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신과의 대화
제이슨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제이슨은 미식축구 사인볼을 안고 신이 나 있었다.
“엄마, 와트 근육 보셨어요? 정말 멋있죠?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마리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건강한 아이였다면 와트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대답을 했을 텐데. 제이슨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몇 달일 거야.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 해도 저 아이에겐 기적일 테니까.’
길동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제이슨.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으면 와트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은우는 길동의 대답을 듣고 생각했다.
‘제이슨에겐 이제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주는 것이 어쩌면 더 잔인한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이슨이 창밖을 보며 쓸쓸히 말했다.
“저 달이 기울 듯이 나도 언젠가 사라지겠죠.”
신이 났던 차 안의 분위기는 제이슨의 한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은우는 제이슨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제이슨 널 도와주고 싶은데 넌 내가 가진 재능으로도 어쩔 수가 없어.’
은우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를 불렀다.
“제이슨 더 살 뚜 이뜨꺄?”
아테네는 어깨에 앉은 올빼미를 다독이며 머리에 쓴 관에서 올리브를 따 먹으며 말했다.
“아무리 신이 재능을 주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수명을 늘리거나 줄일 수는 없어. 그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니까.”
“아무러치도 안케 말하네. 너뮤해.”
“신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면 하루 종일 쉴 수 없을걸. 우린 모든 인간의 삶에 관여할 수 없어. 그리고 그건 우주 전체로 볼 땐 당연한 일이야.”
“그래도 너뮤해. 내 칭구인데.”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부르던지. 넌 크로노스를 부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은우는 망설여졌다.
‘크로노스를 부를 수 있지만, 크로노스는 나의 기억을 원할 거야. 나의 어떤 추억도 포기할 수는 없어. 모두 아름다운 기억들인걸. 하지만 제이슨을 살리려면 크로노스를 다시 불러야 하는 걸까? 얼만큼의 시간을 포기해야 제이슨의 삶이 늘어날까?’
은우가 대답했다.
“댜른 방버븐?”
“인간들은 다음, 다음, 다음. 꼭 다음을 말하더라. 왜 내가 다음을 알려줘야 하는데? 그냥 내가 알려준 방법 안에서 하면 안 돼? 다음이 없다고 하면 그럼 어쩔 건데.”
은우는 아테나가 칭찬을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테냐. 우쥬에서 제일 똑또캬고 제일 띠어냔 시니 그런 거또 몰랴?”
“뭐라고?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아니, 모르는 거 가타서.”
“방법은 있지 당연히. 신들의 왕, 제우스를 불러. 제우스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지. 괜히 신들의 왕이겠어?”
은우는 아테나의 대답에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했다.
“그러쿠나. 신드른 챰 대단해.”
“당연하지. 우린 인간들과는 다르니까. 아무튼 바빠서 난 이만 간다.”
“웅. 빠빠이.”
은우는 집으로 돌아가서 제우스를 불러서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이슨을 집에 내려다 주고 길동과 은우는 함께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은우야, 오늘 정말 최고의 무대였어. 네 덕분에 슈퍼볼을 다 구경하다니. 복권에 당첨된 것만큼이나 기쁘다.”
길동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복권은 아니지만, HO 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이 150프로나 올랐는걸. 은우가 미국에 진출하기 전에 주식을 사 두길 잘했지.’
길동이 전 재산 팔천만 원을 투자하여 산 HO 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이 2억이 돼 있었다.
‘월세라도 받을 수 있게 작은 오피스텔이나 빌라라도 사 둘까? 한국에 돌아가면 부동산에 가 봐야지.’
귀국할 그날만을 기다리는 길동이었다.
길동의 차가 호텔에 도착하고 은우는 길동에게 샤워의 순서를 양보한 채 혼자 거실에 앉아있었다.
‘제우스를 불러야지.’
신들의 왕, 제우스는 너무 많은 그림책에 모습이 나와 있었으므로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매우 쉬웠다.
은우는 벼락과 천둥을 몰고 다니는 근육질의 제우스를 떠올렸다.
이윽고 은우의 앞에 천둥소리가 나더니 근육질의 제우스가 팬티만 입은 모습으로 독수리를 타고 나타났다.
“누가 나를 찾았는가?”
“저예요. 은우.”
“만나서 반갑다. 꼬마야. 신들의 재능을 받으니 삶이 편안하지? 넌 그걸로 무엇을 이루었느냐? 세계 제일의 권력? 부자?”
“아니요. 하냐도 몬 이루어떠요.”
