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헌정 음반 (2)
안드레아의 메일을 읽은 강라온은 고민에 빠졌다.
‘전 재산을 걸었다. 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전 재산을 걸 수 있는 거지?’
오십이 넘어서까지 세계 최고의 테너로서 활동한 안드레아.
테너로서는 드물게 크로스오버 앨범 활동을 하면서 골든 글러브의 최고 가수상을 받기도 했다.
‘사라 브라이트만과 불렀던 타임 투 세이 굿바이는 지금도 전설의 명반 대열에 들어있는 앨범이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평생 가지고 싶어 하는 금액을 쉽게 포기하겠다고 하다니?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을 거라고 강라온은 생각했다.
‘하지만 돈은 우리도 충분히 있어. 게다가 출연료로 전 재산을 받는다면 대중의 눈이 결코 좋지 않을 거야.’
딸을 위한 헌정 음반이라.
강라온은 안드레아의 딸에 대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별스타에는 안드레아의 부인이 올려놓은 루시의 사진들이 있었다.
‘이 아이였구나? 여덟 살이라면 지금 은우랑 같은 나이인데.’
사진 속에서 사탕을 쥐고 밝게 웃고 있는 루시는 빨강 머리에 눈가에 난 주근깨가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이번 앨범도 크로스 오버 앨범이 되려나? 매력적인 제안이긴 한데 자세한 답변을 더 들어봐야겠어.’
강라온은 안드레아에게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은우의 기획사 대표를 맡고 있는 강라온이라고 합니다. 보내주신 메일을 잘 받았습니다. 좋은 제안 주신 것에 대해 매우 감사드립니다.
은우는 작년에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하여 일 년 정도 활동을 쉰 상태입니다. 현재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작품들을 보면서 고민하던 중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안드레아 선생님의 음악적인 열정과 따님에 대한 헌정 음반이라는 앨범의 취지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은우로서도 중요한 선택이 달린 문제이기에 음반에 대한 더 자세한 계획을 듣고자 합니다.]
강라온은 메일을 발송한 뒤, 사라브라이트만과 안드레아가 부른 음반을 켰다.
[Time To say goodbye.
paesi che non ho mai veduto e vissuto con te
adesso s? li vivr?
안녕이라 말해야 할 시간.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당신과 함께 하지 못했던 그 세상]
***
안드레아가 사비나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요? 안드레아.”
“사비나. 오랜만이에요.”
“식사는 잘하고 있어요?”
“그냥, 그렇죠. 저기 사비나. 부탁이 있는데 우리 집에 와서 청소랑 식사 준비 좀 해주겠어요?”
안드레아를 중학교 때부터 봐왔던 사비나는 안드레아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걱정하는 인물이었다.
“당연하죠. 안드레아,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전엔 혼자 있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만 가기로 했던 거고.”
“이제 그만 슬퍼하기로 했어요.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좋아요. 그럼 내일부터 갈게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라비올리요.”
수화기 너머로 사비아가 만들어내는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
라비올리는 루시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루시, 아빤 늘 너와 함께이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 안드레아는 진열장에 있는 술들을 꺼내 싱크대에 부었다.
‘술은 그만 마실 거야.’
온 집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사바나가 오기 전에 그래도 청소기 정도는 돌려놓는 게 좋겠지?’
청소기를 돌리며 안드레아는 엉망이 된 집안을 보았다.
‘저기 거미줄도 있구나. 일 년 사이 정말 많은 게 변했어.’
일 년 전만 해도 루시의 웃음과 아내의 온기가 가득하던 집이었다.
‘루시, 우리의 공간을 다시 깨끗하게 하도록 할게.’
안드레아의 휴대폰에서 알림 소리가 났다.
‘누구지?’
일 년 정도 활동을 멈추자 오는 전화도 드물어진 휴대폰.
‘메일이 왔네.’
안드레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메일함을 클릭하니 강라온이 보낸 메일이 떴다.
‘헌정 앨범의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는 걸 보면 긍정의 의미로 생각해도 되려나?’
안드레아는 친한 작곡가인 프란체스코에게 전화했다.
“프란체스코.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프란체스코의 목소리가 흑빛으로 변했다.
“무, 무슨 일이야? 얘기해 봐.”
무언가 마음의 준비를 굳힌 듯한 분위기에 안드레아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프란체스코 나쁜 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사람들이 다 내 전화를 받으면 걱정을 하다니.”
