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결혼식 (5)
강라온은 빌보드 차트를 확인 중이었다.
‘지난주보다 일곱 계단 상승.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있어. 낮은 순위긴 하지만 기대해볼 만한 건 아직 은우가 미국에서 어떤 활동도 가수로서 한 적은 없었다는 거지.’
미국에서의 은우 활동은 [위대한 목소리]와 [블랙 레오퍼드 2]를 중심으로 한 배우 활동, 코카콜라 광고의 모델 활동, 카를로스의 전시회 활동이 전부였다.
‘지금이 신곡을 내기에 적당한 시기이긴 한데 현재 미국 트렌드에 은우의 노래가 통할까?’
강라온은 길동이 넘겨준 은우의 노래 파일을 틀었다.
“쩰리는 죠금먄
초콜리또 죠금먄
자기 저네 이다끼
밥 먹기 저네 손다끼.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은우 특유의 밝고 맑은 목소리를 잘 살린 곡.
후렴구의 후크도 강하게 들어가 중독성이 있었다.
‘쉽고 예쁜 곡이야. 국내 시장에 내놓으면 어느 정도 반응을 가져갈 수도 있는 곡이기도 하고.’
은우의 건강상의 이유로 접어야 했던 1집 음반 때문에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은우가 음반 활동을 빨리 재개해 주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았다.
‘[블랙 레오퍼드 2]의 인기가 아직 남아있는 시점이니 국내에서도 충분히 선방할 수 있긴 할 텐데. 게다가 윤호의 곡 [페스티벌]도 수박 순위 50위로 진입을 시작했고.’
[페스티벌]의 인기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홍보도 하지 않고 활동도 안 했는데 수박 차트에 진입하다니. 은우가 무명 작곡가이던 윤호의 곡을 살려 놓았네. 케미기샤의 목소리도 너무 아름답고 보리의 짖음도 정말 잘 살려냈어.’
강라온은 [페스티벌]을 들으면서 미소 지었다.
‘현장감을 잘 살려낸 곡이야. 녹음보단 라이브 같다는 느낌을 주네. 은우와 케미기샤, 은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노래가 나올 수가 없었겠지. 정말 셋이 재밌게 노는구나.’
국내 차트로 간다면 [페스티벌]의 인기와 더불어 손쉽게 수박 차트 1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정과 모험 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할지 강라온은 갈등에 빠졌다.
‘국내에서의 반응이 아무리 좋아도 레이니나 캣걸스처럼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은우는 배우로서도 재능이 있으니 국내에서만 가수 활동을 시키고 미국에선 배우로서만 활동하는 게 나은 걸까.’
강라온은 윤호가 편곡한 파일을 틀었다.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아기료 살기는 피건해.”
키즈 파일 녹음본은 은우의 목소리만으로 녹음돼 있어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멜로디의 선율이 잘 살아있어 맑고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면 윤호의 편곡본에는 강한 비트가 들어가 있어 다른 느낌이 났다.
‘발라드가 댄스곡이 됐군. 리듬감 좋은데. 자연스러운 코드 변주도 좋고.’
윤호의 편곡이 더해지자 [아기로 살기로 피곤해]는 신나는 댄스곡이 되었다.
‘국내 발표든 미국 발표든 일단 안무를 짜야겠어. 그런데 미국으로 간다면 아기무용단은 어떻게 하지?’
미국 진출의 또 다른 변수는 은우의 댄스팀이었다.
‘미국 아기들을 모아서 댄스팀을 선발해야 한다면 머리가 아플 거 같은데.’
강라온은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찾았다.
“이철, 내 방으로 오라고 해.”
***
비행기에서 내린 은우는 공항으로 나왔다.
공항에는 은우의 팬들이 은우를 기다리며 환호하고 있었다.
“은우야, 누나 한 번만 봐 줘.”
“은우야. 보고 싶었어.”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의 셔터음과 환호성.
은우는 팬들 사이에 서 있는 할머니들을 발견했다.
“하뮤니.”
은우는 자신이 벽화를 그려주었던 경선이 할머니와 화성댁 할머니, 경자 할머니를 기억했다.
“은우야, 엄마 생긴 거 축하해.”
“결혼식 날 못 가서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우리가 진작 갔어야 하는데.”
