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Ep1. 공주 이야기 (9)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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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반동분자였구만."
"어? 우리말을 하네?"
"당연하지, 조선노동당의 요원인데."
은서는 깨닫지 못했다. 베트남 여자의 베트남어도 부정확했다는 걸. 자신이 '착각'한 여자는 손에 들고있던 모신나강 총을 격발했다.
하지만 은서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빠른 몸놀림으로 달려가 태권도 돌려차기로 여인의 옆통수를 후려갈겼다.
"총알을 피했다고? 이 미친년이!"
"그거 공포탄이거든?"
"뭐?"
은서는 땅에 떨어진 모신나강 총을 주워 북한 여자에게 겨누어 말했다.
"내가 왜 모신나강을 들고왔는 줄 알아? 볼트액션 방식이라 연사가 안되거든! 한 발씩 재장전해줘야하니까."
"내가 총을 탈취할 줄 알고 공포탄을 장전해놨다고?"
은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번째 탄은 실탄이야."
모신나강의 총을 다시 장전한다.
"마을에 총을 두고 나온 것도 처음부터 날 노리고···."
여자는 떠올렸다. 첫번째 마을에서부터 은서를 미행하던 자신을. 그러다 은서가 총을 두고 나온 것이다. 긴 추적 끝에 은서를 대한제국 사람으로 확신한 그녀는 그 총을 들고 은서의 뒤통수를 노렸다. 근데 그게 처음부터 의도된 함정이었던 것이다.
"난 가끔씩 마을을 나올 때 총을 두고나와. 날 의심하는 놈이 있으면 그걸 들고나와 뒤통수를 노릴 거 같았거든."
"해방군을 노린건가?"
"들고나오면 민간인이 아니야. 그 순간은 군인대 군인이니까 죽이든 살리든 문제가 없지. 내 총은 첫탄이 공포탄이고 모신나강의 재장전 시간을 평균 3초로 가정했을 때 그 정도면 내 실력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니 총이 아니라 자기 총을 들고 나오는 애들도 있었을거야."
"난 외국어가 되거든. 적당히 아무말이나 해주면 10명중 8명 꼴로 넘어가줬어. 왜? 그 친구들 돕겠다고 달려온 공산 국가가 꽤 있거든. 중국어 흉내만 내줘도 동맹군이다 싶어 넘어가주니까."
"베트남 애들이 그렇게 멍청했다고?"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거지. 수상해보여서 따라나오긴 했는데 먹을거도 주고 치료도 해줬어. 그래놓곤 아무런 위해도 안 가하고 순순히 마을을 나가주니 뭣하러 적개심을 가졌겠어? 심지어 내 모습은 대한제국군도 아니었는데."
"미친년···."
"덕분에 월척을 낚은거야. 유효한 작전이었지."
은서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묻지. 네 대민지원. 처음부터 우릴 찾기 위한거였나?"
"3년전엔 단순히 대민지원이었어. 그러다 중위 계급을 달았을 때 마을 주민들로부터 조선어를 쓰는 여자가 돌아다닌단 소문을 들었지. 그게 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내 소문이 돌았다고?"
"그래, 대한제국에 전투병과를 가진 여군은 내가 유일하니까. 딱 들었을 때 북한군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부터 쭉···."
북한 여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은서에게 말했다.
"하지만 늦었어. 니들은 19번 도로를 지키지 못할거야."
"19번 도로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무전기도 안 들고왔으니 모르겠지. 멍청한 년!"
은서는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포성이 들리는 거 같았다. 모르고 있을 땐 안 들렸는데 알고나서 귀 기울이니 나즈막히 들릴 만큼 작고 작은 소리였다.
"그러네···."
"자, 죽여. 나는 어떤것도 말하지 않을테니까."
"말하지 않는다면 말할 때까지 괴롭혀야지."
은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은서가 북한 여군한테 들은 정보는 크게 두가지였다. 대한제국의 군용 통신망이 방해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한제국은 개같은 나라라는 것. 후자는 은서가 생각하기에도 맞는 소리 같아 고개를 끄덕여줬다. 대한제국 황제는 아주 개같은 놈이었으니까.
