어떡하지?"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다시 쓰긴 힘들거 같고, 새 장비로 교체해서 가동하려면 이틀은 족히 걸릴겁니다."
"쳇. 할 수 없군. 어쨌든 지금은 저격수의 생사 여부부터 확인한다. 아직 살아있을 지 모르니 방심하지 말도록."
"예."
그렇게 30분쯤 산을 타니 저격수가 있었던 옆 봉우리에 도착했다. 오진수와 부하들은 2개 조로 나누어 수색을 했는데 10m 떨어진 곳에서 부하가 외쳤다.
"찾았습니다! 저격수의 시신입니다!"
기쁜 소식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삿갓에 하얀 아오바바를 쓴 베트남 전통복 차림의 여자였다.
'하얀옷?'
"뒤져라 이 나쁜년!"
부하 한 명이 발길질을 하려던 그 때, 오진수가 외쳤다.
"안돼! 멈춰!!!"
하얀 옷일리 없다. 저격수가 눈에 잘 띄는 하얀 옷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여자 시체인 줄 알았던 옷가지 속엔 나뭇가지와 수풀이 잔뜩 들어있었고 그 사이로 철사 하나가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부비트랩(함정)이었다.
오진수의 부하가 가짜 시신을 발로 찼을 때 군홧발이 철사를 건드렸고, 철사에 연결된 수류탄의 안전핀이 뽑혀나가며 왼쪽에서 하나 오른쪽에서 하나. 총 2개의 수류탄이 동시에 폭발을 일으켰다. 부하가 잘못건드린 부비트랩 하나에 동료 5명이 한꺼번에 휘말려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런 씨발!"
화낼 시간도 없이 총알이 날아왔다. 대한제국의 특전사 군복을 입고있는 검은베레의 이은서 대위였다.
"그 포격에도 살아남았다고?!"
남아있는 북한군 특수부대는 오진수를 포함해 5명. 그 외에 나머지는 죽었거나 폭발에 휘말려 반쯤 죽어있는 상태. 은서는 손에 쥔 권총으로 남은 적군을 쏴죽이며 단검을 들었다.
"난 운이 좋은편이거든!"
아까전 폭음으로 귓속에 이명이 들렸다. 이마엔 피가 흘렀고 흙먼지가 들어간 눈은 계속해서 따가웠다. 폭발에 휘말려 모신나강을 잃었지만 권총은 멀쩡했다. 근거리에서 믿음직한 신뢰도를 자랑하는 45구경 M1911A1 권총으로 북한군 3명을 저승길로 보내버리고 단검으로 남은 한명의 목덜미를 그어버린 다음 오진수에게 달려갔다.
"우리 군대에 첩자 심어놨지!?"
은서의 칼날을 오진수가 능숙하게 막아낸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팀장 오진수와 대한제국군 특전사의 팀장 이은서가 진검 승부를 벌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힘과 여자의 기술이 맞부딪히며 싸움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우리 주파수를 알아내고 거기에 방해전파를 쏜다. 그렇게 지랄맞은 짓을 할려면 역시 첩자밖에 없어!"
"그래! 그럼 니가 한 짓이 무소용이란 것도 알겠구나! 주파수만 알면 어떤 무전기로든지 방해전파를 쏠 수 있으니까!"
은서가 칼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오진수의 힘을 이겨내지 못해 모든 공격이 막혀버렸다. 그러자 뒤로 돌아가 발차기를 날렸다.
"그럼 다 죽일거야! 여기서 널 죽이고, 남은 북한군도 모두 찾아내 섬멸하면 첩자 혼자 남아 아무것도 못하게 되겠지!"
그 말에 오진수가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면서 은서의 발차기를 막아냈고 그대로 다리를 붙잡아 내동댕이를 쳐버렸다.
"그럴려면 부하들과 같이 왔어야지."
은서는 바닥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아니, 넌 날 이길 수 없다."
오진수도 자세를 가다듬고 칼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도 선공은 은서가 했다. 둘의 진검승부가 다시금 반복됐지만 이번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오진수는 여전이 팔팔했고 은서는 약간 지쳐있는 모습이다.
"네가 날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뭔 줄 아나? 넌 혼자왔어. 부하들과 함께 왔다면 날 능히 이겼겠지."
"그럼 불공평한 거 아냐?"
"살아남는 놈이 강자가 되고 이기는 놈이 정의가 되는 전쟁터다. 머릿수는 아무 상관없어. 내가 너였다면 여기서 저격을 할 게 아니라 부하를 시켜 포격을 요청했겠지."
은서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넌 멍청했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573번 고지를 때렸으면 나고 부하고 무전기고 다 박살났을건데. 넌 왜 혼자 온거냐?"
"그건···."
"네 계급을 보니 대위. 특전사 1개 팀의 팀장인데 11명의 부하는 어디로 팔아먹은거지?"
"나는···."
"혼자서 10명을 잡아봐야 나 한명에게 죽으면 너의 패배로 끝날 뿐이 아닌가?"
은서는 젖먹던 힘을 다해 최후의 칼날을 휘둘렀다. 하지만 오진수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힘은 은서보다 강했고, 그의 체력도 은서보다 높았으며, 그의 칼솜씨조차 은서보다 한수 위였다. 사격도 머리도 은서보단 떨어졌을 지언정 일대일로 진검승부를 벌이는 이상 은서의 모든 특기는 무용지물이 된 상태였다.
"여기서 몇일을 해맨거냐? 멍청한 영웅심리에 사로잡혀 몇날 몇일을 이곳에서 허비했지? 특전사의 튼튼한 체력은 다 어딜 간거고? 지친거냐? 몇날 몇일을 행군했길래 발길질조차 힘이 없던거냐?"