프란체스코가 당황한 듯 말을 이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난 다만 네가 걱정돼서.”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다시 일하기로 했거든.”
“정말?”
“응, 루시를 위한 헌정 음반을 만들 거야. 도와줄 거지?”
“생각해 둔 곡은 있어?”
“루시가 좋아하던 곡을 몇 곡 골라보려고 해. 그리고 내가 루시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도 몇 곡 넣고. 그리고 이 음반은 이은우라는 가수와 함께 하게 될 거야.”
“이은우라면 그 [위대한 목소리 – 파리넬리]에 나왔던 그 배우?”
이은우라니. [위대한 목소리] 영화에서 노래를 잘 불러서 유명해진 배우였다. 전문 성악가가 아닌가 할 정도로 맑은 음색에 놀라운 고음을 자랑해서 성악계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졌었다.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가 아닌가? 배우는 어디까지나 배우지. 가수와는 영역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프란체스카의 생각이었다.
“맞아. 그 가수. 루시가 그 가수랑 노래를 부르는 것이 소원이었대. 가수가 돼서 말이지.”
루시의 꿈이 가수였다니.
프란체스카는 너무도 작고 귀여운 그 꿈에 마음이 아팠다.
‘루시 넌 음치였지만 네 노래는 세상 어떤 사람의 노래보다도 더 사랑스러웠어.’
프란체스카가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
강라온은 안드레아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먼저 답장을 주신 것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루시를 위한 앨범은 [타임 투 세이 굿바이] 앨범을 제작을 맡아주었던 작곡가 프란체스카와 작사가 루치오가 함께 만들어주기로 약속이 된 상태입니다.
루시가 좋아했던 곡 몇 곡과 제가 루시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으로 앨범을 선정할 생각입니다. 혹시 은우가 넣고 싶은 곡이 있다면 그 곡도 넣을 수 있으니 자유롭게 생각을 이야기해 주셔도 좋습니다.
우선 제가 루시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으로 생각한 [오월의 어느 멋진 날]의 편곡 파일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편곡은 프란체스카가 도와주었습니다.]
강라온이 파일을 재생했다.
[un bel giorno di maggio
Ho afferrato la tua mano.
Stavi sorridendo sotto il sole.
오월의 어느 멋진 날
난 너의 손을 잡았지.
넌 햇살 아래에서 웃고 있었어.]
언제 들어도 편안한 아리아의 선율 위에 부드럽고 편안한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실려 있었다.
‘일 년 동안이나 쉬었다고 하시던데 실력은 여전하시네.’
첫 소절을 듣자마자 강라온은 안드레아에게 매료되었다.
***
[베이비가 돌아왔다]의 방영 이후 맞이한 첫 번째 주말.
창현이 아이들을 위해 월남쌈을 만드는 중이었다.
은우와 은혁이 어린이용 칼로 채소를 자르고 있었다.
은정이는 유아용 의자에 앉아 은우가 자른 파프리카를 손에 들고 먹고 있었다.
백수희가 창현에게 말했다.
“이제 애들이랑 나가면 사람들이 저보다 애들을 더 먼저 알아본다니까요.”
“재밌을 거 같아서 출연한 건데. 사생활이 없어진 건가?”
“재미는 있었어요. [베이비가 돌아왔다]가 아니면 언제 애들끼리 하루를 지내고 음식을 해 보겠어요?”
“그건 그래. 난 은혁이가 요리를 그렇게 할 줄은 몰랐거든.”
“저도요. 근데 덕분에 [바나 스프]에서 새로운 제품도 만들어내고 또 광고도 찍고 좋았죠. 사람은 못 하는 게 좀 있어야 매력적이에요. 그치 은혁아?”
은혁이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엄마, 저 요리 못 하지 않아요. 최고의 요리사라고요.”
은정이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파프리카를 손에 든 채 소리를 질렀다.
“아아.”
창현이 은정이를 달래며 대답했다.
“요리를 못 하는 것도 난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대신 당신은 잘 먹어주니까 내가 요리를 하는 즐거움이 있죠.”
“거봐요. 제가 요리까지 잘했으면 당신이 채워줄 빈틈이 없었을 거라고요.”
은혁이가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 말했다.
“네, 엄마, 아빠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러니까 사랑싸움은 이제 그만이요.”
은정이도 동의한다는 듯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아아.”
은우가 자른 야채를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다 했어요.”
창현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거실에서 만들어 먹을까? 월남쌈은 넓게 펴 놓고 먹는 게 제맛이거든.”
