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부 2화. [여신이 되었다] (2)
[여신이 되었다]의 첫 번째 대본 리딩 연습날.
전날 잠을 설친 탓인지 시영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시영아, 시영아. 일어나.”
엄마가 시영을 깨웠다.
“유 매니저가 문 두드리고 난리 났어.”
시영은 휴대폰을 보았다.
[부재중 통화 20통]
캐톡을 확인하니 캐톡창도 난리였다.
[매니저 유떽떽] :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준비해.
[매니저 유떽떽] : 아직도 안 일어났냐?
[매니저 유떽떽] : 김시영, 지금 당장 일어나.
[매니저 유떽떽] : 김시영, 리허설 펑크 낼 일 있냐?
[매니저 유떽떽] : 집 앞이니까 어서 빨리 내려와.
망했네.
휴대폰을 확인하자 밀려오는 절망감.
“엄마, 지금 몇 시야?”
“11시 20분.”
“나 좀 깨우지 그랬어?”
“네가 깨우란 말을 안 했잖아.”
“아악, 어떡해 어떡해?”
씻을 시간도 모자랐다.
‘그렇다고 이은우를 보는데 안 씻고 갈 수도 없잖아.’
꿈에 그리던 첫 대면을 씻지 못한 몰골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시영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가 욕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시영아, 시영아, 유 매니저가 그냥 나오라고 했는데 시간 없다고.”
“몰라, 엄마. 유 매니저 와도 문 열어주지 마.”
“아니, 어떻게 문을 안 열어줘?”
시영은 재빠르게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대본 연습도 다 못한 거 같은데. 망했어. 망했어.’
***
대본 리딩을 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가는 차 안.
유 매니저와 김시영의 분위기가 냉랭했다.
적막을 깬 것은 유 매니저였다.
“요새 학교에서 힘드니? 갑자기 웬 늦잠이야?”
시영은 이은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어 말을 돌렸다.
“그 날이라서 그래요. 저 좀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요.”
“알았어.”
유 매니저는 시영의 그 날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여자들은 참 어렵단 말이지. 감정 변화도 많고 그게 생물학적 영향인 건가?’
평소엔 발랄한 시영이었지만, 가끔 오늘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했다.
‘여자라서 막 화낼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오늘처럼 생물학적인 이유를 대면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유 매니저는 차를 몰면서 생각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족히 한 시간은 늦은 거 같은데 뭐라고 하지? 하아, 진짜 한숨 나온다. 도로법까지 개정돼서 빨리 밟을 수도 없고. 오늘따라 사거리 신호는 왜 이리 족족 다 걸리는 거야.’
***
아무도 믿지 않을 변명이었지만 유 매니저는 이거라도 안 내밀면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심정으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차가 너무 많이 막혀서요. 하하하하하.”
날아오는 눈빛에 얼굴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나이 드신 배우가 없어서 다행이지.’
[여신이 되었다]는 대부분의 출연진이 십대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영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자리로 들어갔다.
몇몇 출연진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불만을 말하진 못했다.
조PD가 상황을 정리하며 출연진들을 다독였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시영 씨 담부턴 늦으면 안 돼요.”
“네. 절대 안 늦을게요. 절대.”
시영이 혓바닥을 내밀며 십대 소녀 특유의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우는 시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늦었네. 근데. 향수를 대체 얼마나 뿌린 거야?’
시영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시영은 은우의 표정을 보면서 이불킥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첫인상이 중요한데. 망했어. 망했어. 지각하는 사람 싫어하나 보다. 하긴 그렇게 인성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니까.’
시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본 리딩에 들어갔다.
[여신이 되었다]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오민하가 계단에서 미끄러진 후 머리를 다쳐 스스로를 미인이라고 믿게 되면서 일어나는 헤프닝을 그린 내용이었다.
‘이번 역할을 통해서 기존의 새침데기 이미지를 벗고 발랄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변신하는 거야.’
유 매니저와 처음에 세웠던 계획이 잘될지 머릿속이 복잡한 시영이었다.
씬 넘버 12.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민하.
복도에 놓인 자신의 모습을 자꾸 비춰본다.
그러다 계단으로 올라오는 은우(극 중 지후)와 부딪힌다.
[민하] : 아앗
[지후] : 아앗.
