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베이비가 돌아왔다 (6)
은정이가 보리와 함께 놀고 있는 사이, 은우와 은혁이도 각자의 방에서 나왔다.
은정이는 은우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은우의 다리에 안겼다.
“오빠.”
은우가 은정이를 안아주었다.
은혁이가 옆에서 은우에게 안긴 은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잤어? 우리 꼬마 공주님.”
“오빠.”
은정이가 은혁이를 향해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은정이의 작은 손이 볼에 닿자 은혁이도 웃었다.
촬영감독은 은정이가 남긴 요구르트를 마시다가 방에서 나온 은혁과 은우를 보았다.
‘빨리 미션을 전달해야 해.’
급한 마음에 마시던 요구르트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켁켁.”
사레가 들리자 요구르트는 요구르트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 맵고 아프다. 달짝지근한 요구르트 맛이 아닌데.’
결국 눈물까지 핑 돌았다.
은우가 촬영감독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은정이는 촬영감독이 걱정되는지 은우의 품에서 내려 촬영감독에게 달려갔다.
“아퍄? 아퍄?”
은정이가 작은 손으로 촬영감독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핑 돈 두 눈으로 촬영감독은 은정이를 바라보았다.
‘나를 이렇게 걱정해 주다니. 은정아. 너밖에 없어.’
촬영감독이 은정이를 안았다.
“아프지 먀.”
은정이가 촬영감독에게 말했다.
은정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촬영감독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상황을 밖에서 모니터하고 있던 정 PD는 어이가 없었다.
‘요구르트 먹고 사레 들러서 울다니?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야. 편집하면서 다 잘라야 하나? 지난번엔 괜찮은 장면 좀 건졌었는데 그건 그냥 우연인가 봐. 역시 조 감독이 그러면 그렇지. 조 감독에게 예능감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실수했어. 계속 출연시키면 의외의 케미가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 PD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정이의 위로를 받고 정신을 차린 촬영감독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오늘 미션은 마트에서 장보기입니다.”
은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미션이요?”
촬영감독이 다시 한 번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미션은 마트에서 장보기입니다.”
은혁이가 은우에게 말했다.
“지난번 엄마, 아빠 없이 하루 보내기에 이어서 새롭게 나온 미션인가 봐. 마트에 가서 뭘 사면 좋을까?”
“밥을 만들어서 먹으라는 소리인가?”
은우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은정이가 은우의 행동을 따라 했다.
“소리인갸.”
은혁이가 촬영감독에게 물었다.
“장만 보면 되는 거예요? 아니면 밥도 해 먹어야 해요?”
촬영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난 그거까진 몰라. 이것만 전달하라고 PD님이 그랬어.”
은혁이가 아쉽다는 투로 대답했다.
“네. 은우야, 그럼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할 것 같은데. 기왕 장보는 거면 밥도 해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은혁이가 만들었던 파 맛 스프가 떠올랐던 은우는 은혁이를 말리고 싶었다.
“아니야, 형. 음식은 안 만들어도 될 거야. 장만 보자. 아니면 파는 음식을 사오는 게 어때? 요즘 마트에도 치킨도 팔잖아. 빵도 있고.”
은정이가 치킨과 빵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치키. 빠앙.”
하지만 은혁이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파는 음식은 몸에 나쁘지 않을까? 재료를 사서 해보는 게 좋겠어. 좀 간단한 걸로.”
맛있게 먹는 은우와 은정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은혁이는 신이 나서 레시피를 검색 중이었다.
[쉬운 요리]로 검색어를 입력하자 많은 요리들이 떴다.
허니버터 고구마, 계란빵, 소불고기.
은혁이는 레시피를 보면서 좌절했다.
‘이런 거 하나도 안 쉬운데 뭐가 쉽다는 거지?’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더 쉬운 요리는 없나?
고민하던 차에 은혁은 한 초등학생이 운영하는 요리 블로그를 눌렀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쉬운 요리 1편.
팬케이크 만들기.
팬케이크는 마트에서 팬케이크 가루만 사면 쉽게 할 수 있는 요리예요.]
글을 읽는 은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거다’
은혁이가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맛있는 거 해줄게.”
은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촬영감독이 은혁이에게 카드를 넘겼다.
“결제는 이걸로 하면 돼.”
은혁이는 장바구니를 들고 은우는 은정이의 손을 잡고 함께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들어서자 은정이가 방긋 웃더니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를 가리켰다.
“오빠. 저겨.”
은우가 바구니를 들고 은정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마트 시식 코너의 판매사원들이 은정이의 귀여운 외모에 탄성을 지르며 말을 시켰다.