은혁과 은우, 은정이가 나란히 대답했다.
“네.”
“네.”
“녜.”
거실에 테이블을 놓고 각종 채소와 새우, 고기, 그리고 소스를 담은 그릇들이 등장했다.
커다란 볼에 담긴 물과 접시에 담긴 라이스 페이퍼.
백수희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맛있겠다.”
은우도 손을 닦고 와서 말했다.
“배고파요.”
창현이 문득 생각에 담겼다.
“근데 식사 전에 우리 애정도 테스트 한 번만 해 보는 건 어때?”
백수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애정도요? 애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테스트하게요?”
“은혁이, 은우는 의미 없구요. 은정이는 아직 말이 명확하지 않으니 엄마를 좋아하나 아빠를 좋아하나 한번 해 보자는 거죠.”
“아, 그거 별스타에서 본 거 같아요. 아기가 엄마, 아빠한테 빠르게 걸어가거나 기어가거나 하는 거 말이죠?”
“맞아요. 그거.”
“뭘 그런 걸 해요. 그냥 물어보면 되지. 은정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은정이는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투로 백수희를 빠안히 쳐다보았다.
창현이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아빠. 아빠. 은정아, 아빠가 최고지? 아빠가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주고 우리 은정이 머리도 예쁘게 묶어주잖아.”
백수희도 지지 않고 열을 올렸다.
“은정아, 은정이 누가 이렇게 이쁘게 낳아줬어. 엄마가 열 달 동안이나 은정이 뱃속에서 키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다고 배도 나오고. 엉엉.”
백수희는 가짜로 우는 흉내를 냈다.
은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빠안히 창현과 백수희의 얼굴을 교대로 바라보았다.
창현과 백수희는 긴장한 표정으로 은정이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은정이가 작은 입으로 대답했다,
“오빠.”
듣고 있던 백수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빠라고? 엄마, 아빠 중에 고르라니까.”
창현이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수희 씨 누구든 좋아하면 됐죠. 가족이잖아요. 어쨌든 우리 다 졌으니 함께 무승부로 해요. 무승부로.”
은정이는 엄마와 아빠의 기분을 아는지 은우를 바라보면서 두 손을 내밀었다.
“오빠. 아나져.”
은우가 은정이를 품에 안았다.
‘이제 활동을 시작하면 지금처럼 많이 은정이랑 놀아주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하지? 다른 건 전혀 아쉽지 않은데 은정이랑 더 놀지 못하는 건 아쉬워.’
***
안드레아는 강라온의 답장을 받고 신이 나 있었다.
‘은우가 함께 음반 작업을 해주기로 했어.’
안드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루시, 아빠가 너의 꿈을 이뤄줄게. 조금만 기다려.’
하늘의 구름이 루시의 눈웃음을 닮은 것 같다고 안드레아는 생각했다.
‘이제 한국으로 간다.’
은우의 학교 일정 때문에 음반 녹음을 한국에서 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프란체스코는 한국이라는 말에 난색을 표했지만, 안드레아는 상관없었다.
‘다 잘될 거야.’
지구를 열 바퀴 이상 돌았던 안드레아였지만 한국에 갔던 적은 없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안드레아는 루시의 그림 속에서 한국에 대한 몇 가지 단서들을 알 수 있었다.
‘비빔밥을 먹고 한복을 입는 나라.’
루시는 너투브를 통해 보게 된 한국에 대해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았다.
‘루시가 좋아하던 나라. 루시가 살아있을 때 함께 갔으면 더 좋았겠지?’
안드레아는 자신의 눈에 한국을 담아 루시에게 보여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안드레아는 택시를 타고 밀라노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밀라노의 흐린 봄 하늘을 보며 안드레아는 루시를 떠올렸다.
“아빠, 루시는요. 비가 오면 빗방울들이 통통통 뛰어다니는 거 같아서 좋아요.”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가 오는 날도 아이에겐 저마다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루시 넌 내게 선물 같은 존재였어.’
지금 눈앞에 볼 수 있는 슬픔이 있더라도 함께 보낸 그 아름답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루시, 내 아가. 다음 생에도 널 다시 만나고 싶구나.’
안드레아는 흐린 하늘을 보면서 웃었다.
루시가 구름 속에서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아빠, 루시는요. 흐린 날이 되면 화분에 물을 주고 싶어져요.”
“왜?”
“비가 안 오니까 화분이 비 기다리다가 목 아플까 봐서요.”
너무도 귀여운 대답에 안드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