대본 리딩을 하는 은우 진짜 부딪힌 듯 이마를 어루만지며 연기한다.
민하, 지후를 알아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민하(마음의 소리)] : 민지후잖아. 우리 학교 아이돌!
민하, 지후의 팔을 털어주면서 대사한다.
[민하] : 미안해요. 미안해요. 실수였어요.
[지후] : 괜찮아.
지후, 민하의 명찰을 보더니 말한다.
[지후] : 2학년인가 보네.
[민하(마음의 소리)] : 아, 멋있어. 이름도, 이름도 불러주세요.
민하, 자신의 명찰을 가리키며 팔짝팔짝 뛰지만, 지후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 버린다.
민하, 지후가 사라진 자리에서 다이어리 하나를 발견하고 줍는데 지후는 이미 멀리 사라진 후다.
[민하(마음의 소리)] : 우리 학교 퀸카인 민지후의 다이어리가 내 손에 들어왔다.
씬 넘버 16. 학교 음악실.
민하를 괴롭히던 여학생 1, 2, 3. 늘 그랬듯 민하를 괴롭히러 다가온다.
[여학생 1] : 야, 오민하. 너 요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여학생 1, 민하의 어깨를 친다.
민하, 쫄지 않고 여학생1을 도로 밀친다.
여학생 2, 3이 민하를 에워싼다.
[여학생 2] : 이게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여학생 3] :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더니 머리도 같이 다쳤냐?
민하, 쫄지 않고 휴대폰을 보여준다.
[민하] : 니네 이렇게 나 괴롭힌 거 지금 다 업로드됐거든.
여학생 3, 민하의 휴대폰을 낚아채 화면을 확인하더니 소리 지른다.
[여학생 1] : 미친년.
[여학생 2] : 두고 보자. 언제까지 무사할지.
[여학생 3] : 학폭위 열리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여학생 1, 2, 3. 빠르게 사라진다.
[민하] :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시영은 씬이 진행될수록 점점 표정이 안 좋아졌다.
‘민하 역은 좀 더 발랄하고 까불까불해야 하는데. 마음에 안 들어. 이런 모습으로 상상하고 온 게 아닌데. 늦잠을 자서 그런가 하루 종일 꼬이는 기분이야.’
시영은 조PD의 얼굴을 봤다.
조PD 다시 하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나도 만족이 안 되는 연기인데 PD님 생각도 마찬가지일 거야. 오늘 정말 망했다.’
음악실의 민하, 거울을 바라보면서 예쁜 척을 하다가 행복한 듯 미소 짓는다.
[민하] : 난 여신이라고. 이 얼굴로 어떻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냔 말이야.
결국 조PD가 터지고야 말았다.
“좀 더 발랄하고 자신 있고 당당하게. 약간은 뻔뻔스럽게 말야. 그렇게 기운 없이 말하면 느낌이 안 살잖아. 느낌이. 민하는 이런 느낌이 아니라고. 잘하는 거 하나 없고 실수투성이지만 자신감 하나로 사랑스러운 그런 캐릭터라니까.”
시영이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조PD가 모두에게 말했다.
“십 분만 쉬었다 할게요.”
조PD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다른 배우들도 조용히 하나둘 대본 리딩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옆자리에 앉은 은우가 시영에게 힘내라며 젤리를 하나 건네줬다.
“기분 풀어. 긴장해서 그런 거 같아. 긴장만 풀리면 잘할 거야. 나도 그럴 때가 있었거든. 긴장해서 실력 발휘가 안 되는 때 말야. 그게 언제였냐면 [모아나]란 영화를 더빙할 때였는데 그게 내 첫 번째 애니메이션 더빙이었거든.”
“마우이 역이었지?”
“그래, 맞아. 근데 어떻게 알아? 방금 나도 내가 맡은 역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말을 못 하고 있던 참인데.”
시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네 팬이어서 네가 나오는 영화는 모두 다 봤어. 배역도 다 기억하는걸. 명대사도 다 외우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시영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로 했다.
“그 영화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거든.”
“와, 영광인데. 그 영화가 내 흑역사여서 그 뒤로 더빙을 안 했거든. 암튼 그거 더빙할 때 마우이가 주인공 모아나랑 같이 바다에 나가는 장면이 있었거든. 거기서 물에 빠진 역할을 해야 했었는데 물에 빠진 연기가 안 돼서 한참 고생했어.”
