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전시회 (2)
전시회가 끝나고 바넷이 정산을 마쳤다.
‘총 512만 달러야. 목표 금액을 훨씬 넘겼어. [블랙 레오퍼드 2]가 큰 역할을 해 준 것 같아.’
유독 아기와 부모들이 많이 와 준 전시회였다. 아기와 부모들은 그림을 구매하지 않고도 따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겠다며 적은 후원금이나 저금통을 주고 간 사람들도 많았다.
바넷은 아기들이 주고 간 돼지 저금통을 들고 뭉클한 마음으로 보았다.
바넷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 구두를 닦으면 1달러를 주셨지. 설거지를 대신 해도 1달러를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돈을 모아서 저금했던 게 기억나.’
어린 시절 바넷에게 1달러는 큰돈이었다.
‘1달러면 내가 좋아하는 메달 모양 초콜릿을 먹을 수 있었지.’
바넷은 반년 동안 모은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 그림 도구를 샀었다. 반년 동안 쳐다보기만 하던 화방의 물감을 샀을 때 바넷은 뛸 듯 기뻤다.
‘어른이 돼서 그때보다 훨씬 좋은 물감을 사게 되었지만, 그때의 기쁨을 다신 느낄 수 없었어. 어쩌면 그런 느낌은 어린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
바넷은 저금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여기에 담긴 건 돈이 아니라 아기들의 소망, 기쁨, 그리고 유년 시절의 꿈, 다른 아기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많은 전시회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지만, 이번만큼 보람찬 일은 없었다고 바넷은 생각했다.
‘좀 더 경쟁력 있는 커리어를 가지기 위해 늘 가장 이슈가 될 만한 전시회를 기획하고자 했었지. 가장 잘 나가는 화가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었고 좀 더 특이한 이벤트를 고민했었지. 근데 그런 일들이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
바넷 그 시간 속에서 넌 행복했니?’
바넷은 오랜만에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어린 시절의 바넷은 풍부한 감성을 지닌 아이였다. 잘 울고 잘 웃어서 계집애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었지만.
그의 외할머니는 바넷에게 말했었다.
“바넷. 감정이 풍부한 건 죄가 아니란다. 넌 예술가의 별을 타고났어. 예술가들은 지루한 일상에 마법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란다.”
“마법이요?”
“그렇지. 상상이 없으면 인생은 너무 지루하거든.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사실 우리 인생엔 너무 많은 불공정, 불평등이 있단다. 그게 인생이지. 그래서 우린 꿈을 꾼단다. 영화도 소설도 그림도 모두 다 우리가 꾸는 꿈이야. 그걸 만드는 사람이 예술가지.”
어린 바넷에겐 마법사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멋지게 느껴졌다.
“예술가의 별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야. 너의 풍부한 감정들을 잘 지키며 살아가렴. 바넷.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마법을 부려서 네가 하는 재밌고 아름다운 상상들을 보여주렴.”
“네, 할머니.”
바넷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바넷의 그림엔 바넷만의 색깔이 있었다. 사람들은 멀리서도 바넷의 그림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예중과 예고를 거쳐 대학인 파슨스대에 이르렀을 때 바넷은 이미 개인전을 하기 시작했었다.
‘항상 앞자리에 서 있어서 늘 앞서고만 싶었어.’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삶. 첫 번째 기획을 맡았던 전시회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바넷은 전시기획자로 이직을 결심하였다.
‘연봉이 훨씬 높아진 게 장점이었지. 화가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연봉이었으니까.’
괜찮은 아파트, 좋은 차, 안정된 생활.
바넷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만 믿어왔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꿈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하는 마법사인가?’
***
은우는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지미 쇼]에 초대되었다.
지미가 관객들에게 은우를 소개했다.
“[블랙 레오퍼드 2]의 은우 군입니다.”
은우는 효과음처럼 터지는 관객의 박수 소리에 놀랐다.
‘진짜 관객이 앞에 앉아있네.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이구나.’
은우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국 팬 여러뷴 방가어요.”
“영화에서 [와찰라]역을 했죠? [블랙 레오퍼드 2]는 어떤 영화인가요?”
“재민는 영햐.”
“좀 더 길게 말해 주겠어요?”
“모두갸 행복해지는 이야기예요.”
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은우의 표정에선 정말로 행복이 묻어나는 듯했다.