오진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최고의 군인이 아니야."
칼날 대신 칼등으로 은서를 때리고, 주먹대신 발차기로 은서의 복부를 타격한 오진수는 쓰러진 은서를 향해 터벅 터벅 걸어갔다. 은서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그의 말처럼 몇 날 몇 일을 돌아다니며 강행군을 했던 탓에 체력이 극도로 떨어져있었다.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진 모르지만 유감이라고 말해두지."
다시한번 젖먹던 힘을 짜내본다. 15분 넘게 이어진 진검승부로 체력이 바닥을 보였지만 힘겹게 몸을 일으킬 정도의 힘은 남아있는 거 같았다.
"날 어떻게 알아본거야?"
은서의 물음에 오진수가 답했다.
"우린 대한제국 황실에 관심이 많거든."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산 바닥에 무릎꿇린 은서는 지긋지긋한 베레모를 벗어 던졌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 들어줄래?"
"말해봐라. 유언이라 생각하고 들어줄테니."
오진수가 은서에게 칼을 겨눈다.
"대한제국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덕수궁 석조전. 우리집 주소야. 내 목을 잘라서 여기로 보내."
뜬금없는 부탁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목을 잘라달라고?"
은서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말이야. 자진해서 군대에 온게 아냐. 아버지한테 버림받아 강제로 보내진거고, 월남전 파병된 3년 내내 편지 한 통 못 받았어."
7년 전 덕수궁에서 김종규 대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희는 관심이 많습니다. 황제 폐하께 쓸모있는 공주가 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많은 고민을 했으니까요>
"대한제국 황실에서 딸은 아무런 쓸모가 없거든. 황위 계승도 못해,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남편 성씨를 따라가 그러니 가문도 못 잇는 외동딸이 아비 마음에 곱게 보였을리 없지."
"딱하군···."
"그래서 여기 보냈다나봐. 여인도 전쟁터에선 공을 세울 수 있으니까. 빨갱이 때려잡고 반공소녀 이은서가 되어 효도하라는데 너같으면 어땠겠어?"
"목을 잘라달라고 할정도면···."
"그래,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어. 죽도록 미워서 어떻게 복수할까 한참을 고민했거든. 그래서 혼자 여기에 온거야. 처절하게 싸워서 공을 세우고, 처절하게 죽어서 아비 마음에 대못을 박는거. 그게 내 목표였어."
은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 자리에서 북한군에게 목이 잘려 소금에 절여진 채로 돌아간다. 덕수궁 석조전에 도착한 수급이 아버지 손에 들어오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신문엔 대문짝만하게 날 것이다. 대한제국 공주가 간호장교가 아닌 특전사로 파견되어 있었다. 황실이 거짓말을 했고 무리한 임무로 북한군 손에 죽었다. 보도관제를 걸고 거짓 기사를 쓴들 공주가 월남전에서 북한군 손에 죽은건 변하지 않는다.
'대한제국 황제가 자기 딸을 사지로 몰았다.'
공산진영에 대한 분노와 황제에 대한 분노가 복잡하게 얽혀 돌이킬 수 없는 분노의 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몸도 없이 머리만 돌아온 공주의 장례식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테고, 아버지는 평생을 후회 속에 살 것이다.
"꼴 좋잖아?"
은서는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사관학교에서 여성 교관들에게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월남전에 와선 부하들에게 무시당하고,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사투를 벌여가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일대로 쌓인 딸의 원한이었다.
원한의 감정이 눈물이 되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은서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오진수에게 말한다.
"어찌보면 효도일수도 있어. 북한군 10명을 때려잡아 공을 세웠고, 그들에게 죽어 순교자되면 국민들이 동정해줄지도 몰라. 온 나라가 반공여론에 똘똘 뭉칠테니 최고의 효도선물이 되는거지."
"그게 효도 선물이라고?"
"버려진 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기도 하고."
오진수가 한숨을 쉬며 은서에게 총을 겨눴다.
“그건 불효란거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건 자식된 입장에서 최악의 불효라 하거든. 그래서 넌 불효녀다.”
“역시 그런가?”
“내게도 군인으로서의 명예가 있어. 곱게 죽여 묻어줄테니 귀신이 되어 돌아가라. 그렇게 가위로 누르든 저주를 내리든. 니 애비 꿈속에 나타나 매번 괴롭히면 원한도 풀리지 않겠느냐?”
은서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네. 고마워. 복수할 방법을 알려줘서."
정글에 몰아치는 바람에 묶여있던 은서 머리가 환하게 풀어 헤쳐진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적당한 긴 머리가 한올한올 날아다니며 아름다운 멜로디와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성가곡 478.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은서의 어머니. 대한제국의 인애황후 서씨(仁愛皇后 徐氏)가 서거했을 때 울려 퍼지던 음악이 떠오른다.
한국명 서민애. 영문명 제시카 제이슨(Jessica Jaisohn).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양녀로 개신교 신자였던 그녀의 이른 죽음은 종교에 상관없이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았다.
그 중 하나의 음악이 15살 나이로 어머니를 잃은 소녀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인생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죽음 너머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어머니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며 행복한 삶을 사실거라는 음악속의 메시지가 큰 위로가 되어 지금껏 잊혀지지 않았다.
나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종교를 믿어본 적은 없지만 한 평생 나쁜짓은 안하고 살았던 거 같은데. 가급적이면 천국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다고 은서는 눈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정글의 숲 사이로 환한 햇살이 들어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빛이 어머니의 손길 같아서 미소가 번진다.
총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