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 외전-13화 (243/257)

외전 13화. 헌정 음반 (5)

은우의 솔로곡 녹음이 끝나고 안드레아와 은우가 함께 부르는 듀엣곡의 녹음이 시작되었다.

클라우디오는 악보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뮤지크]를 편곡한 곡이군. 이 곡이야 워낙 대중적이고 좋은 곡이니까. 근데 가사가 수달 가족의 이야기잖아.’

수달 가족의 하루가 담긴 너무나 귀여운 가사.

‘이렇게 귀여운 가사가 든 곡을 녹음하게 되다니? 작사가 이름엔 루시가 적혀 있는 걸 보면 루시가 작사한 곡이라는 건데?’

클라우디오는 프란체스카로부터 안드레아가 음반을 만드는 이유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안드레아에겐 이 음반이 특별할 수밖에 없겠어. 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음반이라니. 아무도 사지 않는다고 해도 만들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음반에 실린 모든 곡이 아름다워.’

[카르페디엠]이 고음을 통해 인간이 가진 목소리의 끝을 보여주는 곡이었다면 [수달 가족]은 잔잔한 봄의 햇살처럼 귀엽고 살랑살랑 귓가를 간질이는 봄바람처럼 다정한 곡이었다.

‘게다가 최고의 가수들인 은우와 안드레아가 이 곡을 함께 부른다니 더욱더 기대가 되는걸.’

제 1 바이올린과 제 2 바이올린의 연주가 시작되고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가 만들어내는 경쾌하고 아름다운 선율.

은우가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아기 수달

노는 게 제일 좋아

오늘은 무얼 할까.

내일은 어딜 갈까.

매일매일 놀아요.]

안드레아가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받았다.

[나는 아빠 수달

일하는 게 제일 싫어.

오늘도 일을 하고

내일도 일을 하고

매일매일 일해요.]

이어지는 은우의 노래.

[아빠 아빠 나랑 놀아요.

아빠랑 놀면 더 재밌을 텐데.

나는 매일 혼자 놀아요.

아빠도 놀고 싶죠?]

은우의 노래를 듣고 있는 안드레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다음에 이어지는 가사는 루시가 쓴 가사를 안드레아가 고친 것이었다.

‘루시가 처음 쓴 가사는 너무도 가슴 아픈 것이었어.’

[아빤 일해야만 해.

아빠에겐 팬들이 더 소중하단다.

팬들은 아빠에게 선물도 보내주고

응원도 해 주니까 루시보다 소중해]

[아빠, 그래도 나는 아빠를 사랑해요.

나랑 같이 놀아주세요.

나는 아빠가 유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아빠가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아빠가 매일매일 놀았으면 좋겠어요.]

안드레아는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이 쓴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도 노는 게 제일 좋아.

아빠에겐 루시가 가장 소중하단다.

하나뿐인 나의 딸.

너무 예쁜 나의 루시. 너는 나의 모든 빛]

이어지는 은우의 노래.

[아빠 나도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랑 같이 노니까 너무 좋아요.

내일은 모래 놀이를 할까요?

모레는 놀이 공원에 갈까요?

아빠와 매일매일 노니까 너무 좋아요.

아빠는 최고의 아빠예요.]

클라우디오는 미소를 지었다.

‘루시는 아빠랑 노는 걸 매우 좋아했구나. 안드레아는 좋은 아빠였어. 아이와 함께 충분히 놀아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야. 나도 우리 애들 어렸을 때 바빠서 놀아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많이 후회하고 있지만.’

***

안드레아는 은우가 보여준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위한 상담소]에 와 있었다.

직원에게 장소를 물어보러 간 유진호가 안드레아에게 빈 강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기다리시면 된다고 하네요.”

빈 강의실에는 차와 과자, 그리고 동그랗게 마주 보고 앉도록 돼 있는 빈 의자들만이 있었다.

몇몇 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이 사람들이 나와 함께 상담을 받게 될 사람들인가?’

안드레아는 상담이라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치료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잖아. 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싫어.’

안드레아의 옆에 유진호가 앉았다.

유진호가 안드레아에게 물었다.

“차를 타 드릴까요?”

“아니요.”

안드레아는 손가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긴장이 될 때면 나타나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유진호는 커피를 한 잔 타서 안드레아의 옆에 앉으려다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안드레아를 보았다.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긴장되시는 모양이네.’

유진호는 비행기 사고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

‘나도 몇 년 동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냈으니까. 대신 그 시간 동안 할머니, 할아버지와 관련된 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

자신의 행동이 방어기제 중의 하나였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인간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테니까.’

그런 마음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통역을 맡아 쉬는 날에 함께 상담을 받으러 온 유진호였다.

몇몇 사람들이 더 상담실로 들어오고 상담사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인자한 미소를 띤 오십 대의 여성 상담사가 말했다.

“이제 시간이 됐으니 상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할 테니 차나 과자를 드실 분들은 드셔도 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으신 분들도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자리에 앉은 내담자들은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강의실에 가득 찬 침묵을 깨고 상담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할게요. 오늘 상담은 각자 편하신 대화를 하면 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오늘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 얘기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거나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만약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냥 듣다가 가셔도 됩니다.”

유진호의 통역을 들은 안드레아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담의 방향에 놀랐다.

‘그냥 편안히 있으라는 거구나. 있는 그대로.’

상담사가 내담자들에게 물었다.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분 있나요?”

내담자들의 침묵.

