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스프 광고 (1)
“잘 지냈어? 은우야.”
길동은 오랜만에 만난 은우가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안 본 사이 정말 많이 컸네. 볼살도 조금 빠지고 성숙한 느낌이 생겼어. 더 잘생겨졌는걸.’
길동이 자신을 아는 체하지 않자 은정이는 서운한지 고개를 홱 돌렸다.
은우가 은정이의 마음을 눈치채고 길동에게 말했다.
“형, 우리 은정이 처음 보죠? 깍쟁이라 먼저 아는 척 안 해주면 잘 삐져요.”
“하하하하하. 그래? 내가 은정이구나. 사진에서 본 것처럼 백수희 씨 미니미네. 눈은 딱 은우고.”
은정이는 길동을 살짝살짝 곁눈질하다가 다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확실히 여자아이라 다르구나. 은우도 시완이도 이러지 않았었는데. 신기하네.’
길동은 은정이의 성격이 신기했다.
세 살의 밀당고수라니.
“은정이 너무 예쁘다. 세상에 누가 이렇게 예뻐?”
길동이 일부러 큰 소리로 은정이를 칭찬하자 그제야 은정이가 살짝 고개를 돌려 길동을 보았다.
은우도 추임새를 맞추었다.
“은정아, 길동이 삼촌이 우리 은정이 너무 이쁘다고 하네. 역시 우리 은정이야 그치?”
은정이가 기분이 풀린 듯 방긋 웃었다.
“그럼 우리 이제 촬영하러 가볼까?”
은우가 은정이를 품에 안았다.
길동이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형이 안을게. 형 요새 시완이 기르느라 애기 안는 데 도 텄거든.”
“참, 시완이는 잘 있어요?”
“자다 깨서 우는 것만 빼면 잘 있지. 정말 애기 태어나고 나서 제대로 자 본 날이 없는 거 같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위대하다. 왜 애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니까?”
“형, 진짜 애 키우는 건 힘든 일 같아요. 그치만 그만큼 보람 있지 않아요? 저도 은정이 볼 때 힘들 때도 있는데 그래도 은정이가 웃으면 힘든 게 다 사라지더라구요.”
길동은 은우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가끔 애랑 이야기하는 건지 어른이랑 이야기하는 건지 헷갈린다니까. 은우는 예전부터 그랬어. 육아 고충을 이해하는 초등학생이라니? 대체 넌 정말 어디서 온 거니? 은우야.’
은우에게 안긴 은정에게 길동이 팔을 내밀며 말했다.
“은정아, 오빠 힘드니까 삼촌에게 안기자.”
은정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길동을 외면했다.
“시쪄.”
은정이는 은우의 목에 매달리듯 강하게 안겼다.
“은정아, 삼촌 품도 편하다니까 이리 와 봐.”
은정이는 돌린 고개를 절대 길동의 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시완아, 시완이 어딨어? 딸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나도 아들 있다고. 우리 시완이도 여기 있었으면 내 목에 매달렸을 텐데.”
길동의 하소연을 듣고 은혁이 빵 터졌다.
“삼촌, 은정이는요. 은우바라기예요. 같은 오빠라도 저에겐 잘 안 온답니다.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세요. 근데요. 옆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게 은우는 정말 아기를 잘 봐요. 엄마보다 더 잘 볼 때도 있거든요.”
“엄마보다 더 잘 본다고? 은우야 대체 넌 정체가 뭐니?”
“그냥 생각해 봐요. 은정이가 울고 있으면 불편한 게 뭐가 있는지. 보통 아기들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젖었거나 졸린데 잠이 잘 안 와서 짜증이 나거나 그런 이유거든요. 그런 걸 다 생각해 보고도 잘못된 게 없으면 은정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봐요. 뭐가 기분 나쁠까 하고요.”
길동은 은우의 대답에 넋을 놓았다.
“은우야 진짜 너 이번 삶이 몇 번째니?”
은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
은우 일행이 도착하자 조연출이 콘티를 보여주며 촬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촬영은요. 저희가 [베이비가 돌아왔다] 방송을 보고 만든 시제품으로 촬영을 할 거예요. 여기 이렇게 일회용 컵이 함께 들어있어서 물 맞추기가 쉽도록 시제품이 나왔거든요.”
은혁이 일회용 컵을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와, 좋다. 진작 이런 것 좀 만들어주지. 그럼 요리할 때 안심이 됐을 텐데.”
조연출이 설명을 이었다.
