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베이비가 돌아왔다 (3)
은우는 [한국국제학교]의 학교 생활에 백프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게 내가 바라던 학교 생활이었어. 완벽해.’
새로 온 학교에선 책상 가득한 선물도 자신을 좇는 시선도 없었다.
간혹 교문 앞으로 찾아오던 팬들도 사라졌다.
오늘도 쌍둥이 자매인 르베티와 에벨라가 싸우고 있었다.
“너 내 우산 왜 가져갔어?”
“너라니? 내가 너보다 언니잖아. 너가 뭐야?”
“고작 오 분 먼저 태어난 게 무슨 언니야? 응?”
“그래도 언니는 언니지. 너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른다.”
은우가 르베티와 에벨라에게 말했다.
“그만 싸워. 에벨라. 언니는 언니잖아. 언니를 동생이라고 부르고 싶어?”
“아니.”
“둘을 바꿔서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아. 싸우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 우산이 집에 하나뿐이야?”
에벨라가 입술을 뽀로통하게 내밀며 말했다.
“아니. 우산은 많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파랑펭귄 우산을 언니가 가져갔단 말이야.”
“파랑펭귄 우산 말고 다른 우산은 어떤 게 있어?”
“라푼젤 우산이랑 백설공주 우산도 있어.”
“그럼 언니랑 요일을 정해서 번갈아서 들면 되잖아. 라푼젤 우산이랑 백설공주 우산이 슬퍼하겠다. 들어주지도 않고 매일 집에만 있으니까?”
은우의 말에 설득당한 듯 에벨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 우산이 슬퍼할까? 그 생각은 못했어.”
“슬퍼할 거야.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그치?”
에벨라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여기 친구들은 티비를 안 보나? 왜 나에 대해 관심이 없지?’
은우가 르베티에게 물었다.
“르베티 넌 티비 안 봐?”
“보는데 우리 매일 백설공주도 보고 상어가족도 보고.”
“미국 방송 봐? 한국 방송 봐?”
“난 미국 티비가 더 재밌어.”
“아아아.”
은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자기 나라의 티비를 보고 있었던 거구나. 내가 미국 티비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한국 티비에 비하면 훨씬 적으니까.’
은우는 이곳에서라면 다시 방송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정태욱 PD는 HO 엔터테인먼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정태욱 PD님 은우가 출연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태욱 PD는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뻤다.
이 주 동안 마음 졸인 것이 의미가 있다 싶었다.
‘은우만 나와준다면 파일럿 편성이라고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정태욱 PD는 신이 나서 메인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작가 은우 출연 결정됐어. 회의 소집해.”
이정연 작가에 연락에 작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와, 은우가 진짜 우리 프로그램에 나와준대요. 진짜 다행이다.”
막내작가인 박하영 작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구사일생이네요.”
이정연 작가가 박하영에게 말했다.
“동아줄이 내려온 건 맞는데 아직 타고 올라간 건 아니야. 끝까지 정신줄 놓아서는 안 돼.”
옆에 있던 정이선 작가도 말을 보탰다.
“맞아. 시청률 잘 나와서 새로운 시즌 촬영 들어가도 좋다고 말 나오기 전까진 정신 동여매고 열심히 해야지.”
신유리 작가가 울먹이며 말했다.
“진짜 진짜 열심히 해 봐요, 우리. 전 우리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줄 알고 너무 걱정했거든요. 제가 막내던 시절부터 진짜로 열심히 뛴 프로인데. 게다가 우리 잘못도 아니고, 이수정 조작설 기사 났을 때 아차 싶긴 했지만 어떻게 출연자 개인 재산까지 우리가 다 찾아봐요? 우리가 검찰인가요? 뭐?”
이정연 작가가 신유리 작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우린 검찰이 아니지. 그래도 다행히 기회가 왔으니까 다 잊고 열심히 해 보자고. 알았지?”
“네.”
회의 테이블에 앉은 작가들의 눈이 결의로 빛났다.
이정연 작가가 회의를 이끌었다.
“이번 파일럿 프로그램은 가정의 달 특집으로 7부작으로 들어가기로 했어. 다들 자료에서 보다시피 은우 가족들 단독 편성으로 들어갈 거고. 은우 가족들 프로필은 거기 자료에 다 넣어놨지?”
