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세상의 모든 사랑 (3)
은우는 아침을 먹고 어린이집에 갔다.
정우가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횬아, 횬아, 오느른 무뜬 노리 하고 놀까?”
“바이킹 탈까?”
요즘 어린이집에서는 얼마 전에 구입한 튜브로 된 바이킹이 제일 핫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미 바이킹 위에는 시우, 지호, 준수, 연아와 혜린이가 타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아, 무서워.”
아이들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히잉. 우린 자리 엄떠. 횬아.”
정우가 은우의 손을 잡고 울상을 지었다.
노랑이가 정우를 위로하려는 듯 옆으로 와 낮게 울었다.
“냐옹.”
은우가 노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슬퍼햐지 말랴고. 거마어. 노량아.”
현정이가 안테나 머리띠를 한 채로 옆으로 왔다.
“그러케 재민냐?”
“그런갸 뱌. 헤헤헤헤. 넌 왜 안 타?”
“외계인드른 저런 노리를 조아하지 아나. 저러케 소리 지르면 지구인드레게 들키고 말 거야. 이건 비미린데 내 진짜 엄마갸 날 차자떠.”
“정말? 잘 대따.”
“그래서 난 저런 거 안 타.”
은우는 도도한 현정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현정아, 그래도 네가 많이 밝아진 거 같아 다행이야. 정말 너에게도 엄마가 생겼으면 좋겠다.’
김 마리아 수녀님이 현정이와 은우, 정우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 같이 물감 놀이할까? 바이킹보다 재밌을지도 모르는데.”
“조아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놀이방으로 갔다.
노랑이와 까망이도 아이들을 따라갔다.
수녀님이 커다란 종이를 바닥에 펼쳐 주셨다.
“자, 옷에 묻으면 안 되니까 미술복을 입자.”
현정이, 은우, 정우는 미술용 앞치마를 하고 팔다리도 토시로 싸맸다.
“자, 이렇게 손과 발에 물감을 묻히고 걸으면 예쁜 그림이 돼.”
수녀님이 손바닥에 파란색 물감을 묻혀서 종이 위에 찍었다.
“와아, 파란 손바닥이다.”
“요술 아파트에서 본 귀신 손바닥 생각난댜. 파란 손바닥 줄꺄? 노란 손뱌닥 줄꺄?”
현정이의 장난에 정우가 울음을 터트렸다.
“귀신 시러. 무서어. 하지 마야.”
정우는 은우에게 꼬옥 붙어 있었다.
“갠차나 정우야. 기신 엄떠. 걱정하디 먀.”
은우가 정우의 손을 잡고 토닥여 주었다.
“미아내. 무서어할 줄 몰라떠. 내 머리띠 빌려주까?”
현정이가 사과의 뜻으로 머리띠를 빌려주려고 했다.
“아니.”
정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김마리아 수녀님이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정우야, 머리띠를 빌려주는 건 현정이 누나가 사과하고 싶어 하는 거야. 현정이 누나에겐 머리띠가 매우 소중하거든. 하지만 정우는 남자아기라서 머리띠가 별로지? 중요한 건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니까 우리 현정이 누나 사과를 받아줄까?”
정우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물감 놀이를 시작해 봅시다.”
“네네네네네.”
정우는 손바닥엔 노란 물감을 발바닥엔 빨간 물감을 찍어서 네 발로 기어다녔다.
“어흥, 냐는 사쟈다.”
정우가 사자 흉내를 내었다.
현정이는 발바닥에 까만 물감을 묻히더니 총총총총 뛰었다.
“난 외계인.”
은우는 손바닥엔 분홍색 물감을 발바닥엔 초록색 물감을 묻혔다.
“난 오랑우타니댜.”
은우는 오랑우탄 흉내를 내며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우아, 횬아 징쨔 오랑우탄 가타.”
“헤헤헤헤헤.”
“야옹.”
그때 노랑이가 노란색 물감을 밟고 지나갔다.
노랑이의 발에 묻은 노란색 물감도 종이 위에 찍혔다.
“노랑이 발 기여어.”
은우가 노랑이의 노란색 발자국을 보며 감탄했다.
“야옹.”
까망이가 옆으로 오더니 낮게 울었다.
“까망이갸 질투 나나 뱌. 헤헤. 기여어.”
