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세상의 모든 사랑 (5)
은우는 귓가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동화처럼 새가 울다니 역시 미국은 좋구나. 아파트는 새소리를 듣기가 힘든데.’
제이슨도 눈을 감은 채 새소리를 들고 있었다.
‘늘 외롭던 아침이었는데 은우와 함께 일어나니 정말 좋다. 아침은 뭘 먹지? 은우는 뭘 좋아할까? 은우 시차 적응하느라 피곤할지 모르니 먼저 깨우지 말아야지.’
은우가 조심조심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일어났어?”
“응. 미아내. 내갸 깨어꾸냐.”
“아니야. 일어났는데 눈 감고 있었어. 난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아까 일어났어.”
은우가 화장실에 간 사이 제이슨은 부엌으로 가 아침을 준비했다.
메리가 제이슨을 보며 웃었다.
“잘 잤어? 제이슨.”
“네. 엄마.”
부엌에는 길동이 나와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제이슨이 메리에게 물었다.
“엄마, 와플 만들어도 돼요? 은우에게 와플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러렴.”
메리가 와플 기계를 꺼내주었다.
제이슨은 볼을 꺼내 밀가루와 버터, 우유를 넣고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와플 기계에 반죽을 넣고 누르자 달콤하고 향긋한 와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와아, 이게 무슨 냄새야?”
화장실에서 나온 은우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제이슨이 제일 잘 만드는 게 와플이거든. 어렸을 땐 정말 많이 만들었었는데 요즘은 좀 뜸했지?”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와플을 만들어 줄 거예요.”
와플이 완성되자 제이슨은 냉장고에서 생크림, 크림치즈, 블루베리잼을 가져와 접시에 덜었다.
제이슨이 만든 와플과 길동이 구운 베이컨과 반숙 계란을 합치자 그럴싸한 아침 식사가 되었다.
“잘 먹게뜸니댜. 제이슨, 거마어.”
“많이 먹어. 은우야. 다음에도 내가 또 아침 만들어줄게.”
은우는 제이슨이 만든 와플에 생크림을 묻혀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은우의 입술에 생크림이 잔뜩 묻었다.
“은우, 산타 할아버지 같아. 하하하.”
“산타 할뷰지? 내갸 산탸 하뷰지댜.”
은우가 제이슨의 장난이 재밌었는지 얼굴 가득 생크림을 묻히고 장난을 쳤다.
은우가 제이슨의 볼에 생크림을 묻혔다.
“아악. 안 돼.”
제이슨이 비명을 질렀다.
은우가 제이슨의 코에 생크림을 묻혔다.
“루돌프.”
제이슨도 은우의 코에 생크림을 묻혔다.
“루돌프 투.”
제이슨과 은우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메리가 둘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루돌프들이네.”
은우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제이슨을 위한 선물을 제이슨 방에 숨겨놓고 싶은데 제이슨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이슨은 밥 먹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메리가 은우에게 말했다.
“다 먹었으면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도 돼. 은우야. 제이슨은 밥 먹을 때 시간이 남보다 오래 걸려. 소화기관이 약해지고 있어서 잘 씹지 않으면 체하거든. 노화의 현상 중 하나래. 다 먹으면 갈 테니 가서 쉬고 있으렴.”
“네네네네네.”
은우는 제이슨의 방에 선물을 숨겨두기 위해 먼저 부엌을 빠져나왔다.
은우는 제이슨의 방을 꼼꼼히 관찰했다.
‘눈에 확 띄지 않아야 해. 그렇지만 또 너무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안 돼.’
선물을 적당한 순간에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너무 빨리 찾아도 재미가 없고 또 너무 못 찾아서 선물을 준 것이 허사가 되어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은우는 골똘히 고민하다가 선물을 책상 서랍과 창틀 사이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천체 망원경 옆에도.
‘제이슨이 내가 떠난 다음에도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은우는 선물을 놓으면서 소원을 빌었다.
