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4화 (4/131)

〈 4화 〉 Ep1. 공주 이야기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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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감기 들린다."

대한제국 월남 원정군 총사령관 채명진 중장이었다.

"장군님?"

까마득히 먼 계급의 최고 선임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 경례해야 하는데··· 뛰느라 지쳐 쓰러진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체력이 방전되어 있었다. 고작 이정도 운동으로 탈진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비를 맞고 감기들리면 죽을 수 있을까요?"

"죽긴 왜 죽어. 젊은 녀석이."

"죽고 싶어요. 죽고 싶은데 너무 분해서 죽을 수가 없어요."

하염없이 우는 이은서 소위를 바라보며 채명진 중장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분하긴 하냐?"

"......"

“다들 널 낙하산이라 부르더구나. 내가 보기에도 고관대작 중 누군가가 보낸 거 같은데."

“낙하산이면, 지켜주기라도 했겠죠.”

"그럼 누가 보낸걸까?"

"......"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비참하게 쓰러져있는 자신이 대한제국의 공주라는 걸 들키면 죽어서도 편치 못할 수치가 될 거 같았다. 그럴바엔 차라리 더 크게 우는게 낫지 싶었다.

"대답하기 싫은거냐?"

"......"

"그럼 뭐··· 그래. 니가 원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알려고 하지도 않을거다."

채명진은 은서 앞에 쭈그려 앉으며 우산을 씌워줬다. 그 작은 배려조차 대한제국 원정군 총사령관이 한 배려였기에 은서는 황송해서 더 크게 울어버렸다.

장군님이 말했다.

"대신 두가지 선택지를 주마. 첫째는 여기서 죽는 것. 둘째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는 것."

"장군님의 손을 잡으면 전 어떻게 되나요?"

"널 최고의 군인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 말에 은서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울다 웃는 모습에 뿔이 날지도 모를 만큼 환한 미소였다.

"제가 최고의 군인이 된다고요?"

"왜? 안된다고 보느냐?"

"30kg 군장메고 10km도 못 걸어요. 이런 제가 어떻게 최고의 군인이 되죠?"

"운동은 하면 돼. 여자라고 안 느는게 아니라 느리게 느는거지. 남들보다 더 운동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하면 결국엔 잡을 수 있지 않겠냐?"

은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장군님을 올려다봤다. 소녀의 슬픈 눈을 응시하며 장군이 말한다.

"소련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는 2차대전에서 적 309명을 죽였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잘 싸우는 저격수였지."

"......"

"지휘관을 원하는게냐? 그럼 잔다르크는 어때? 중세시대 사람이지만 뛰어난 지휘관이었어. 오를레앙부터 트루아, 콩피에뉴까지. 적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우회기동으로 잉글랜드를 무찌르고 조국 프랑스를 구했다."

"잔다르크는 신이 내린 기적이잖아요. 중세시대의···."

"종교라는 공감대로 장병들과 소통했을 뿐. 그걸로 사기를 올렸다면 종교도 기술이다. 뛰어난 전략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것이 기적이면 그래, 현대 군사학으로 봐도 기적이 맞겠구나."

미소지으며 말한다.

"너라고 안되겠냐? 최고의 군인."

“최고의 군인···.”

은서는 고심했다. 장군님의 손을 잡을지 여기서 그냥 죽어버릴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흘리던 그녀에게 채명진 장군이 말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싸우는 것도 좋아. 최고의 군인이 되어 공적을 세우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테니까. 모질게 구는 선임, 말 안듣는 부하. 널 여기로 보낸 나쁜 놈들까지. 모두 너를 업신여기지 못할거다."

채명진이 손을 건네며 말했다.

"너도 자존심이란 게 있잖아."

"자존심···."

그래, 자존심이다. 내가 상처받았고 한참을 울었던 건 자존심이다. 여기서 무시당하고 살기에 너무도 억울했으니까. 강제로 끌려온 군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기엔 모든게 아깝지 않은가? 24년을 살았는데 빌어먹을 황제한테 복수는 해봐야지.

그래서 물었다.

"진짜로 최고의 군인이 될 수 있나요?"

채명진 장군이 웃으며 말했다.