“아니, 그 시간 동안 대체 뭘 했단 말이냐? 신들의 재능을 가지고서도 인간 세상을 정복하지 못했다고? 전 세계의 왕이 되지는 못했더라도 한 나라의 왕은 할 수 있었을 거 아니냐?”
“전 그런 거 안 조아해요.”
“아니, 그럼 대체 넌 꿈이 뭐냐? 듣자 하니 인간들에겐 꿈이 매우 소중한 거라고 들었다.”
“제 꾸믄 칭구를 구하는 거예요.”
“친구? 고작? 친구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겠다고?”
제우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팬티만 입고 다니는 아저씨. 친구는 정말 소중한 거라고요. 아저씬 신들의 왕일지 몰라도 친구도 없나 봐요. 인생 헛사셨군요.’
은우가 대답했다.
“칭구는 정먈 소듕해요. 칭구는 내 아프믈 함께해 쥬는 샤라미에요.”
“인생은 혼자 가는 거라고 다들 그러던데. 넌 아직 어려서 생각이 다른가 보구나. 그래서 친구를 위해서 대신 죽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제 칭구 제이스니 아파요. 제이스늘 살려주떼요.”
“제이슨이라.”
제우스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당기자 별들이 끌려왔다.
“제이슨이라는 아이.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 제이슨에게 남은 시간은 1달하고도 14일 그리고 2시간 35분이다.”
“그러케 짤뱌요?”
은우는 제이슨을 떠올렸다.
‘꿈이 많고 착한 제이슨. 아프면서도 엄마를 생각해서 울지 않았던 제이슨. 착한 내 친구. 아직 버킷리스트의 절반밖에 이뤄보지 못했는데. 제이슨이 떠나면 제이슨의 가족들은 얼마나 슬퍼할까?’
은우가 제우스에게 말했다.
“제이스늘 살리고 시퍼요. 살려주떼요. 제우스시는 모든지 할 뚜 이짜나요. 제이슨도 살려줄 뚜 이짜나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이슨은 지구상에 있는 많은 인간 중 하나일 뿐인데? 그리고 인간도 수많은 동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데. 내 입장에선 고래 한 마리와 인간 한 명이 결코 다르지 않아. 그런데 내가 왜 제이슨을 구해야 하지?”
은우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제가 가진 거슬 드릴게요.”
“네 수명이라도 주겠단 말인가?”
“그럴 뚜 이따면요.”
“감동적이군. 꼬마야. 참 재밌는 존재야. 다음 날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존재라니. 요즘엔 점점 그런 인간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는데 넌 얼마 남지 않은 이타적인 인간인가 보군.”
“정마리예요. 제이스는 소듕해요.”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어때?”
은우는 숨을 죽이고 제이슨의 제안을 들었다.
“너의 수명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다. 신이라고 해도 수명에 손을 대는 건 자칫하면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될 테니까. 대신 네가 받은 신의 재능을 반납한다면 그건 생각해보지? 사실 그때 회의에 참여한 신들이 규칙을 어기는 바람에 내가 화가 많이 났었거든. 어떤 식으로는 신들은 인간의 삶에 개입해서는 안 돼. 그건 우주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 되고 그런 일들이 늘어나면 우주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은우는 고민했다.
‘내가 받은 신들의 재능이 없었더라면 그럼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신들의 재능은 마법 같았지. 그 재능으로 인해 나는 축복받은 삶을 살 수 있었어. 사람들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는 찬사를 들었고 많은 돈도 벌 수 있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었지. 보리와 말을 할 수도 있었고.’
재능을 반납한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은우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정에 머리가 복잡했다.
‘이제 더 이상 보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걸까? 보리와 함께 이야기해서 즐거웠었는데. 그래도 제이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재능을 돌려주는 게 좋겠지?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보리와 이야기할 수 없는 건 슬프지만 그래도 보리는 내 옆에 있을 거야.’
은우가 결정을 내린 듯 대답했다.
“포기하께요. 재능을. 그러니꺄 제이스늘 살려져요.”
“어리석구나. 꼬마여. 결국 너의 선택은 친구를 위해 어마어마한 재능을 버리는 것인가? 인간들은 돈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지구상의 모든 돈을 주더라도 그런 재능을 다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죽을 때까지 어떤 인간도 누려보지 못한 삶을 선사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정말 포기할 건가?”
“내 먀으믄 변하미 엄떠요.”
“후회할 텐데.”
“후해하지 아냐요.”
“알았다. 재능을 반납하고 제이슨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은 5년이다. 5년 후의 제이슨의 삶에 대해선 책임질 수가 없다.”