은우가 경선이 할머니와 화성댁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갠차나요. 하뮤니. 감샤함니댜.”
경자 할머니가 옆에 서 있던 백수희에게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주었다.
“이거 너무 고마워서. 우리 은우 잘 봐 줘요. 복 받을 거야.”
옆에 서 있던 경선이 할머니와 화성댁 할머니도 말을 보탰다.
“그럼, 그럼. 복 받을 거야. 우리 은우가 밝고 씩씩해도 엄마가 없어서 늘 맘에 걸렸는데 내가 결혼식 뉴스 보고 그날부터 다리 뻗고 잤어.”
“집값 올라서 다리 뻗고 잔 건 아니고?”
“화성댁은 꼭 분위기 깨는 데 선수라니까. 이 감동적인 분위기에 그런 말을 꼭 해야 해?”
“집값 올라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해야지. 빼놓지 말고.”
“그래, 은우야. 네가 카를로스라는 게 밝혀지고 뉴욕 전시회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몰려왔단다. 미술평론가라나? 네 그림 덕분에 우리 동네 전체가 집값이 뛰었어. 덕분에 이제 노후 걱정을 조금 덜게 됐단다. 고마워.”
“특히 뉴스에 나왔던 나랑 화성댁, 경자네 집 가격이 많이 올랐어. 정말 고마워.”
경자 할머니가 은우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은우야, 할머니 폐지 그만 줍고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집 팔고 고향에서 편안히 지낼 거야. 다 네 덕분이야. 서울살이 지치기도 했는데 내려가도 힘들 거 같아서 망설였거든.”
“잘 대떠요. 하무니. 징쨔 잘 대떠요.”
“할머니가 시골에 내려가도 뉴스는 꼭 챙겨볼 거야. 은우 뉴스는 꼭 다 잊지 않고 찾아보니까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도 꼭 유명한 배우, 가수가 돼서 세계 사람들을 다 놀라게 만들어버려. 알았지?”
“네네네네네.”
은우 가족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백수희가 창현에게 말했다.
“할머니들 참 잘되셨어요. 고생 그만하셔도 돼서.”
“그러니까요. 나이 드신 분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노인 빈곤율이 매우 높더라고요.”
“맞아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폐지 줍고 일하시는 모습 보면 짠한데 도와드릴 수 없어서 맘이 무거웠어요. 은우 참 대단하다. 집값을 올리다니.”
“저도 뉴스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림이 집 가격을 올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나한테도 진작 알려주지. 그럼 아빠한테도 자랑했을 텐데.”
“그때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요.”
은우는 마음속으로 할머니들의 행복을 빌었다.
‘정말 잘됐어요, 할머니. 나이 들어서도 힘드신 거 같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집값이 올라서 할머니들이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건강하게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지내세요.’
백수희는 보자기를 보면서 웃었다.
“이 보자기 보니까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요. 우리 할머니도 살아계실 때 꼭 이런 보자기에다 물건을 싸 주셨는데 할머니들은 다 비슷한 거 같아.”
“뭘 넣으셨을까 궁금하긴 하다.”
“집에 가서 풀어봐요.”
은우 가족에 집에 도착하자 집에서는 영탁과 보리가 열렬하게 환영 인사를 했다.
“멍멍(은우야 나 안 보고 싶었어? 응? 나 혼자 집에서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어. 나만 안 데려가고).”
“미아내. 과믄 강아지를 안 바다주자냐.”
처음에 창현과 백수희는 보리도 데려가려고 했지만, 괌의 동물반입절차가 너무 복잡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보리는 혼자 삼박사일을 보내서인지 뾰로통해져 있었다.
“땀툐니 마디는 거 마니 져찌?”
“멍멍(간식 좀 먹고 산책 좀 했어. 그동안 너무 심심해서 내가 새 어플을 만들었어. 그리고 지난번 어플로 번 돈으로 뭐할지 계획도 세우고.)”
은우가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고해떠. 보이.”
백수희는 할머니들이 준 보자기를 펼쳐 보았다.
“세상에.”
보자기 속에는 꿀 한 통과 푹 고운 닭백숙이 보온통에 담겨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이런 걸 싸 주셨겠지?’