“그 장면 생각난다. 배가 뒤집혔었지. 결국 둘 다 무인도로 떠내려와서 죽진 않지만 말이야.”
은우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시영을 바라보았다.
“줄거리 다 기억하네. 똑똑한가 보다. 난 내가 출연한 영화 줄거리도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아서. 다섯 살 때 출연한 건 이제 기억이 안 나.”
시영은 ‘은우, 네가 출연한 영화이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다섯 살 때 영화에 출연했으면 기억 안 날 거 같아. 네가 여기 모인 배우들 중에 가장 선배인 거 아냐? 나이는 열여덟인데 데뷔한 지 십삼 년 차라니.”
시영의 말에 은우가 웃었다.
“사실 어디 가도 그래. 그래서 어디든 끼기가 좀 힘들어. 나이가 많은 배우분은 내가 어린데도 경력이 많아서 부담스러워하시기도 하고. 내 또래들은 내가 어려운가 봐. 인사는 하는데 말은 잘 안 시키더라고.”
“아마 너무 부러워서 그런 걸 거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위로 고마워.”
“고맙긴. 네가 먼저 날 위로해줬잖아.”
시영과 은우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은우가 시영에게 말했다.
“이제 긴장 좀 풀렸어?”
“응, 네 덕분에. 난 실제로도 민하랑 비슷한 면이 많아. 실수도 잘하고. 근데 이상하게 그동안 맡았던 역들은 모두 청순하고 조용한 모범생 역이 많았거든. 민하 역이 내 실제 성격과 비슷할 거 같아서 이미지 변신도 할 겸 민하 역을 맡겠다고 했는데 쉽지 않네.”
“잘할 수 있어. 민하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영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해 봐. 알았지?”
쉬는 시간이 끝나고 배우들이 리딩실로 돌아왔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듯한 조PD도 자리에 앉았다.
시영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나 오늘 이은우랑 얘기했다. 집에 가서 일기 써야지.’
다음 장면은 지후와 민하의 스킨십이 이뤄지는 수영장 장면.
씬 넘버 28. 수영장.
민하, 여학생 1, 2, 3을 피해 수영장으로 달려온다. 매우 숨이 찬 모습.
민하, 숨을 곳을 찾듯 두리번거리다가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자 수영장 물속으로 뛰어든다.
민하가 뛰어들자마자 도착한 여학생 1, 2, 3. 민하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카메라는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민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민하, 숨이 차오르지만, 코를 잡고 숨을 참고 있다.
[여학생 1] : 오민하! 여기 있는 거 다 알거든. 어서 나와.
[여학생 3] : 오민하,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여학생 2] :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여기가 아닌가?
[여학생 1] : 지가 무슨 마법사야? 여기로 도망치는 걸 분명히 보고 따라온 건데.
[여학생 2] : 그치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잖아.
[여학생 3] : 게다가 여긴 수영장 근처라 CCTV도 있을 거야. 우선 가자.
여학생 1, 2, 3이 퇴장하고, 민하는 소리를 듣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아무리 발을 뻗어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민하, 그제서야 자신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경악한다.
숨은 이미 턱까지 차올라 입 안으로 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다.
민하, 두 팔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지만 키가 작아서 손가락 끝만이 보일 뿐이다.
이때 지나가던 지후가 수영장 물 표면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물방울과 손가락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지후(마음의 소리)] : 납량특집인가? 귀신 놀이도 아니고 저게 뭐지?
지후, 좀 더 가까이 가서 물속을 바라보다가 민하의 까만색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
[지후(마음의 소리)] : 사람이잖아. 그것도 여자아이.
지후, 물속으로 몸을 날린다.
수영을 잘하는 지후는 금방 민하를 물 밖으로 끌어 올린다.
민하, 물 밖으로 나왔지만, 의식이 없어 보인다. 쓰러진 민하의 입으로 물이 흘러나온다.
[지후] :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지후, 민하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뺨을 때리지만, 민하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
지후, 망설이다가 민하의 얼굴에 입술을 대고 인공호흡을 실시한다.
민하, 서서히 정신이 돌아와 눈을 뜬다.
눈앞에 지후의 얼굴이 있음을 깨달은 민하가 소리를 지른다.
[민하] : 악!
지후,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표정.
민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씬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