은우가 까망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까망이가 지나가다가 까만색 물감을 꼬리에 묻혔다.
까망이의 꼬리가 종이 위에 줄을 그었다.
“헤헤헤헤. 까먕이 꼬리 붓 가탸. 그치?”
“응, 까망이 천재 고양이야 그치? 횬아.”
“까망이 미술 천재인갸 뱌. 우리 노랑이랑 까망이를 뉴요그로 보낼꺄?”
은우는 노랑이와 까망이가 뉴욕 미술관에 데뷔하는 상상을 하였다.
‘노랑이와 까망이가 박수갈채를 받고 사람들이 노랑이와 까망이가 그린 그림을 사 가는 거야. 그럼 정말 재밌겠다.’
정우가 은우의 말을 듣더니 울상을 지었다.
“안 대. 횬아. 그럼 노랑이랑 까망이 모 뽀쟈냐. 앙.”
“노랑이랑 까망이 안 가. 걱정하디 먀. 정우야.”
은우는 정우를 달래면서 생각했다.
‘휴우, 세 살은 정말 어려워. 다섯 살은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는데. 세 살은 정말 힘들다. 정우야 어서 빨리 다섯 살이 되렴.’
놀이방 문이 열리며 시우, 지호, 준수, 연아와 혜린이가 들어왔다.
혜린이가 물감 놀이하는 아이들을 보더니 외쳤다.
“우리도 물감 놀이할래요.”
정우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아깐 우리 안 태어져짜냐.”
현정이도 정우의 옆에 서서 외쳤다.
“마자. 나빠떠. 우린 안 끼어주고.”
“미안해. 애들아. 다음엔 끼워 줄게.”
김마리아 수녀님이 아이들을 중재했다.
“그럼 이제 정우랑 은우, 현정이가 바이킹 타고 시우, 지호, 준수, 연아와 혜린이가 물감 놀이할까?”
“네에.”
시우, 지호, 준수, 연아와 혜린이가 앞치마를 하는 사이 정우와 은우, 현정이는 바이킹을 타러 거실로 나갔다.
정우와 은우가 오른쪽에 타고 현정이는 왼쪽에 탔다.
“우아.”
김마리아 수녀님이 바이킹을 밀자 아기들은 신이 났다.
“헤헤헤헤헤.”
정우가 무서운지 은우의 손을 꼭 잡았다.
“정우야, 횬아는 안 무서어. 냔 다섯 짜리랴 하나도 안 무서어.”
“횬아, 나도 다섯 짜리 대면 하나도 안 무서어?”
“응, 다섯 짜른 하나도 안 무서어.”
“나도 빨리 다섯짜리 대고 십따.”
정우는 은우를 우러러보았다.
현정이는 맞은편에 앉아 소리를 질렀다.
“악”
정우는 현정이의 소리가 시끄러워 귀를 막았다.
“눈나 너무 시끄러어. 기 아프자냐.”
현정이가 목소리를 낮춘 채 입만 벌리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저 눈나는 너무 트기하다니까.”
정우가 현정이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우는 현정이의 표정이 너무 재밌게 느껴졌다.
은우도 현정이를 따라 입만 벌린 채 비명 지르는 흉내를 내었다.
“횬까지 왜 그래?”
“재미짜냐. 헤헤헤헤. 너도 해 뱌. 정우야. 이러케 이블 크게 벌리고 아아아악.”
“헤헤헤헤헤헤. 횬아. 이땅해.”
정우는 이상하다고 하면서도 은우를 따라 했다.
김마리아 수녀님은 입만 벌린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세 아기를 보면서 웃었다.
‘장난꾸러기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티 없이 자라렴.’
***
제이슨은 은우가 보낸 메일을 열었다.
‘첨부 파일이 있네. 이건 뭐지?’
파일을 클릭하자 은우가 만든 노래가 나왔다.
“사량하는 나의 엄먀.
우리 처음 만냔 순갼 기억하나요?
나를 따뜨하게 안아준 엄먀.
너무 거마여요.”
맑고 아름다운 은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이슨은 추억에 잠겼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엄만 나와 함께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어.
아픈 나 때문에 엄만 안 해 본 일이 없었지.