신유리 작가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은우 팬이었는데 은우가 우리 프로그램에 나온다니 너무 좋아요.”
정이선 작가가 신유리 작가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방금까지 울먹이던 거 맞아? 순식간에 이렇게 밝게 웃다니 적응 안 된다.”
“헤헤헤헤. 이 방송국에도 은우 팬들 많은걸요? 그래서 우리 프로는 대박 날 수밖에 없어요.”
그때 막내작가인 박하영 작가가 수줍게 손을 들며 말했다.
“저도 은우 팬이에요.”
메인 작가인 이정연 작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은우 팬이야. 은우 팬들 모여서 한번 잘 해 보자고.”
정이선 작가가 말했다.
“이거 프로그램 회의가 아니라 팬클럽 회의 같은데. 나도 은우 팬이야. 이 나이에 은우 팬이라는 걸 고백하기가 뭣해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다들 이야기하니 나도 말하기가 편한데.”
신유리 작가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니 선배님 나이가 왜요? 은우 팬이면 다 같이 뭉치는 거지.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그리고 선배님 젊으십니다. 아직 충분히요.”
“고마워. 유리 씨. 나 젊지 않은 건 알지만 말야.”
“젊으시다니까요. 아직 예쁘십니다.”
이정연 작가가 말했다.
“알았어요. 애정이 넘치는 우리 팀. 분위는 늘 최고라니까. 자, 일단 우리가 은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촬영 컨셉에 대한 의견들을 자유롭게 잘 내놓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다들?”
막내작가인 정하영 작가가 말했다.
“일단 은우네 집은 연령대가 다양해서 요즘 흔치 않은 다둥이집이잖아요. 은정이는 이제 3살이고 은우는 초등학교 일학년 은혁이는 초등학교 육학년. 우애를 보여주면 어떨까요?”
신유리 작가가 동의했다.
“우애와 귀여움이 제일 좋을 거 같긴 해요.”
정이선 작가도 동의했다.
“우애와 귀여움 좋네요. 근데 우리 덕분에 은우네 집에 가 보겠네요. 은우도 보구요.”
이정연 작가가 걱정되는 말투로 말했다.
“그치. 하지만 다들 너무 사심 넣지 말라고.”
***
은정이는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다.
‘어, 이건 뭐지? 못 보던 하얀 집이네.’
은정이는 아장아장 걸어가서 하얀 집 안으로 고개를 쑤욱 넣었다.
하얀 집 안에는 카메라와 촬영 감독이 있었다.
‘와, 처음 보는 아저씨네. 아빠 친구인가?’
은정이가 촬영 감독에게 말을 걸었다.
“놀러와떠?”
촬영 감독은 은정이의 질문에 놀랐다.
‘난 화면에 나오면 안 되는데.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촬영 감독은 침묵을 택했다.
은정이는 촬영 감독의 침묵이 이상했다.
“심시매?”
은정이는 하얀 집에서 고개를 빼고 장난감이 있는 장난감 방으로 달려갔다.
은정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곰돌이 인형과 오리 인형을 챙겨서 하얀 집으로 달려갔다.
“재미떠.”
은정이가 꺼낸 인형을 촬영 감독의 앞에 늘어놓았다.
‘나랑 같이 놀자는 얘긴가? 내가 화면에 나가도 되나?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베이비가 돌아왔다] 촬영을 하다 보면 종종 촬영 감독에게 흥미를 느끼는 아기들이 있었다. 가끔 말을 거는 아기도 있었지만, 아예 텐트까지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놀자고 하는 아기는 많지 않았다.
‘난 촬영 감독이지 연예인이 아닌데.’
촬영 감독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은정이가 촬영 감독에게 곰돌이 인형을 안겨주면서 노래를 불렀다.
“아빠 굠, 엄먀 굠, 애기 굠.”
촬영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그다음 가사를 부르고 말았다.
“으쓱으쓱 잘한다.”
촬영 감독의 노래를 들은 은정이가 방긋 웃었다.
“곰도리 조아해?”