“이거 먹어봐. 이거 맛있어. 아가야.”
“귀여운 애기야. 이리 와 봐.”
은정이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러브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기용 치즈 판매직원이 은정이를 불렀다.
“치즈 맛있어. 먹어봐.”
판매직원이 이쑤시개에 꽂힌 치즈를 내밀었다.
은정이는 판매직원에게로 달려가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은정이가 치즈를 먹는 모습에 판매직원이 물었다.
“맛있어? 하나 더 줄까?”
은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치즈를 받아서 먹었다.
‘여긴 좋은 곳이네. 먹을 게 많아.’
은정이는 고개를 돌려 시식 코너를 살펴보았다.
만두를 굽고 있는 판매직원이 은정이에게 손짓을 했다.
“만두도 먹어봐. 만두 맛있어.”
은정이는 만두 코너로 달려갔다.
마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은정이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저 아기 좀 봐. 너무 귀엽다.”
“마트 시식 코너의 즐거움을 너무 빠른 나이에 안 거 아냐?”
“이제 헤어나오기 힘들겠네.”
“근데 나는 여러 개 먹으면 먹지 말라고 뭐라고 하던데 판매직원들이 저 아기에겐 아무 말도 안 하네.”
“음. 그건 말야. 내가 저 판매직원이래도 너한텐 뭐라고 할 거 같아. 살 좀 빼라. 응?”
은우도 은정이를 따라 만두 코너로 갔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배탈 날지도 모르고.’
은우는 은정이가 걱정이었다.
은정이가 만두를 받아먹고 만족한 듯이 방긋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커플이 말했다.
“야, 저 만두 맛있나 봐. 우리도 먹어보자.”
옆에 서 있던 신혼부부도 말했다.
“저녁에 맥주랑 만두 먹을까?”
은정이의 시식과 함께 만두 코너로 사람들이 몰렸다.
판매직원은 만두를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은우는 사람들이 몰려든 틈을 타 은정이를 데리고 시식 코너를 빠져나왔다.
‘이건 무슨 개미지옥도 아니고. 시식 코너는 정말 위험한 곳이야. 근데 형은 어디 갔지?’
은정이에게 신경 쓰다 보니 은혁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만있어 보자, 팬케이크를 사러 간다고 했으니까 팬케이크 가루 파는 곳에 있나?’
은우가 팬케이크 코너를 찾으려고 하는 사이 은정이는 과자를 발견하고 과자 앞으로 다가갔다.
“초코.”
은정이는 홀린 듯 초코 과자를 고르고 있었다.
이미 작은 손 가득 초코 과자 봉지를 다섯 개나 움켜쥐고 있었다.
은우는 은정이를 발견하고 은정이의 곁으로 갔다.
“은정아, 과자를 이렇게 많이 사면 어떻게 해? 과자 집에 많이 있는데.”
“엄떠. 과자 엄떠.”
“그럼 한 개만 사자.”
은우가 말렸지만, 은정이는 손에 꼭 쥔 과자를 놓지 않았다.
“엄마가 머꼬 십때.”
은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저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은우는 별수 없이 은정이가 고른 과자를 바구니에 넣었다.
은정이는 옆에서 젤리를 고르기 시작했다.
“은정아, 과자 많이 샀으니까 젤리는 그만 사자.”
“음. 젤리는 아빠가 머꼬 십때.”
은우는 어쩔 수 없이 은정이가 고른 젤리도 바구니에 담았다.
‘이러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 나올 기세인데.’
은정이는 젤리를 신나게 고르더니 옆에 있던 쿠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은정아, 그럼 쿠키는 하나만 사자.”
“음. 쿠키는 보이가 머꼬 십때.”
은우는 은정이가 고른 쿠키를 바구니에 넣었다.
‘과자만 해도 가격이 상당하겠는데.’
은우가 은정이에게 물었다.
“은정아, 젤리는 아빠가 먹고 싶고 쿠키는 먹고 싶고 그럼 은정이가 먹고 싶은 건 뭐야?”
이렇게 물으면 먹고 싶은 게 없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은우는 은정이의 예상 밖의 대답에 놀랐다.
은정이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슈크림.”
결국 은우는 은정이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코너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열 개나 샀다.
은정이가 고른 과자와 아이스크림이 너무 많아서 은우는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 대신 바퀴가 달린 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은혁이가 팬케이크 가루를 들고 은우와 은정이를 향해서 왔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은정이가 다 먹고 싶대서. 팬케이크 가루는 샀어?”
“응, 가루는 샀고 이제 우유랑 계란만 사면 될 것 같아.”