고문을 해야했던 게 마음아팠지만, 이 순간에도 치열한 전투로 죽어갈 아군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불가피했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해보기로 한다. 이것은 고문이 아니라 군인대 군인의 싸움이었던거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북한 여군을 땅에 묻어주는 은서였다.
"미친년아! 살려준다며!"
땅속에 묻힌 채 얼굴만 나와있는 북한 여자를 향해 은서가 말했다.
"살려줬잖아?"
"이런 씨발! 당장 안 꺼내?"
"어쨌든 죽이진 않았으니까. 감사히 생각하라고."
"흑흑··· 씨발새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왜그래~ 우리 즐거웠잖아."
은서는 능청맞게 말하며 짐을 챙겨들었다.
"거기 한 시간만 그러고 있어. 지나가던 베트콩이 구해주겠지 뭐."
죽일 필요가 없으면 죽이지 않는다. 은서는 그래서 여자를 그대로 살려주고 나왔다. 살려줘봐야 얼굴만 내민 채 땅에 뭍혀 있으므로 아무 위협이 없을테다. 물론. 그러다 굶어죽을지도 모르지만 그거는 알바 아니고.
저녀석에게 수집한 정보들을 토대로 전략을 수립해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할 계획이다. 19번 도로 근처의 고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통신 방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안 이상 대민지원을 계속할 여유는 없었다.
전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베트콩 토벌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전공. 성공하면 모두가 기뻐하며 박수를 치고 우러러 볼 최고의 업적. '북한군 토벌'. 7년 전 아버지와 김종규 대장이 말했던 바로 그 '공'이었다. 그런 기대감에 은서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기뻐해 아버지. 당신 소원대로 반공소녀 이은서가 최고의 효도 선물을 해줄테니까.'
은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
은서가 북한군을 추적하는 법은 다소 복잡했다. 복잡하지만 혼자서 능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북한 여군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니들 무전기 관리 존나게 못하던데!>
이 말을 풀어보면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북한군 잔당 세력은 대한제국의 무전기를 탈취했다.
대한제국의 무전기를 탈취했다면 거기 딸려있던 암호문이나 주파수도 훔쳤을 것이다. 그거면 대한제국 통신망에 침투해 지랄을 떨어대기 충분한 재료가 된다.
통신망에 침투해 지랄을 떤다 가정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지랄은 뭘까?
'전파방해겠지.'
은서는 정글 속 버려진 폐가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부대있을 때 정보과에서 읽은 교범 내용이 떠올랐다.
'PRC-77 무전기의 교신거리는 교범 기준으로 8km밖에 안돼. FM 방식의 무선 통신은 날씨와 지형에 큰 영향을 받으니 통신거리를 늘리려면 산꼭대기로 가야할거야.'
은서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머리속에 지도를 그려본다. 3년간 19번 도로 인근을 돌아다니며 대민지원을 다녔기에 지형을 훤히 꿰고 있었다.
'내가 니들이라면 어디서 지랄을 떨고 있었을까?'
머리속에 19번 도로를 구불구불하게 긋는다. 그리고 3개의 고지를 도로 주위로 배치한다. 670, 380, 150 고지. 이들 3개 고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건데, 이들 모두를 전파방해로 지랄맞게 만들려면 지랄맞은 위치에 무전기를 설치해야 한다.
무전기의 통신거리가 8km이므로 이것을 반지름 삼아 마음 속에 커다란 원을 그린다. 그것을 19번 도로의 산봉우리 곳곳으로 이동시켜가며 3개 고지가 한꺼번에 원 안으로 들어오는 곳이 어딘지를 찾아본다.
'그런 곳은 없어. 통신거리 8km론 택도 없는 거리야.'
그렇다면 무전기의 안테나를 좀 더 큰 것으로 바꿔야 한다. 대한제국엔 높이가 8m까지 올라가는 조립식 안테나가 있는데 이 녀석을 쓰면 통신거리가 20km까지 올라간다. 공산권도 무전기를 쓸테니 비슷한 장비가 있을 것이다.
'증폭기를 썼을까? 증폭기로 전파의 강도를 올리면 통신거리가 50km까지 늘어나. 이렇게 되면 놈들의 위치를 찾는게 불가능해.'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행복회로를 약간만 돌려본다.
