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10화 (10/131)

〈 10화 〉 Ep1. 공주 이야기 (10)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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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번 고지가 훤히 보이는 이름없는 옆 봉우리였다. 거리는 약 670m 정도. 우거진 수풀 속에 숨어있는 은서는 모신나강에 달린 스코프로 반대편 고지의 정상을 확인해봤다.

예상했던 8m 높이의 안테나가 보였다. 북한군 '잔당'으로 추정되는 특수부대 군인이 11명 있었고, 무전기 담당이 2명에 저격총을 든 지정사수가 한 명있었다.

<딱 이번만이야. 수색정찰만 하고 잽싸게 돌아와>

채명진 장군님이 신신당부했던 게 떠올랐다. 그분이 허락한 단독작전은 어디까지나 수색, 정찰, 첩보. 직접적인 전투를 허락하신 적은 없다. 장군님의 명령대로라면 이쯤에서 물러나 본부로 복귀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몇날 몇일을 또 걸어야돼요. 19번 도로는 지금도 전투가 한창인데, 그동안 무수히 죽어갈 병사들은 어쩌죠?'

북한 여군에게 얻어낸 정보대로라면 방해전파가 모든 부대에 영향을 주고 있고, 이로 인해 19번 도로 전투가 패배 위기로 몰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은서는 자신만만한 그 여자의 눈빛에서 거짓이 없음을 느꼈다.

'죄송해요 장군님. 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요.'

빛나는 공적이 눈앞에 있다. 저들을 잡고 방해전파를 거두어내면 수 많은 병사들을 살릴 수 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하물며 북한군 잔당이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혐오하는 '반란군'이 아니던가?

<공산당을 때려잡는 철의 여인이 되십시오. 대한제국의 공주가 아닌 반공소녀 이은서로 불리는 그날이 되면 공주님도 영웅이 되시는겁니다>

3년 전 덕수궁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간 김종규 대장. 놈은 말했다. 공산당을 때려잡는 철의 여인이 되라고. 반공소녀 이은서가 되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그러면 아버지의 지지율이 올라간다고. 그게 효도라고.

웃음이 터졌다. 환하게. 7년간의 모든 고생이 보답받는 듯한 기쁨의 웃음이 눈물에 섞여 터져나왔다.

"쟤네들을 잡으면 아빠한테 사랑받을 수 있는거야?"

눈물이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미약하게 부는 바람은 670m에서 총을 쐈을 때 총알의 궤도를 왼쪽으로 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총구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바람을 탄 저격을 해보기로 한다.

<에? 4발? 고작 4발 맞추신겁니까? 10발중에?>

3년 전 소위 시절의 자신을 무시하던 부하들이 떠오른다. 15m 거리를 겨우 맞출 수 있는 권총으로 250m를 맞춘 괴물같은 녀석도 자신을 노려보고 말한다. 항상 자신을 무시하던 박철민 상사.

<이 정도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의 말을 떠올리며 은서는 방아쇠를 당겼다. 모신나강에서 발사된 탄환이 바람을 타고 670m 거리의 안테나를 향해 날아갔다. 바람을 따라 궤도를 틀어가던 총알이 안테나를 고정하고 있던 로프에 정확히 명중한다.

길쭉한 8m 높이 안테나를 고정하던 로프가 끊어지자 바람에 휘청이기 시작한다. 그 때 다시한번 총을 쏜다. 이번엔 옆에 있는 로프를 때린다. 안테나를 고정하는 로프 중 2방향이 끊어지자 무게와 바람을 못이기고 쓰러지기 시작한다. 8m 높이의 광대역 안테나가 산 정상에서 쓰러지자 우지끈 소리가 나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채명진 장군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소련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는 2차대전에서 적 309명을 죽였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잘 싸우는 저격수였지>

비내리던 연병장에서 장군님이 하신 얘기가 떠오른다. 세상 모든 여군 중 전투를 제일로 잘하던 자. 총 한자루로 조국을 구한 영웅. 아직도 깨지지 않는 세계 4위의 총잡이. 은서가 꿈꾸던 '훌륭한 군인'의 표본.

