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헌정 음반 (4)
안드레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은우가 안드레아에게 말했다.
“제가 루시를 위해 노래를 만들었어요.”
안드레아는 감격한 눈빛으로 은우를 바라보았다. 은우가 키즈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켰다.
낮고 부드러운 바이올린의 선율이 키즈폰에서 흘러나왔다.
‘가을날의 낙엽을 떠올리게 하는 쓸쓸하고 낭만적인 선율이네.’
그 위에 덧씌워진 은우의 가늘고 고운 미성.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아요.
당신의 슬픔을 바라보고 있죠.
내 아픔보다 더 슬픈 건 당신의 눈물.
나는 하늘의 구름이 되었어요.
여기서 머물다 비가 돼 다시 내릴 거예요.
그때 내가 당신을 적셔도
당신은 울지 말아요.
내가 비가 돼 내리는 날
당신에게 우산이 없네요.
비에 젖은 당신 때문에
나도 한참 울었어요.
나는 강물이 돼 강가를 흘러요.
매일 저녁 창가에 서서 울고 있는 당신을 보죠.
이제 당신 곁을 떠나야 할 시간
제발 날 위해 웃어줘요.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내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당신도 나를 위해 웃어줘요.]
안드레아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루시가 은우의 입을 빌려서 노래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래, 루시. 보내줘야 하겠지? 그래야 하겠지? 알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되네.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잘 안 돼.’
안드레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루시, 그래도 네가 걱정하지 않게 조금씩 더 노력해 볼게.’
노래가 끝난 뒤 은우가 조용히 안드레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강라온이 안드레아에게 휴지를 건네자 은우가 휴지로 안드레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노래가 정말 좋다. 은우야.”
정말로 많은 곡들을 들었지만, 은우가 만든 곡처럼 자신의 마음을 울린 곡은 없었다.
울고 싶던 아이가 어딘가를 맞은 것처럼 안드레아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네.’
은우는 계속해서 안드레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은우의 작은 손에선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향이 났다.
‘루시에게도 이런 냄새가 났었지.’
안드레아는 루시를 떠올리는 자신의 습관을 돌아보았다.
‘생각이 나더라도 슬프지 않게. 그래야 루시가 편할 테니까.’
안드레아는 은우의 노래를 들으며 이번 헌정 음반의 제목을 정했다.
‘[Beautiful life]. 루시야 넌 내게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준 사람이야. 우리 딸. 아빠가 널 위해서 씩씩하게 지낼게.’
안드레아가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이 곡도 이번 앨범에 싣자.”
“좋아요.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한 게 있어요.”
은우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더니 하나의 기사를 보여주었다.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
각종 사건과 사고로 자녀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상담이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 주소로 연락 주세요. 방문이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온라인 상담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은우는 친절하게 번역기 어플을 연결시켜서 번역된 기사를 보여주었다.
‘은우가 나를 정말 걱정했구나. 노래도 만들어주고 상담도 찾아봐 주고. 고마워. 은우야. 너를 위해서라도 빨리 힘을 낼게.’
안드레아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곳이구나. 이런 곳이 있는지 진작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은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은우야, 내일부터 우리 녹음 열심히 진행해 보자.”
“네네네네네.”
오랜만에 은우가 은우식 대답을 하자 강라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은우 그 대답 오랜만이다. 어렸을 땐 그 대답만 하더니 한동안 안 했었잖아.”
은우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끔은 어려지고 싶을 때도 있는 거라고요.”
은우는 안드레아에게 밝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기운도 없고 힘들어 보이셨어. 내가 루시였다면 얼마나 슬펐을까?’
은우는 안드레아 옆에선 귀여운 아기처럼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안드레아는 호텔의 이불 속에서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했다.
‘어서 녹음실에 가야지.’
삶에 대한 의지가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프란체스코가 이번에 만든 곡은 정말로 마음에 들어. 고음 파트도 아름답고.’
4옥타브를 넘나드는 넓은 음역대로 구성된 [카르페디엠]은 후반부에 빠르게 도약하는 고난이도의 부분이 부르기 어려운 곡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부르기만 한다면 음악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지.’