'하지만 못쓸걸? 광대역 안테나야 니들껄 어거지로 쓴다 쳐도 증폭기는 어떻게 할거야? 전기를 어디서 끌어올거지? 정글 숲속을 헤쳐 가며 그 많은 장비를 들고갈 수나 있고? 천만에. 니들은 광대역 안테나 들고 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거야.'
8m까지 올라가는 조립식 강철기둥을 여러개 들고가며, 그걸 세우는 데 필요한 쇠말뚝, 로프, 대형 망치까지 들고가야 한다. 이것 뿐이랴? 무전기는 전기먹는 하마다. 장시간 방해전파를 쏘려면 팔뚝만한 배터리를 '최대한 많이' 들고가야 한다. 이곳은 1972년 베트남. 산에도 정글이 우거진 녹색의 지옥이다. 트럭이나 항공지원도 없이 대한제국 몰래 장비들고 산을 타려면 증폭기 같은건 사치일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PRC-77 무전기의 통신거리를 20km로 가정했다. 이걸로 다시 머릿속에 원을 그렸다.
은서가 특전사의 검은 베레모를 썼을 때, 딱 하나의 고지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573번 고지.'
은서도 산을 타기 시작했다.
***
"3팀! 지금 당장 군장 챙겨서 헬기장으로 나온다! 실시!"
"실시!"
박철민 상사가 부하들에게 외쳤다. 그 밑으로 9명의 부사관들이 일제히 복명복창하며 따른다. 관물대 안의 모든 이불과 세면도구, 야전삽과 장구류들이 훈련 한 그대로 배낭속으로 들어간다.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고 검은베레를 쓰며, 무기고에서 M16 소총을 들고 나오는 그들의 표정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자신의 팀장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전투를 위해 쉬는 시간에도 갈고 닦은 육체가 오늘따라 단단해보였다.
박철민 상사가 성질을 내며 말했다.
“못난 팀장 만나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고?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이 망할 띨띨이가!”
헬기장에는 대한제국의 UH-1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몇 일 전 이은서 대위를 태우고 단독작전을 나갔던 바로 그 헬기였다. 조종사도 동일했다. 조종사는 그녀가 어디에서 내렸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이 헬기를 타면 금방 찾을 수 있을거라고 박철민 상사는 확신했다.
"팀장님께 가는겁니까?"
부하가 물었다. 박철민 상사는 확신을 갖고 답했다.
"그래! 오늘 우리는 대한제국의 공주님을 구하러 간다!"
"예!"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이 뒤를 돌아본다. 자신들의 상관인 이승필 중위가 완전무장을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부중대장님도 뒤쳐지면 안됩니다!"
"장교 무시하지 마십시오!"
"예~!"
미소짓는 3팀을 태운 헬기가 지상을 박차고 베트남의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그들이 가는 곳은 19번 도로. 대한제국과 북베트남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치열하게 얽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장이다. 포화 속에서 이은서 대위가 무얼 하고 있을지 그들은 조심스럽게 상상해보고 있었다.
"이은서 대위님은 구체적으로 어딜 가신겁니까?"
조종사가 말했다.
"3소대가 주둔중인 150 고지 근처에 내려드렸습니다. 그곳에 있는 민간 마을이 17개 정도 되는데, 항상 거기에 내리셔서 도보로 이동하셨지요. 작전 기간은 일주일 정도였고 항상 150 고지로 돌아와서 제 헬기를 타고 기지로 복귀하셨습니다."
이승필 중위가 답한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적에게 넘어간 670 고지 근처였으면 큰일이었을건데."
조종사가 답한다.
"아뇨, 거기도 만만치 않을겁니다. 연락장교님 태우고 자주 드나들었는데 날이면 날마다 전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거기 전황도 심각합니까?"
"예. 피비린내가 진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탭니다. 그나마 기갑연대장님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셔서 겨우겨우 버티는 상황이지요."
박철민 상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만치 않군···."
이승필 중위가 말했다.
"필사적일겁니다. 우리나라도 십여년 전 한국전쟁에서 그랬으니까요."
하늘 아래로 대한제국의 국기와 남베트남의 노란 국기가 나란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