‘제이슨이 늘 행복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제이슨이 버킷리스트를 다 해 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세요.’
은우가 선물을 숨기자마자 제이슨이 방으로 들어왔다.
“뭐 하고 있었어?”
은우는 당황했다.
“아무거또 안 해떠.”
“이상한데 왜 그렇게 당황해? 은우야?”
“아내또.”
그때 길동이 제이슨의 방으로 들어왔다.
“은우야, 짐 챙겨야지. 일하러 갈 시간이야.”
“벌떠요? 가기 실탸.”
“은우가 제이슨이 좋긴 좋은가보다. 저런 말 절대 안 하는데.”
“그럼요. 제이스는 내 소듕한 칭규예요.”
제이슨은 은우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다니.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제이슨이 은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은우야, 노래 잘 부르고 끝나고 다시 만나. 네 팬들이 너를 기다릴 거야.”
“알아. 그치만.”
은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늘 혼자 있던 제이슨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혼자가 되면 더 외로워질 텐데.’
은우는 제이슨이 맘에 걸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괜찮아. 은우야. 티비로 네 노래를 듣고 있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아라떠. 꼭 다시 올게.”
은우는 길동의 손을 잡고 아쉬운 발길을 떼었다.
“또 봐. 은우야.”
“또 뱌. 제이슨.”
아쉬운 작별 인사 뒤 은우는 차에 올랐다.
제이슨과 메리는 그 자리에 서서 은우를 태운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자.”
메리는 제이슨이 걱정되었다.
‘행복했던 만큼 쓸쓸할 텐데 어떻게 하지?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틀어줄까?’
메리는 제이슨의 방에 들어가 은우의 음반을 틀어주었다.
“거리를 냐셔면 날 보는 시션들.
누냐, 횬아, 할뷰지, 할모니
내갸 그러케 기여운가여.”
제이슨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메리에게 말했다.
“엄마, 나 괜찮아요. 그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가셔도 돼요.”
“걱정은 무슨. 엄마 너 걱정 안 해.”
“엄마 목소리 들으면 다 알아요. 엄마 내가 쓸쓸할까 봐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죠? 난 아기가 아니에요. 혼자 노래 듣거나 티비를 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아?”
메리는 요즘 들어 점점 더 떨어지는 제이슨의 시력이 걱정이었다.
‘시력마저 사라진다면 제이슨의 삶은 얼마나 더 답답해질까?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제이슨은 메리를 손으로 밀기 시작했다.
“진짜 괜찮아요. 엄마 나 좀 쉴게요.”
“알았어.”
메리는 제이슨의 방에서 나왔다.
‘제이슨이 사춘기인가.’
제이슨은 방문을 닫고 은우의 웃음소리를 상상했다.
‘정말 즐거웠었어. 멀리 가지 않아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으니까.’
제이슨은 은우를 떠올리며 망원경 근처로 갔다.
‘내 버킷리스트도 이루고 정말 뜻깊은 날이었네. 어젠 별도 참 밝았어.’
제이슨은 망원경을 보다가 근처에 둔 은우의 편지를 찾았다.
[내 진구. 제이슨.]
글자 아래에는 제이슨과 은우가 함께 바닷가에 서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려진 파란색 파도. 하늘에선 갈매기가 날고 제이슨은 두 발로 서서 은우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게 나네.’
[올림포스의 천마 페가수스의 시인의 상상력 레벨 2.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시각, 청각, 촉각, 후각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제이슨은 은우의 그림 속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었다.
아무리 백사장을 빠르게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있었다.
은우도 신이 나는 듯 제이슨을 보면서 웃었다.
“헤헤헤헤헤헤.”
제이슨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쭈글쭈글 주름진 노인의 손이 아닌 매끄러운 소년의 손.
‘이게 원래 나야.’
제이슨은 거울을 보고 싶었다.
“은우야, 나 어때?”
“체고야. 너무 머띠더. 제이슨.”
“정말?”