"나 채명진이야. 부하들한테 거짓말 안해."

비 내리는 연병장에서 이은서 소위는 채명진 장군의 손을 잡았다.

***

그 후 3년이 지났다. 1972년 3월 28일. 채명진은 어느덧 스물일곱이 된 이은서 대위를 사령관실에 불러 물었다.

“그래서, 최고의 군인이 된 거 같으냐?”

“최고는 모르겠고, 부하들을 제압하는 건 성공했죠.”

“제압이라니, 그래도 뭘 건지긴 했네? 후후후···.”

이은서 대위의 대답에 채명진이 만족했다는듯 웃었다. 그녀는 1972년 현재 백호부대 소속 공수지구대 3팀의 중대장으로서 김훈 대위의 뒤를 잇는 최고의 팀장이 되어 있었다. 띨띨이로 불리던 과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부하들에게 인정받는 팀장이 됐으니 이제 참모도 해봐야지. 내 밑으로 들어와서 본격적인 지휘관 수업을 해보자고.”

“참모는 공을 세울 수 없잖아요.”

“참모가 공 못세운다 누가 그래? 날 보면 몰라? 참모들이 허구한날 삽질해대니 장군으로서 공적도 못 세우고 지는 싸움만 하잖아. 참모도 중요한거야.”

그 말에 은서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럼, 장군님 밑으로 들어갈 테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래, 뭐든지 말해봐. 결혼시켜달라는 거 빼면 다 들어줄테니까."

“예?”

갑작스런 예외사항에 은서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왜 하필 예외사항이 그거에요?"

"너 아까 여기 와서 내 아들 사진 훔쳐보고 있었잖냐? 관심 생긴거 아냐?"

은서는 10분 전 텅 빈 사무실에서 장군님을 기다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책상에 잘생긴 남자 사진이 있기에 슬쩍 본게 딱 걸리고만 모양이다.

"아뇨! 훔쳐보다뇨? 그냥 보이니까 본거죠! 에이~ 그리고 연하남은 제 취향이 아닙··· 으아아! 잠깐만 잠깐만! 제가 부탁 드리려던 건 이게 아닌데요!?"

채명진이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니가 연하남인건 어떻게 알아?”

“그거야! 장군님 아드님이시니까!”

"너 이자식··· 내가 아무리 널 딸처럼 생각해도 내 아들 만큼은 안돼!"

은서가 펄쩍 뛰며 말했다.

"대체 뭔 소리세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야. 약혼까지 한 녀석을 아비 욕심 만으로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니겠냐?"

"욕심? 저한테 욕심이 생기셨어요? 아니 그러니까··· 잠깐! 그 부탁이 아니라니까요?"

당황하는 은서를 보며 채명진이 애석한 표정을 '흉내내며' 말한다.

"부하의 고충을 들어주는 게 상급자의 의무라지만, 사적인 청탁은 안되는 거다. 이은서 대위."

"장군님!!!"

“푸하하하하!”

채명진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미안, 미안. 농담으로 해본 소리야. 그래서, 부탁이 뭔데?”

은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19번 도로에 다녀올게요. 단독 작전으로.”

그 말에 채명진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거길 또 간다고?"

“딱 한번만 더 갔다올게요. 장군님도 누누히 강조하셨잖아요. 19번 도로가 있는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라고. 현지 민심도 확인하고, 적 정보도 수집하고. 얼마나 이로운 작전인데요.”

이은서 대위는 그렇게 말하며 채명진 장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온 몸이 실시간으로 굳어지고 근심 걱정이 드러나는게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은 사뭇 고마워 기쁜 마음이 들고만다.

"걱정되세요?"

"그럼 안되겠냐? 단독 작전인데."

“단독 작전이래봐야 위험한 임무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하필 너냐고."

“저밖에 없으니까요. 동양 여자에 적당한 키, 베트남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현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 대한제국 특전대원.”

"에휴, 하여튼 머리만 똑똑해가지곤···."

“헤헤···.”

채명진 장군은 고심끝에 은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투는 안돼. 위험하면 잽싸게 돌아와야 된다. 알겠지?”

"네, 장군님!"