오늘의 녹음곡은 은우의 솔로곡과 안드레아와 은우가 함께 부르는 듀엣곡이 준비돼 있었다.
‘신이 나는데.’
안드레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택시를 타고 녹음실로 향했다.
녹음실에선 먼저 도착한 은우가 목을 풀고 있었다.
“핑크 샤쟈. 핑크 샤쟈. 핑크 샤쟈.”
안드레아는 은우의 아이다운 목 풀기에 미소를 지었다.
‘핑크 사쟈로 음역대를 확인하는 가수라니. 너무 귀엽잖아. 저렇게 귀여운 가사로 어마무시한 음역대를 자랑하다니.’
은우의 목 풀기를 듣고 보니 5옥타브는 정도는 가뿐히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5옥타브라면 성악가들 중에서도 콜로라투라(여성 소프라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음역대를 부르는 가수. 빠르고 경쾌한 창법이 특징임) 정도나 돼야 가능한 그런 음역대.’
음반에서 들었던 것보다 은우는 더 괴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남들은 몇십 년간 갈고 닦아야 낼 수 있는 소리를 내고 있다니.’
테너인 안드레아에게 그가 낼 수 없는 화려한 음역대를 가진 콜로라투라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콜로라투라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지. 화려함이 그들의 무기지만 지나친 화려함에 압도되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안드레아의 스승인 피에르토는 안드레아에게 말했다.
“노래는 진심을 담는 것이지 화려하게 뽐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같은 테너들이 줄 수 있는 편안한 선율이 가장 진심을 담기에 좋지. 너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뽐내고 싶으냐? 감동을 주는 가수가 되고 싶으냐?”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스승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감동을 주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목소리에 힘을 빼라. 네 목소리를 뽐내기 위해 노래를 가리지 마라. 네 목소리는 악기가 될 뿐 사람들이 네 목소리를 기억해서는 안 된다.”
열여덟 살의 이른 데뷔 후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안드레아는 스승의 말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되돌아보면 어떤 날은 목소리를 뽐내기 위해 어떤 날은 감동을 전하기 위해 노래를 했던 것 같다.
‘무엇이 우선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성공만 좇다가 시간이 지나갔구나.’
안드레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라도 그 의미를 되살려보겠습니다.’
목 풀기를 끝낸 은우가 열 손가락으로 발톱 흉내를 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드레아 아저씨. 저는 은우 사자예요.”
“반가워. 은우 사자.”
녹음 감독 클라우디오가 커피를 뽑아서 들어왔다.
“드디어 둘 다 도착했군. 슬슬 시작해 볼까? 첫 곡은 은우 솔로곡부터. 은우야, 긴장되니?”
클라우디오는 은우처럼 어린 가수와 녹음을 하는 게 처음이어서 은우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함께 하고 있었다.
‘워낙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한 아이긴 한데 악보가 너무 어려워.’
프란체스카가 만든 [카르페디엠]은 아름다운 곡이었지만 부르기에 너무나도 어려워 보였다.
‘오늘 하루 안에 녹음이 끝나기는 할까?’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작업한 클라우디오가 보기에도 [카르페디엠]은 히말라야 산 정상에 홀로 핀 꽃 한 송이처럼 임자를 찾기 어려운 곡으로 보였다.
“네네네네네.”
은우의 밝은 대답에 클라우지오는 놀랐다.
‘전혀 긴장이란 게 없네. 이 아이. 아직 어려서 그런 건가? 그래도 예민한 사람보다는 훨씬 낫군.’
클라우지오가 겪었던 최정상의 성악가들은 대부분 지나칠 정도의 완벽주의자면서 예민한 사람들이 많았다.
‘물비린내가 난다고 컵을 집어 던졌던 성악가도 있었고 노래를 부를 때 너무 긴장해서 손톱을 이로 갉는 성악가도 있었지.’
은우는 녹음실 안에 들어가서도 마이크 앞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이 언제까지 가나 볼까?’
클라우지오가 연주곡을 틀었다.
산뜻한 플롯의 선율이 민트향처럼 녹음실을 파고들었다.
피아노가 그사이를 총총거리는 토끼처럼 뛰어들어가면.
‘어라? 왜 시작을 안 하지?’