“오빠의 망친 요리 때문에 오빠의 요리를 믿지 않는 은정이가 새로 산 일회용 컵이 든 스프로 한 요리를 먹어본 후에 오빠의 요리를 좋아하게 된다는 줄거리야. 사실 오늘 연기는 은우랑 은혁이보단 은정이가 중요한데.”
은정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연출을 바라보았다.
“은정아, 네 표정 연기에 모든 게 달려있어. 맛없는 표정이랑 맛있는 표정 좀 실감 나게 부탁해.”
은정이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햇살이 드는 일요일 오후 같은 따스한 풍경으로 꾸며진 세트장.
탁자에 둘러앉은 은혁, 은우, 은정이.
보리가 아이들 사이를 꼬리치며 돌아다닌다.
그때 은우의 뱃속에서 울리는 꼬르륵 소리.
은정이가 그 소리를 듣고 해맑게 웃는다.
“오빠 꼬르르 해떠?”
그때 은혁이의 배에서 울리는 꼬르르 소리.
은우와 은정이가 은혁이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하하하.”
“헤헤헤헤헤헤.”
은혁이가 묻는다.
“배고픈데 뭐 먹을까?”
은정이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스프.”
“알았어. 오빠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은혁이가 요리를 하려고 하자 은정이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오빠 요리 지진데.”
은혁이의 서운한 표정.
“은정아, 오빠 그럼 요리 안 한다.”
미안한 표정이지만 아무 말도 못 하는 은정이.
그때 은우가 새로 나온 바나 스프를 들면서 말했다.
“걱정 마. 은정아. 바나 스프만 있으면 형도 최고의 요리사가 될 수 있어.”
은정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은우를 바라본다.
“믿어보라니까.”
은혁에게 바나 스프를 건네는 은우.
일회용 컵을 꺼내서 보여준다.
“이 일회용 컵엔 눈금선이 있거든. 이 선만 지키면 최고의 맛이 기다린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방긋 웃는 은정이.
은우가 은혁을 부엌으로 밀면서 말한다.
“부탁해. 최고의 요리사.”
은혁은 바나 스프의 포장을 뜯어서 일회용 컵에 붓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수저로 젓는다.
충분히 젓고 나서 스프를 바라보는 은혁의 눈빛이 살짝 떨린다.
내가 한 요리가 정말 맛있을까?
걱정되는 눈빛의 은혁.
은혁이 수저로 스프를 한 입 떠서 먹는다.
생각지도 못한 맛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은혁.
자랑스럽게 은우와 은정에게 스프를 내놓는다.
“먹어봐.”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스프를 바라보는 은정.
은우가 수저로 스프를 떠서 은정의 입 앞에 내밀자 고개를 돌리는 은정이.
“안 먹을 거야? 오빠가 다 먹는다.”
먼저 맛을 보는 은우.
입안을 맴도는 부드러운 콘스프의 맛에 표정마저도 부드러워진다.
“진짜 맛있다.”
은우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는 은정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수저 앞으로 입술을 내민다.
걱정되는지 조금 혓바닥을 대보는 은정이.
의외의 맛에 놀란 듯 은우의 손에 들린 수저를 가져가서 스프를 먹는다.
일회용 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가 스프를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 치운 은정이.
은혁이가 그런 은정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은우가 은정이에게 묻는다.
“큰오빠 요리 잘하지 은정아?”
은정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빠 체고.”
미소 짓는 은혁의 표정.
보리도 말을 알아들었는지 함께 짖는다.
“멍멍.”
은우가 보리의 말을 은혁에게 전달한다.
“보리도 형이 만든 스프 먹어보고 싶다는데.”
행복한 아이들의 웃음에서 올라가는 바나 스프의 이름.
[컷]
감독이 컷을 외쳤다.
감독은 생각보다 너무나 수월하게 마친 촬영이 놀라웠다.
‘표정을 가르친 것도 아닌데 표정이 살아있잖아.’
걱정했던 은정이의 표정 연기는 오빠들과 함께여서 그런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평소에 늘 함께 지내서인지 연기가 아니라 실제를 보는 것 같았어.’
은우가 스프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마저도 광고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서로 사랑하는 가족을 본다는 게 이런 건가?’
감독은 묘한 표정으로 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잔상이 남아있는 기분이야. 아이들의 따뜻한 목소리. 웃음소리. 화면 속에서 퍼지던 미소. 오후의 햇살보다 더 빛나던 분위기.’
***
[바나 스프]의 리뉴얼된 상품이 마트에 깔리게 된 날이었다.