백수희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백수희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할머니는 수희를 참 많이 예뻐해 주셨다.
‘방학 때마다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에 내려가면 기차역에 나와서 날 기다리시던 할머니. 그 따뜻한 품과 좋은 냄새. 옥수수랑 호박을 잘 삶아주셨는데.’
따뜻한 닭백숙 한 그릇이 할머니에 대한 예전 추억을 소환하였다.
“엄먀. 이거 머예여?”
“닭백숙이야.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어. 먹어 볼래?”
“네네네네네.”
백수희는 은우에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닭백숙을 떠 주었다.
은우는 닭백숙을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엄먀도 머거요. 가치 머거야 더 마디죠.”
은우가 아기용 수저로 뜬 닭백숙을 백수희의 입에 넣어주었다.
“냠냠냠냠. 아이, 맛있어. 은우가 주니까 더 맛있네.”
은우는 백수희의 반응이 신나서 닭백숙을 또 떠 주었다.
“냠냠냠냠.”
보리가 닭백숙 냄새를 맡더니 부엌으로 왔다.
“멍멍(이게 무슨 냄새야. 나도 좀 줘.)”
“엄마, 보이 머겨도 대요?”
“이건 간이 돼 있어서 보리에게 나쁜데. 간식 주자.”
백수희에게 찬장에서 보리의 간식을 꺼냈다.
“자, 보리 손.”
“멍멍(나도 사람 음식 먹을 줄 안다고. 입맛은 사람인데. 오래 안 살아도 되니 사람 음식 먹고 싶다. 간식을 먹을 때마다 재롱을 부려야 하다니 굴욕이야. 생각해 봐, 은우야.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꺼낼 때마다 손 줘 봐. 손 이러면. 세상에.)”
보리는 백수희에게 손도 내밀고 뽀뽀도 하고 빵야도 하고 닭가슴살 간식을 맛나게 먹었다.
은우는 보리에게 미안해서 백수희 몰래 간식을 하나 더 주었다.
“멍멍(역시 넌 내 친구야. 내 맘을 가장 잘 알아주는. 참 너 아까 메일 왔다. 내가 읽어봤는데 눈물이 찔끔 났어. 괜찮으면 답장을 해 주지 그래?)”
“답쟝??”
은우의 메일은 보리가 관리를 해 주고 있었는데 답장을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은우는 궁금한 마음에 메일을 열어 보았다.
“이거 다 영어네. 보리 일거져.”
“멍멍(조로증에 걸린 중학생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가 네 팬이래. 네 노래를 들으면서 희망을 얻었다고 하더라. 기다려봐. 편지 읽어줄게)”
[은우에게. 안녕. 난 제이슨이야.
난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어.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도시지. 나는 아이스크림과 여름을 좋아해. 공룡도. 공룡을 너무 좋아해서 밥도 공룡들과 같이 먹어.
난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지내왔는데 내가 다섯 살 때 조로증에 걸린 걸 알게 됐어. 의사가 일곱 살을 넘지 못할 거라고 말했었는데 운 좋게 난 지금 열 살이야. 매우 운이 좋지. 할아버진 늘 나에게 말했어. 넌 운이 좋은 아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올해 들어서 내 몸이 전과 달라진 걸 느껴. 아마도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난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서 친구가 없어. 내게 친구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그리고 내 작은 고양이 루나뿐이야. 난 내가 떠난 다음에 그들이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나는 더 슬프거든. 그래서 요즘 그걸 고민 중이야. 어떻게 하면 남아있는 내 가족들에게 내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난 아직 답을 모르지만 네 목소릴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껴. 나도 우리 가족들에게 그런 편안함을 주고 싶어.]
은우는 편지를 들은 뒤 할 말을 잃었다.
‘아직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빠른 나이인데 고작 열 살. 부모님은 얼마나 슬프실까?’
은우는 제이슨의 슬픔에 공감했다.
‘나도 케미기샤를 두고 죽어야 했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케미기샤를 생각했으니까. 운 좋게 다시 태어나 케미기샤를 만났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귀신으로 남아서라도 케미기샤를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은우는 제이슨을 도와주고 싶었다.
“보이야. 답장을 보내져.”
“멍멍(알았어. 역시 모른 척할 수 없는 편지지?)”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