분명 노래가 시작돼야 하는 시점인데 은우는 노래를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노래 시작 부분을 모르는 건가? 케이팝 가수라고 하더니 악보를 볼 줄 모르나?’
어릴 때부터 정식 음악 학교를 다니는 성악가들은 악보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 중에서는 종종 악보를 볼 줄 몰라서 노래를 외워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보통 절대 음감을 지닌 가수들이 그렇다고 하긴 하던데.’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역시 인터뷰에서 자신은 악보를 볼 줄 모른다고 당당히 말하였다고 하니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의 실력을 알만하다고 클라우지오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수가 악보를 볼 줄 몰라서야.’
그것은 기본을 소홀히 한 탓이다. 전쟁에 나갈 때 총을 놓고 나가는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이건 업무 태만이요. 예술에 대한 기만이었다.
클라우지오는 내버려 두려다가 은우의 어린 나이가 안타까워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클라우지오가 녹음실로 전달되는 마이크를 켰다.
“아까 치고 들어온 제 2 바이올린 소리가 기준이잖아. 그때 가사를 시작했어야지.”
은우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연주를 들으니 제 1 바이올린이 음을 틀려서요. 제가 노래를 불러도 연주가 잘못돼서 녹음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서요.”
클라우지오는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깜짝 놀랐다.
‘연주가 잘못됐다고?’
클라우지오는 다시 연주곡을 켜서 귀를 곤두세우고 처음부터 음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된 지 2분쯤 지났을 때 클라우지오는 제 1 바이올린이 두 개의 음을 연달아 플랫 시킨 것(반음 올린 것)을 발견해냈다.
‘저 아이, 절대 음감인가? 방긋방긋 웃고 있어서 집중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다 알고 있었다니?’
클라우지오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라고 해서 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편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군.’
클라우지오는 기계음 조작을 통해 제 1 바이올린의 음을 교정했다.
‘우선 이렇게 교정해서 쓰고 나중에 교향악단에게 다시 연주를 부탁해야겠어.’
이탈리아에 있는 교향악단이 다시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클라우지오는 연주와 노래를 떼었다가 다시 합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음 교정했으니까 다시 녹음할게요.”
다시 녹음실 안에 노래가 흐르고
산뜻한 플롯의 선율과 경쾌한 피아노의 음색이 더해졌다.
거기에 왈츠를 추듯 뿌려진 바이올린의 연주.
[낡은 페인트 통 속에 오래된 붓.
나는 그 붓을 들어 거리에 색칠을 하죠.
햇살이 빛난다 너무 달콤해.
바람이 분다 너무 시원해.
노을이 진다 너무 행복해.
거리를 파란색으로 물들여요.
거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여요.
거리를 빨간색으로 물들여요.
거리엔 많은 사람들.
모두 사랑을 노래해.
반짝이는 사람들.
반짝이는 사랑들.
반짝이는 젊음들.]
클라우지오는 은우의 목소리에 감탄했다.
‘음색이 너무 아름다워.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남자아이의 음색이 아니라 여자아이의 음색에 가까워. 하지만 내가 본 어떤 여자아이보다 맑고 고운 음색을 가지고 있어. 은우에게 변성기가 오면 정말 아쉬울지도 모르겠는데.’
비트에 댄스가 추가되면서 노래의 분위기가 빠르게 변화하는 부분이 시작되고
노래는 점점 후반부로 치달아 가고 후반부에는 빠르게 도약하는 고난이도의 음들의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속삭이듯 선율을 따라가는 은우의 노래.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클라우디오는 은우의 정확한 음정에 놀랐다.
‘아음의 반복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잘못하면 음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정확하게 음계를 짚고 있어. 정말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악기라는 말이 맞군.’
콜로라투라만이 낼 수 있는 고음의 화려함이 빛나고 있었다.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스타카토로 끊어치는 빠르고 높은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비행기의 활주를 보는 듯이 부드럽게 높은 고도에서 낮은 고도로 활강하는 것 같은 음들의 비행.
클라우디오는 무릎을 쳤다.
‘이 음반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명반으로 인정받게 될 거야. 케이팝에서 이렇게 훌륭한 가수를 발굴해 내었다는 사실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