이은서 대위가 깍듯이 경례하며 사령관실을 떠난다. 특전사의 검은 베레모를 반듯하게 눌러쓰고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보인다.

소위시절 축 처진 어깨로 사령부의 복도를 걸어가던 저 소녀는 중위로 진급하고, 다시 대위로 진급하며 김훈 대위의 뒤를 이은 공수지구대 3팀의 팀장이 됐다.

띨띨이로 불리던 아이가 강인한 여전사가 됐고, 체력도 사격 실력도 지휘 능력도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을 보며 채명진은 깨달았다.

'넌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였지.'

어떤 이유인지 동기 부여가 되어 무엇이든지 척척 빠르게 배워나가 자신을 기쁘게 한 은서였다.

그러던 은서는 우연히 자신만의 특기를 발견했는데, 어려서부터 배웠다는 외국어 실력이 '해외 파병된 군인'이라는 위치와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시너지를 낸 것이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대한제국군은 동맹국인 미국과 연합작전을 펼칠 일이 많았는데 하필 은서가 제일 잘했던 외국어가 영어. 미국 장교와 거침없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 장교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은서는 영어만으로 부족함을 느꼈고, 없는 시간을 쪼개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남베트남 정규군의 도움을 받아 3개월만에 새 언어를 익혔고, 그들과 협동 작전을 펼치며 자신의 발음을 고쳐나가니 이내 현지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덕분에 새 언어로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문화를 배워나가니 한국군을 바라보는 현지 주민들의 거부감도 훨씬 줄어들었다.

한국어, 영어, 베트남어 3개국어가 통하면서 현지 주민의 거부감까지 줄이는 특전사 장교가 있다는 소식은 전군에 퍼졌고, 민간인과의 충돌이 극심해 욕이란 욕은 다 먹던 미국군도 그녀 덕을 많이 봐 어느날 미군 장교가 말한다.

"이 소위는 영어도 잘하고 전투 감각도 뛰어난데. 현지인의 생각까지 꿰고있네요. 덕분에 베트콩을 찾는게 수월했어요. 이참에 우리팀으로 오지 않을래요?"

"와! 진짜요? 당신들 그린베레잖아요! 특수부대의 원조!"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린베레의 자격이 있는걸요?"

반쯤 립서비스에 가까웠지만 하하호호 웃는 이은서 소위의 모습이 행복해보여 채명진 장군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채명진 장군은 이상함을 느꼈다. 1972년. 대위 계급을 달고 사령부의 복도를 걸어가는 현재의 뒷모습. 그녀 곁엔 한 명의 부하도 없다. 그 때도 지금도 대한제국 장교 이은서는 늘 혼자 다닌다.

'아직도 부하들이 미운게냐?'

소위 시절 받은 상처가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있나보다.

'그 때 박승진 소령과 김훈 대위를 말렸어야 했는데···.'

3년 전 그 때, 총사령관으로서 녀석들을 말리고 은서를 보호해줬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그녀의 곁에는 공수지구대 3팀의 부하들이 함께 웃으며 걸어가고 있지 않았을까?

‘미안하구나······.’

채명진은 깊은 고뇌속에 조용히 사과를 올렸다. 눈치를 챈건지 은서가 절묘한 타이밍에 뒤돌아 말했다.

"장군님!"

“그래, 은서야.”

"3년 전에 비 내리던 날.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에요?"

"찾아오다니?"

"특전사 본부까지 찾아와서 저한테 우산 씌워주고 손까지 내밀어 주셨잖아요. 거기서 사령부까지 거리도 꽤 되는데. 우연치곤 너무 절묘했던거 같아서."

채명진은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웃으며 답했다.

"딸 같았거든."

그 대답에 은서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진짜요? 제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그래, 딸같아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지.”

은서가 얼굴을 붉히며 기대감을 담아 말했다.

"그럼, 이번에 돌아오면 제 아버지가 되주실래요?"

채명진이 기가 찬다는 듯 답한다.

"거 참, 내 아들은 임자 있다니까."

"시아버지 말구요. 친아버지가 되어달라는 부탁인데요."

"뭐?"

은서는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으며 가볍게 경례하고는 사령부의 복도를 쓸쓸히 걸어 나갔다. 채명진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은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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