그 때, 촬영 감독의 귓가에서 정태욱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감독. 다른 카메라가 잡기로 했으니까 같이 놀아줘. 지금 그 장면 아주 자연스럽고 귀여워.”
촬영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은정이는 촬영 감독의 대답에 신이 났는지 장난감 방에 가서 블록이 든 상자를 가져왔다.
은정이는 블록을 거실 바닥에 쏟더니 촬영 감독의 손을 잡고 거실로 이끌었다.
‘휴우, 이제 거실까지 진출하는구나. 이 정도면 거의 출연인데?’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 감독들이 종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적이 있긴 했지만, 조감독은 아직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숙기가 없는 성격이기도 했고.
은정이는 블록을 늘어놓고 작은 손으로 블록을 맞추기 시작했다.
“뭘 만드는 거야?”
조감독이 은정이에게 물었다.
은정이는 집중했는지 코끝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성.”
조감독이 블록을 쥐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금방 만들어 줄게.”
조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만들기를 잘했다.
‘훗, 이런 것쯤이야. 말하는 건 자신 없지만 만들기라면 자신 있지.’
조감독은 블록으로 성의 바닥을 쌓고 그 위에 성의 몸체와 성문을 만들었다.
“우아.”
은정이는 자신이 만들 때와는 너무 다른 성의 모습에 박수를 쳤다.
그때 은우가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다.
‘저분은 누구시지?’
은우는 거실에서 은정이와 나란히 블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랐다.
‘새로운 출연진인가? 오늘은 우리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 출연한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은정이가 은우를 보고 방긋 웃었다.
“오빠.”
“잘 잤어? 은정아.”
은우가 은정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응응. 오빠 이거 뱌뱌. 머디찌?”
은정이는 조감독이 만들어 준 성을 자랑했다.
조감독은 은정이의 칭찬에 신이 나서 더 큰 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은정이가 더 멋지다고 하겠지?’
조감독은 으쓱해하면서 블록을 조립했다.
은정이가 은우에게 말했다.
“오빠, 나 띠띠 노리.”
“알았어.”
은우가 거실 안쪽에서 거울과 포스트잇을 찾아 왔다.
은우가 거울에 빨간, 노란, 주황, 연두색의 포스트잇을 붙이자 은정이는 집중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감독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뭐지? 아까까진 성이 멋지다고 하더니. 갑자기 다른 놀이를 하네? 나도 띠띠 놀이를 함께 해야 하나? 진짜 멋진 성을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자신이 만든 성을 보고 뿌듯해할 은정이의 얼굴을 생각하며 블록을 쌓아 올리고 있었는데 은정이가 다른 놀이를 하니 조감독은 힘이 빠졌다.
그래도 성 만들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감독은 계속해서 성을 쌓았다.
거울 앞에 앉아있는 은정이에게 은우가 말했다.
“분홍색.”
은정이가 분홍색 포스트잇을 뗐다.
“연두색.”
은정이가 연두색 포스트잇을 뗐다.
은정이는 옆에 있는 빨간색, 주황색 포스트잇까지 전부 떼더니 갑자기 블록을 쌓고 있는 조감독에게로 갔다.
‘드디어 은정이가 내가 만드는 성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조감독이 기뻐하면서 은정이에게 말했다.
“은정아 성 멋있지?”
은정이가 조감독의 얼굴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헉.’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감독은 당황했다.
은정이는 마지막 포스트잇 하나를 자신의 이마에 붙이더니 입으로 바람을 휘휘 불었다.
“요러케 요러케.”
은정이가 열심히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댔지만, 이마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은정이는 바람을 위로 보내지 못하고 앞으로만 불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감독은 은정이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입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서 이마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 냈다.
“우아.”
은정이가 그것을 보고 환호했다.
조감독은 더욱더 신이 나서 다른 포스트잇들도 열심히 떼어냈다.
다른 방에서 화면으로 조감독을 보고 있는 정태욱 PD는 배꼽이 빠질 지경이었다.
‘포스트잇만 떼어낼 생각에 자기 얼굴이 어떻게 변한진 생각도 못 하고. 저거 완전 흑역사잖아. 움짤 대량 생산하겠는데. 조감독.’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괜찮은 장면을 건져서 신이 난 정태욱 PD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