“죽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인간들은 운명을 믿지만, 운명이 정하는 것은 오십 프로뿐이다. 나머지는 인간의 의지지. 하지만 인간들은 도전하지 않고 운명의 탓만 하더군. 역시 인간은 나약한 존재야.”
“하지먄 우리에겐 사량이 이떠요. 우린 서로를 사량해요.”
“사랑이라? 그래. 사랑은 고귀한 가치지. 하지만 인간들이 점점 그걸 잊어가더군. 과거에 비해 수명도 길어지고 문명도 발달했지만 사랑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보이나?”
제우스가 허공에서 동그란 공 하나를 불러왔다. 그것은 축소된 지구였다.
“여기 분홍색으로 떠 있는 것들이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증오, 분노의 감정은 까만색으로 떠 있지. 희망은 노란색, 행복은 초록색, 불안은 보라색.”
은우는 까만색으로 절반 이상 차 있는 지구를 보았다.
“분홍새기 정먈 저거요.”
“신들은 매일 저 공을 보면서 인간들의 감정을 체크하고 있다. 50년 전의 지구는 지금보다 분홍색이 훨씬 많았지.”
“제갸 세상에 사랑이 가드카케 만들 거예요.”
“넌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군. 그래, 그 의지를 높이 산다. 네 소원대로 너에게 부여됐던 재능을 가져가고 너의 친구 제이슨에게 오 년의 수명을 더 주겠다. 오 년 후에 너의 친구가 자신의 의지로 병마로부터 벗어나길 기도하겠다.”
“고맘뜹니댜.”
***
다음 날 침대에서 일어난 제이슨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갑자기 사물이 잘 보이네. 안경도 안 썼는데.’
제이슨은 일어나자마자 마리를 불렀다.
“엄마. 엄마.”
마리가 놀라서 제이슨에게로 달려왔다.
“제이슨 무슨 일이야?”
마리는 제이슨이 어제 무리한 외출로 컨디션이 나빠졌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나?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셨는데.’
침대에 앉은 제이슨이 웃고 있었다.
“엄마 이상하게 물건들이 잘 보여요. 눈이 좋아졌나 봐요?”
“정말?”
마리는 제이슨의 안색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일이 많아져서 그런가? 어제보다 제이슨의 얼굴이 좋아 보여. 역시 좋아하는 걸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거 같아.’
제이슨이 안경을 마리에게 주면서 말했다.
“엄마, 이제 안경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래?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보는 게 좋겠어. 안경을 벗어도 되는지 말야.”
마리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로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죽기 전에 잠깐 증세가 호전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런 걸까? 의사 선생님께선 지난번까지 마지막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차에서 내린 제이슨이 콧노래를 부르며 휠체어에 올랐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의 설렘처럼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 느끼는 설렘처럼
기분 좋은 설렘으로만 가득 찬 오늘
달달한 초콜릿처럼 따뜻한 핫초코처럼
매일 먹어도 또 먹고 싶은 마카롱처럼.]
제이슨의 노래는 마리의 마음의 긴장도 풀어주었다.
‘그래, 제이슨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이 걱정하지 않을게. 지금 네가 행복한 것. 그게 나에겐 제일 중요해. 제이슨.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널 너무 사랑한다. 내 아들. 엄만 다시 태어나도 너의 엄마가 될 거야.’
진료실에서 제이슨을 만난 의사는 제이슨에게 물었다.
“제이슨 일주일 동안 어땠니?”
“재밌는 일이 정말 많이 있었어요. 슈퍼볼도 봤고요. 아틀란타팀의 사인볼도 받았어요.”
“사인볼이라고? 와아, 정말 멋진데. 나도 구경할 수 있을까?”
“그건 집에 있는데 여기 제 휴대폰에 사진이 있어요. 보여드릴까요?”
제이슨이 휴대폰을 열어 사인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와아, 와트 사인이네. 부럽다. 제이슨.”
“와트 팬이세요?”
“미식축구 팬들 중 대부분은 다 와트를 좋아할걸.”
“반가워요. 선생님. 와트 팬이신 줄 몰랐어요.”
“근데 제이슨 안경 없이 휴대폰이 보이니?”
“네, 이제 잘 보여요.”
의사는 제이슨의 상태가 호전된 것을 보고 놀랐다.
‘조로증이 상태가 호전되는 건 1프로의 환자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케이스인데. 설마 제이슨에게 그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세포가 이유 없이 빠르게 노화하는 조로증은 증상의 완화만이 최선의 치료일 뿐 증상이 개선되는 일이 드물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지난주에 내가 처방한 약이 달랐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떻게 나아진 거지?’
의사가 제이슨에게 말했다.
“제이슨 정밀 검사를 한번 해 보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