“네네네네네.”
제이슨은 모자를 벗고 바람을 만끽했다.
제이슨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춥지 않고 기분 좋아.’
담요 없이, 모자 없이 바람을 맞아본 적이 없었던 제이슨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게 원래 나라고.’
***
은우는 첫 번째 무대 공연을 앞두고 긴장이 되었다.
‘늘 뽀뽀댄스팀과 함께였는데 혼자 하려니 조금 긴장이 되네. 미국 무대는 처음인데 왜 이렇게 무대가 큰 것 같지?’
두 명의 MC가 은우를 소개했다.
“[와칸다 포에버]”
“와찰라, 와찰라.”
관객석에서 터지는 환호 소리.
“이은우.”
“이은우.”
이어지는 MC의 소개.
“빌보드 차트 10위의 [난 너무 귀여워]에 이어 새로운 신곡으로 미국 무대를 찾아왔습니다.”
“[아기로 살기는 너무 피곤해]”
화려한 조명과 함께 노란색 티셔츠에 청바지, 하늘색 스카프를 두른 은우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쩰리는 죠금먄
초콜리또 죠금먄
자기 저네 이다끼
밥 먹기 저네 손다끼.”
좌측의 커다란 화면이 켜지고 화면 속에 까만색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은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좌측 화면 속의 은우는 아기 회사원처럼 보였다.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정장을 입은 은우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무대 위의 은우가 화면 속의 은우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래떠 징쨔 피겅해?”
좌측 화면 속의 은우가 부장님 흉내를 내며 하품을 했다.
“징쨔 피겅해.”
두 명의 은우가 동시에 하품을 하며 신문을 찢었다.
은우는 이마를 닦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춤을 추었다.
“이쪽 뱌라. 저쪽 바랴.
엄마에게 와랴.
아빠에게 와랴.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오른쪽 화면에 앞치마를 두른 은우가 나타났다.
앞치마를 두른 은우는 그릇을 들고 설거지 댄스를 추었다.
무대 위의 은우가 오른쪽 화면의 은우를 보면서 물었다.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오른쪽 화면의 은우가 그릇을 내려놓고 청소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징쨔 피건해.”
왼쪽 화면과 오른쪽 화면의 은우, 무대 위의 은우가 함께 노래했다.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세 명의 은우는 함께 신발로 바닥을 닦는 춤을 추었다.
무대 아래에선 팬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피건해. 피건해.”
백인들의 입에서 뜻도 모르는 한국말이 터져 나왔다.
흑인들은 은우의 춤을 따라 추고 있었다.
새로운 은우가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열기가 더해졌다.
“정장 입은 거 좀 봐. 너무 귀엽잖아.”
“앞치마가 더 귀여워.”
“은우는 귀여움으로 우릴 죽일 셈인가?”
세 명의 은우가 함께 춤을 추자 팬들은 은우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와찰라. 와찰라.”
“이은우. 이은우.”
***
제이슨은 은우의 무대를 보고 있었다.
‘세 명의 은우라니 너무 재밌다. 정장 입은 은우는 너무 진지해 보이고 나중에 은우가 회사에 취직하면 저런 모습이 되려나? 한 이십오 년쯤 후에.
앞치마 두른 은우는 너무 귀여워 보이는데 집안일에 치인 우리 엄마를 보는 거 같아.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피곤한 거 같아. 현대 사회는.
아기마저도 피곤하니까.’
제이슨은 티비를 보다가 책상 서랍으로 가 편지지를 꺼냈다.
‘은우 무대에 대해 적어둬야겠어.’
제이슨은 서랍에서 은우가 남겨놓은 두 번째 선물을 찾았다.
‘별사탕이잖아. 은우가 나에게 준건가?’
제이슨은 별사탕의 포장지를 뜯어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사탕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별. 사탕. 별이 내 입 속에 있네. 은우야. 고마워. 난 너로 인해서 항상 외롭지 않아.’
제이슨은 은우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