“그래, 형 어서 우유랑 계란을 사고 마트에서 나가자.”
영혼이 탈출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은우가 대답했다.
우유와 계란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은우는 핼쑥해진 얼굴로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 PD는 은우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육아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표정이네. 저런 표정이 초등학생한테서 나오다니. 근데 재밌는 게 부모님이 없으니 은우와 은혁이가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은혁이가 가족을 위한다고 노력하지만 뭔가 어설픈 아빠, 은우가 속 깊고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쫓아다니는 엄마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이번 회차로 확실히 은우는 동생 바라기 국민 오빠 캐릭터로 자리매김을 할 것 같고. 지난 회차에서 은혁이는 요리를 못 하는 걸로 예상치 못한 재미를 주었었는데 이번에 어쩌려나?’
한편.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 방송 작가들 사이에서는 내기가 벌어졌다.
막내작가인 박하영 작가가 말했다.
“우리 내기할래요? 은혁이가 이번 요리도 망친다. 어때요?”
듣고 있던 신유리 작가가 대답했다.
“재밌겠다. 콜. 전 이번 요리도 망친다에 걸게요.”
이정연 작가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 그럼 망친다는 사람은 신유리 작가 말고 또 누구?”
박하영 작가가 손을 들었다.
“신유리 작가, 박하영 작가, 정이선 작가는?”
“전 이번 요리는 망하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면 예능은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소망을 담아서 안 망한다에 걸게요.”
“그래, 그럼 너무 다 망한다만 있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나도 안 망한다에 걸게. 그럼 망한다 두 명 안 망한다 두 명. 내기는 뭐로 걸까?”
신유리 작가가 말했다.
“커피 내기 어때요?”
정이선 작가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커피 내기가 편하긴 한데 너무 많이 해서 재미없지 않아요? 그거 말고 더 재밌는 거 하죠.”
“어떤 거?”
이정연 작가가 되물었다.
“사다리 타기 해서 밥값 내기 해요. 제일 비싼 건 호텔 뷔페 걸고요.”
정하선 작가도 박수를 쳤다.
“오, 좋다. 호텔 뷔페 간 지 오래됐는데. 승부욕도 불타고 재밌겠어요.”
이정연 작가가 메모를 하면서 말했다.
“좋아. 호텔 뷔페랑 레스토랑 식사 등 사다리판은 내가 만들어볼게. 제일 싼 게 오만 원으로. 오만 원 밑은 없는 거야?”
작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은혁이 부엌에 들어가 팬케이크 가루와 우유, 계란을 꺼내놓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은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은혁의 옆으로 갔다.
“형, 요리할 거야? 같이 할까?”
“피곤할 텐데 쉬어. 내가 해서 가져다줄게. 넌 은정이랑 놀고 있어.”
“아니야. 형. 오랜만에 같이 요리하자. 은정이도 요리하는 게 더 재밌을 거야. 그렇지 은정아?”
“응.”
아무것도 모르는 은정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은우는 빠르게 은혁이가 들고 있는 팬케이크 상자에 들어있는 설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형은 설명서를 읽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요리를 잘 망치는 것 같아. 설명서에 쓰여 있는 대로만 따라 하면 망하지 않을 거야.’
은우의 예상처럼 은혁이는 설명서를 읽지 않은 채 바로 플라스틱 볼에 팬케이크 가루를 부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은우는 찬장에서 백수희가 쓰던 계량컵을 찾아서 들고 왔다.
‘집에 이렇게 좋은 도구가 있는데 도구를 쓰면 되잖아. 형.’
은혁이는 은우가 들고 온 계량컵을 보았다.
“그거 없어도 돼. 내가 조리법을 인터넷에서 다 봤거든.”
은혁이는 팬케이크 가루가 든 볼 위에 계란을 깨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형, 계란이랑 우유를 먼저 섞는 게 좋을 것 같아.”
은우는 계량컵에 우유 150밀리를 담아서 볼에 부은 뒤 계란을 넣고 저었다.
“형, 이것 좀 저어줄래?”
“알았어.”
은혁이가 은우가 건네준 거품기를 가지고 계란을 젓기 시작했다.
요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작가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정이선 작가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 전개에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번에도 우리 은우가 날 도와주네. 우리가 이기겠어.”
신유리 작가는 울상이었다.
“아니 은우야 요리는 형이 한다고 하잖아. 형이. 왜 네가 요리를 도와주고 그래?”
이정연 작가가 말했다.
“우리 은우를 탓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요. 아, 모르겠다. 난 망했어.”
호텔 뷔페 식사권과 함께 점점 우울해지는 신유리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