"보셨죠? 600여 미터 거리에서 총을 쏴서 안테나 로프를 맞췄다구요! 저도 그녀처럼 최고의 저격수가 된거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럼 이제 훌륭한 군인인거잖아요!"

총탄이 날아와 바로 옆을 때렸다. 은서가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긴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놈들이 은서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박철민 상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m16도 곱게="" 그러다="" 내실려구요?="" 노획한="" 도대체="" 모신나강이라니.="" 못할건데="" 무슨="" 배짱으로···.="" 생포당하면="" 아니고="" 월맹군한테="" 저격수="" 죽지도="" 흉내라도="">

은서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차피 살아돌아갈 생각도 없었어!!!"

몸을 굴려 수풀 뒤로 들어갔다. 뛸 수 있는 공간이 나오자 상체를 반쯤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숲속을 헤쳐 갔다. 나무와 수풀 사이 작은 틈이 존재한 바위 뒤편에 몸을 기대 북한군을 조준했다.

놈들의 총알이 먼저 날아왔다. 가까스로 비껴갔을 만큼 예리한 조준이었지만 은서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침착히 적을 조준했다. 그렇게 쏜 총알이 북한 특수부대의 지정사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이제 저들에게 저격수는 없다.

그 때 폭음이 들렸다.

'이 소리는 설마?'

11m 떨어진 뒤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였다. 연이어 괴성이 들려온다. 놈들이 폭격을 요청한 것이다. 북한군의 요청아래 월맹군이 쏘았을 포탄의 빗줄기가 은서의 머리위로 날아오고 있었다.

***

"통신이 들어옵니다!"

정보참모가 외쳤다.

사령부의 분위기가 밝아진다. 무전기에서 들리던 정체불명의 소리가 중간에 뚝 끊기더니 고대하던 아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참모장이 기다렸다는듯 외쳤다.

"당장 전 부대에 통신 돌려! 상황부터 알아봐!"

통신병들이 예하 부대를 하나하나 불러가며 전황을 보고 받았다. 그렇게 넘겨받은 정보는 작전과가 넘겨 받아 지도위의 말을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자 1시간, 2시간씩 지연되던 전장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눈에 들어왔다.

"장군님!"

채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시한번 항공 지원을 요청해야겠군."

가장먼저 부른 것은 일전에 네이팜탄을 낭비하고 간 미7공군의 F-4 전폭기였다. 통신이 재개된 지금 전장으로부터 최신 좌표를 전달받으면 항공 폭격이 정확하게 적 머리위로 떨어질 것이다.

채명진은 앞서 무모한 전장으로 보병들을 헬기 태워 보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곳을 지원해주는 게 급선무였다.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이름없는 고지에서 절망적인 사투를 벌이던 대한제국 보병부대가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제국 특전사 1, 2, 4팀이 지원을 온 것이다. 그들 머리 위엔 사령부에서 보낸 F-4 전폭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포위된 고지 주위로 네이팜탄의 거대한 화염이 솟구치니 월맹군의 공세는 무너지고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고지가 코앞이다! 조금만 더!"

670 고지의 사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잔혹한 전장 속에서도 병사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고지를 차지한 북베트남군 장병들이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져 유효한 사격전이 계속됐다. 통신병이 좌표를 부르면 사단 포병대가 견인포를 쐈고 그렇게 날아간 포탄이 정밀하게 기관총 진지를 잡기 시작했다.

670 고지가 접전으로 바뀐 사이 백호부대의 공병대는 19번 도로의 부서진 다리를 복구해나갔다. 그 길로 숙련된 고참 운전병들이 박격포의 위협을 뚫고 트럭을 몰아 동맹군에게 물자를 전달했다.

목마른 남베트남 병사들에게 식수가 공급됐고, 기관총 진지에 총알이 공급되었으며, 장갑차에 기름이 공급되며 반격의 기회가 찾아온다.