인형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기도 했어. 그래도 늘 병원비가 모자랐으니까. 아빤 택시를 운전하셨고 나 때문에 두 분은 늘 피곤한 얼굴을 하고 계셨어. 그래서 난 아프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어.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면 피곤한 두 분이 더 힘들어할 것만 같았으니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 아빠는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 나는 왜 아플까? 나는 왜 건강하지 못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끝없이 우울해졌지.
엄만 날 보며 항상 웃어줬어. 그리고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해 줬지. 엄마가 이야기해주는 동화 속에서 난 용을 무찌르는 용사였고 마법에 빠져 망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왕자였어.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어. 이야기 속에서 난 더 이상 아프고 나약한 내가 아니었으니까.’
노래를 들으며 제이슨은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났다.
제이슨이 노래를 듣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며 제이슨의 엄마 메리가 들어왔다.
“제이슨 피자 먹지 않을래?”
“조금 있다가요.”
“이건 무슨 노래니?”
메리가 제이슨 옆에 앉으며 물었다.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마라요. 엄먀.
내 아픔보댜 엄마의 눈무리 더 슬퍼요.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엄마가 내 엄먀여서 너무 조아떠요.
시가니 흘러 내갸 세상에 다시 오게 돼도
우리 다시 꼭 만냐요.”
메리는 은우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마치 이건 제이슨이 나에게 하는 말 같잖아.’
제이슨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아이였다. 이유도 없이 아파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조로증이라는 병명을 알게 된 것은 제이슨이 24개월 되던 때였다.
‘처음 제이슨이 조로증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도무지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세월이었다.
그 시간을 버티게 한 것은 제이슨에 대한 사랑.
‘내 목숨을 줘서 널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텐데.’
메리는 제이슨이 또래처럼 놀 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뼈가 부러질까 봐 놀이터에서 뛰어본 적도 없었지.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이 아파오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두통이 오기도 하고.’
자신보다 더 빠르게 늙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그렇지만 제이슨 엄만 네 엄마라서 행복하단다. 지금도.’
많이 아플 텐데 제이슨은 병원을 다닐 때도 짜증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늘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해주는 따뜻한 아들.
그런 제이슨을 어느 날 갑자기 볼 수 없게 될까 봐 메리는 두려웠다.
“엄마, 울지 마요.”
메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제이슨이 닦아주었다.
“이 노래, 제 친구가 만들어 줬어요. 좋죠? 이거 엄말 위한 노래예요.”
메리는 제이슨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놀랐다.
‘제이슨에게 친구가 있었다니. 제이슨은 또래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80대 노인처럼 마르고 주름진 피부.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 때문에 제이슨은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제이슨에게 생긴 첫 번째 친구네.’
메리가 제이슨에게 말했다.
“언제 한번 집으로 초대하렴.”
“네.”
제이슨은 은우에게 답장을 보냈다.
[안녕. 은우야.
날 위해 만들어준 노래 고마워. 우리 엄마도 그 노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노래를 만들어준 보답으로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올 수 있니?
널 보고 싶긴 하지만 넌 한국에 살고 난 미국에 살고 있으니까 올 수 없으면 편하게 말해도 돼.
내 친구가 돼 줘서 고마워.]
보리가 제이슨의 메일을 받고 외쳤다.
“멍멍(은우야, 제이슨에게서 메일이 왔어. 확인해 볼래?)”
“정말?”
은우가 보리의 말을 듣고 태블릿 앞으로 왔다.
“멍멍(제이슨이 네가 만들어준 노래가 마음에 쏙 든대. 제이슨의 엄마도 좋아하신다는데.)”
“우아, 잘대따.”
“멍멍(제이슨이 집으로 널 초대하고 싶다는데?)”
“그래, 제이스네 지베 놀러가야게따.”
“멍멍(근데 너 미국에 언제가는데? 길동이 형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스케줄 확인해야지?)”
“길동이 횬아한테 전하해야게따.”
은우가 키즈폰으로 길동에게 전화를 했다.
“횬아, 저 미국 갈 뚜 이떠요?”
“곧 일정이 잡힐 거 같아. 다음 음반을 미국에서 내기로 결정했으니까.”
“미구게 사는 칭구가 놀러오라는데. 언제 간다고 하까요?”
“글쎄. 정확한 일정이 잡히면 알려줄게.”
“네네네네네.”
길동은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우는 언제 미국에 친구를 만든 거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