마트의 스프 코너에는 은우와 은정이, 은혁이의 입간판이 놓였다.
[가족의 사랑이 담긴 바나 스프, 손쉽게 요리하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마트의 판촉 직원은 제품을 손에 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바나 스프 행사 중이에요. 포장지도 바꿨고요. 일회용 컵도 들어있어서 물 맞추기도 아주 편해요. 다들 [베이비가 돌아왔다] 보셨죠? 거기서 은우랑 은정이가 먹던 스프예요.”
행사 때문에 평소보다 많이 들어온 물량 때문에 직원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 물량을 어찌 다 팔지? 뭐 못 팔아도 내가 마이너스는 아니지만.’
하지만 판촉 직원들 중 가장 매출이 저조한 게 자신이었다.
‘자꾸 눈치만 보이고 경기도 안 좋다는데 이 직장마저 잃으면 어쩔까 싶고.’
크게 외쳐야 하는데 자신 없는 목소리는 자꾸만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중년의 부부가 스프 앞으로 섰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 스프 맛있대. 이거 사자.”
“그만 사. 너 집에 이런 식으로 새로 나왔다고 사 놓고 안 먹은 게 얼마야? 결국 유통기한 지나서 다 버리고. 그거 다 돈 낭비라고. 엄마 아빠가 돈 벌려고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알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이 말을 거들었다.
“엄마 이거 우리 반 창민이가 그러는데 진짜 맛있대. 물만 잘 부으면 예전부터 맛있는데 물양 맞추기가 어려워서 가끔 실패했다고 그랬어. 이거 사면 엄마 없을 때도 밥 대신 먹을 수 있고. 라면보다 몸에 좋지 않을까?”
엄마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고민이 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라면보다 나을 게 있을까? 인스턴트인데. 거기서 거기지.”
판촉 직원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라면보다 훨씬 좋죠. 라면은 나트륨 때문에 건강에 안 좋고 또 튀긴 면이라서 몸에 안 좋잖아요. 저희 스프는 슬로우 푸드예요. 여기 보시면 원료도 좋고요.”
옆에 서 있던 남편이 끼어들었다.
“성현이, 성은이가 먹고 싶다는데 좀 사 줘. 애들이 음식 좀 남길 수도 있지. 뭐 우린 안 그런가? 학교 끝나고 와서 출출할 때 먹어도 되고 아침 일찍 나가면서 밥 생각 없을 때 먹어도 되겠네. 나도 술 마신 다음 날 먹을 수도 있고.”
고민되는 듯한 말투의 여자.
“이걸로 해장을 하겠다고요? 정말이에요? 나야 좋죠. 해장국 안 끓여도 되고. 매일 해장국 끓이는 게 얼마나 일이었는데. 해장국 안 끓여도 된다고 하면 사 줄게요.”
남편이 우렁찬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래, 콜.”
“네 개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첫 판매에 판촉 직원은 놀랐다.
‘저렇게 공략하면 팔 수 있겠구나.’
판촉 직원이 목소리를 높여 스프를 홍보했다.
“아침 식사 대용도 되고 해장으로도 먹을 수 있고 야식으로도 먹을 수 있는 스프요. 물 맞추기가 쉬워서 요리도 어렵지 않아요. 다들 [베이비가 돌아왔다] 보셨죠?”
그때 엄마의 손을 잡은 다른 중학생이 매대 앞으로 왔다.
“엄마, 이거야. 은우가 광고하는 스프.”
“그놈의 은우. 은우. 이제 스프까지 은우니?”
“사 주기로 했잖아. 엄마. 잔소리 그만.”
여중생이 스프를 사 가지고 간 뒤 그다음에 들이닥친 것은 한 무리의 고등학생이었다.
“드디어 나왔네. 이 안에 은우 스티커 들어있는 거 맞지?”
“응, 내가 [바나 스프] 홈페이지에서 확인했어.”
“은우 스티커라니. 당장 사야겠다. 넌 몇 개 살 거야?”
“난 다섯 개.”
“좋겠다. 난 세 개 살 건데. 용돈이 얼마 안 남아서.”
“난 일곱 개 살 거야.”
“아, 부러워 다음 달 용돈 받아서 다시 사러 올 때까지 남아있어야 할 텐데. 품절 되면 어떻게 하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어느새 판촉 직원은 그 많던 스프가 다 팔린 것에 놀랐다.
‘이 많은 걸 다 팔다니. 내 인생 최고의 날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