“그럼 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죠. 전 지난주에 새로 수영을 시작했어요. 사실 저는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에요. 전에도 몇 번 수영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수영장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영영 수영을 못 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내담자로 오셨던 분 중 한 분이 수영강사셨어요. 저에게 수영장에 놀러 오라고 하더라구요. 수영 안 해도 되니까 자기가 수영을 가르치는 걸 보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수영장 밖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했어요. 성인반이기 때문에 수영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렇게 밖에서 멍하니 며칠 동안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다들 평화로워 보이더라구요.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던 게 저 사람들에겐 편안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물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영강사분께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이제부턴 수영장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전 오늘 하루 종일 수영장에 서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왔습니다.”

왜일까? 왜지?

안드레아는 상담사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드레아의 손이 편안하게 무릎 위에서 쉬고 있었다.

상담사의 말이 끝나자 양복을 입은 사십 대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다음엔 제가 하고 싶군요.”

상담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회사가 끝나고 식당에 갔습니다. 그 식당은 오랜 단골이에요. 제가 스무 살 때부터 다녔던 곳이에요. 사장님이 저를 알아보시고 여러 가지 스키다시를 주셨습니다. 아시죠? 원래 초밥엔 스키다시 안 나오는 거? 스키다시로 꽁치와 구운 버터 옥수수콘을 주셨어요. 저는 구운 버터 옥수수콘을 보고 멍하니 있다가 그 가게를 빠져나왔습니다. 계산도 하지 않은 채로요.

그러고 나서 거리를 몇 시간 걸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생각했다.

‘옥수수콘 때문에 저녁을 굶었다는 건가? 대체 왜?’

상담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좋은 이야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30대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제가 이야기해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저는 지난 주말에 납골당에 다녀왔어요. 제 아이는 삼 년 전에 어린이집에 갔다가 어린이집 차량에 치였죠. 아이가 죽고 나서 남편과 미친 듯이 싸웠어요. 서로 할퀴고 물어뜯어야 견딜 수 있었거든요. 작년에 남편과 이혼했어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를 했어요.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건 무엇도 견딜 수 없었거든요. 배우고 싶던 베이킹을 배웠고 아이의 납골당에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커피숍을 차렸어요. 그리고 얼마 전엔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연애도 시작했어요.

아이가 죽고 난 직후에 비하면 제 삶은 다시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근데 가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 목소리가 제게 묻죠. 엄마 난 다 잊었어? 엄마 나는?

잘 지내다가도 그 목소리만 들리면 미칠 거 같아요.”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상담사는 조용히 여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저도 그랬던 때가 있었어요. 저희 아이는 물에 빠져서 죽었답니다. 백만 번도 넘게 그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그때 왜 아이를 보지 못했을까? 조금만 빨랐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내가 아니고 아이였을까?

그 생각들을 너무 많이 하면요. 생각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돼요. 아이의 죽음에 당신의 잘못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오는 모든 부모님들께 드리는 말씀이에요. 우린 이 한 마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기 모인 거예요.

물론 저조차도 그 일이 쉽지 않네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죠. 나를 용서하는 일.”

안드레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음속에선 상담사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죠. 나를 용서하는 일.’

***

광고 감독인 태윤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이태원으로 나왔다.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경석이 수제 맥줏집에 앉아서 태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햄버거 세트 하나 시켰다. 뭐 먹을래?”

“연어 샐러드랑 토마토 해물 파스타.”

경석이 알바생에게 메뉴를 추가로 주문한 뒤 태윤은 경석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물었다.

“노래 좋다. 누구 노래냐?”

“아, 이거 안드레아가 낸 헌정 음반이야. 죽은 딸을 추모하는 음반이래.”

“추모 음반치곤 노래가 너무 신나는데?”

“너는 무슨 틀딱 같은 소릴. 헌정 음반이라고 다 슬퍼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근데 무슨 노래가 이렇게 귀여워? 이거 누가 부른 거야?”

“안드레아랑 은우가 듀엣으로 부른 거야.”

“이은우? 이은우, 활동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

“쉬어도 음반은 낼 수 있잖아. 넌 광고한다면서 새로 나온 음반도 안 듣고 뭐 하냐?”

“난 광고 감독이지 뮤직비디오 감독이 아니라고.”

“광고나 뮤직비디오나 둘 다 영상을 만드는 거잖아. 감이 얼마나 중요한데 감이. 갬성 말야. 갬성 몰라? 게다가 지금 이 음반 각종 차트에서 핫하다고 빌보드 차트에도 진입했단 말이야. 팝페라 음반이 빌보드에 진입한 건 [Time to say good bye] 이후에 십 년 만이라고 하더라. 그것도 안드레아가 가진 기록이라고 하긴 하는데.

그리고 수박 차트에도 올라와 있다고 98위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럴 리가? 수박 차트는 내가 어제 낮에도 확인했는데.”

“오늘 아침부터 올라왔어. 오늘 아침에 발매된 음반이니까.”

“진짜 핫한 음반이네.”

태윤은 경석의 휴대폰을 빼앗아 곡 정보를 보았다.

‘총 다섯 곡이 실린 헌정 음반이라 팝페라 위주의 곡들이긴 한데 지금 나오는 [수달 가족]이라는 곡은 너무 귀엽잖아. 이 곡을 새로 만들 광고에 넣으면 어떨까?’

B사에서 나온 신차 패스트는 가족의 사랑을 담는 차라는 컨셉으로 30-40대의 젊은 부부들을 타깃으로 나온 자동차였다.

‘그렇지 않아도 쓸만한 곡이 없어서 고민 중이었는데 잘됐네.’

태윤이 경석의 목에 헤드락을 걸며 말했다.

“고맙다. 친구야. 네 덕분에 하나 건졌는데.”

태윤이 경석에게 물었다.

“경석아, 근데 성악가들도 광고 찍을까?”

“조수미 씨도 전에 찍었던 거 같은데.”

“그래, 그럼 어서 섭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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