북베트남, 남베트남, 공산게릴라, 대한제국이 얽힌 19번 도로의 혈전은 이제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패배할 것만 같았던 싸움이 통신하나가 뚫렸다는 이유로 뒤집어진 것이다.

참모장이 물었다.

"방해전파가 갑자기 끊긴 이유가 뭘까요?"

"장병들의 용기와 헌신 덕분이겠지."

참모장의 물음에 채명진은 그렇게 답했다.

무능한 지휘부의 무모한 명령 속에 수 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청년들이 저마다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남편이었을 그들의 목숨이 군생활 24년차 장군에게 죄책감이란 무게로 밀려왔다.

은서는 어떻게 됐을까?

위험하면 잽싸게 돌아오라고 했는데. 수색 정찰까지만 허락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사라진 방해전파는 은서의 활약일까? 녀석은 지금 목숨을 걸었나?

'은서야 제발···.'

대한제국의 공주. 혼자의 몸으로 전장을 누비고 있는 위기의 소녀가 채명진 장군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의 유서>

유서를 쓰기 전에 주의사항을 남긴다.

첫 번째 인사는 거짓이다.

손발이 떨릴만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만, 역사학자들에게 읽힐 공주의 유서이므로 심사숙고하여 적는다.

사랑하는 아버지.

나한텐 꿈이 있었어. 조선의 공주처럼 사는 꿈이었지.

예쁘장한 한복을 입고 오얏꽃이 흐드러지게 핀 여름날 호수에 앉아 거문고를 연주하면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을텐데.

시집가면 어떤 왕자님을 만났을까?

영국도, 스페인도, 네덜란드나 벨기에도, 북유럽의 3개국까지. 세상에 널린 게 백마탄 왕자님이잖아. 그 중에 운명같은 내 님이 있다면 정말로 행복했을텐데.

남의나라 시집살이는 고달프겠지? 시어머니 여왕님께 구박당하고, 언니 오빠 왕족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아시아에서 온 공주님은 한 평생 인종 차별을 달고 살았을거야.

그래도 굳세게 살아남아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어야지.

여왕님한테 용돈도 받고, 정계에 연줄을 쌓아 인맥을 형성하고, 그렇게 간접적으로 조선의 외교를 도우면 차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나라는 돈이 필요했잖아. 배고픈 국민들 삼시세끼 굶지 않게 해주려면 경제발전을 시켜야지.

산을 깎아 고속도로를 짓고, 첨단기술을 배워와 멋진 공장도 짓고. 서울 도시에 높은 빌딩을 잔뜩 지어 한강의 기적을 일궈야 하는데. 그럴려면 돈이 필요했을텐데···.

나 하나 희생해서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면 시집살이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나 정략결혼으로 마감하는 삶이면 어때? 그런 삶이라도 뜻이 있다면 행복할 수 있는거잖아.

영어가 세계 공용어라길래 여섯살 때부터 공부하고, 프랑스어는 귀족들의 언어라길래 과외 선생까지 초빙해서 배웠는데···.

아버지, 날 군인으로 만든 이유가 뭐야?

하루에도 수십명 씩 내 손에 사람이 죽는데 전쟁이라는 이유로 무감각해져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때리며 죽이는데 이런 삶이 익숙해져버렸어. 이런 날 왕자님들이 안좋아하겠지?

유서가 전달됐다면 난 죽었을거야.

대한제국의 공주는 조국을 위해 열심히 싸웠어. 특전사의 팀장으로 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이끌었고, 부하들의 안전이 확인되면 마지막으로 헬기타고. 군인이자 장교로 부끄러움이 없는 내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어.

약속했던 공은 세워줄게. 반공소녀 이은서가 되면 그 뒤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거지? 공을 세우지 못한다 한들, 놈들 손에 순교자처럼 죽으면 당신의 목적은 달성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죽어줄게.

나는 여기서 죽지만 우리 부하들은 훈장 하나씩만 더 달아줘. 못난 팀장 만나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친구들이야. 난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되니까 녀석들 만큼은 아버지가 챙겨줬으면 해.

미안해,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겠어.

지옥에서 보자. 아버지.

</m16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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