토크쇼의 사회자 지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추가로 질문을 더 하고 싶었는데 은우 표정을 보니 어떤 영화인지 알 것 같군요. [블랙 레오퍼드 2]가 전작 [블랙 레오퍼드 1]의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축하해요.”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은우도 관객들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지미는 이 신박한 리액션에 당황했다.
“은우 군. 관객은 박수를 치지만 관객의 박수를 모두 다 따라서 치진 않아요.”
“추카해 주셔서 걈사해떠요. 추카는 마니 하면 조은 거랴고 아빠갸 그래떠요.”
은우의 말에 관객들이 웃기 시작했다.
은우는 갑자기 웃는 관객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상하다. 한국 팬들은 이렇게 소리 내서 웃어주지 않았는데 내가 정말 웃긴가?’
늘 장난을 치고 싶던 장난꾸러기 은우는 미국 사람들의 리액션에 힘을 얻었다.
“제가 이버네 코카콜라 모데리 댄는데요. 트림 대회를 해꺼든요.”
“아, 그 대회 저도 봤어요. 정말 웃기던데.”
“거기 트림을 12번 하는 아저씨가 이떠더요, 끄윽(높게), 끄윽(낮게), 끄윽(높게), 끄윽(낮게), 끄윽(낮게), 끄윽(낮게), 끄윽(낮게), 끄윽(낮게), 끄윽(낮게), 끄윽(낮게).”
은우는 턱을 아래로 끌어당겨 두 턱을 만든 다음 트림 소리를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예상대로 관객석에선 웃음 보따리가 터졌다.
지미가 은우의 트림을 흉내 냈다.
“끄윽, 악. 은우 흉내를 내려고 했는데 이건 흉내가 아니라 그냥 트림이군요.”
관객석에선 더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맨마저도 웃어서 카메라가 흔들리고 있었다.
은우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트림 대회에 재민는 샤라미 또 인는데요. 트림을 마니 오래 하면 이기거든요. 그래서 트리믈 마니 하려고 하다가 어떤 샤라미 바지에 똥 싸떠요.”
[똥 싸떠요] 할 때의 은우의 표정은 너무나도 신나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관객석에선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이 터졌다. 지미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콧구멍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은우는 이 기세를 몰아서 더 크게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에서 좀 먹히나 보다. 한국에선 귀엽다는 말만 많이 듣고 내 이야기에 저렇게 많이 웃어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역시 내 장난이 먹힐 줄 알았어.’
은우는 마지막으로 아주 큰 트림을 하기 위해 턱을 잔뜩 끌어당기고 뱃속의 공기를 모았다.
“꺼억.”
은우는 트림을 하면서 두 손을 모아서 장풍을 날리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플래티넘 드래곤]의 브레쓰.”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지미가 은우의 동작을 흉내 내었다.
“브레쓰. 새로운 유행이 되겠군요. 여러분 앞으로 트림은 브레쓰로 합시다.”
카메라맨이 알았다는 듯 카메라를 끄덕였다. 관객들이 자리에 서서 박수를 쳤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거 같아.”
“은우, 체고. 브라보!”
“브레쓰.”
***
은우는 에릭의 녹음실에 와 있었다.
에릭이 은우를 위해 준비한 과자를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은우야. 같이 노래를 불러줘서.”
“헤헤헤헤. 에릭 아저씨 노래 쟈래요.”
은우가 에릭에게 가이드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이 곡은 어린 시절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야. 원래 멜로디만 있었는데 그날 너와 함께 버스킹 공연을 하고 나서 가사를 붙였어.”
“칭규 조아요. 은우도 어린이지베 준슈, 시우, 정우, 현정이, 연아, 혜리니 눈나가 이떠요.”
에릭은 은우의 대답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어린 시절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 그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게 참 행복했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은 친구보단 경쟁자에 가까웠다.
‘어른이 된다는 게 어려운 일이긴 하지. 하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엔 어린아이가 살고 있으니까.’
에릭은 곡 속에 편안하고 따뜻한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득 담았다.
녹음이 시작되고 전주가 흘러나왔다.
겨울날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녹여줄 것 같은 따뜻한 기타 소리.
에릭이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지쳐 울고 있던 날 넌 내게 왔지.
나의 하나뿐인 친구.
너로 인해 난 삶의 의미를 얻네.
나의 작은 친구.”
은우가 노래를 받았다.
“넌 혼쟈갸 아니야. 어로어 마라요.
넌 혼쟈갸 아니야. 어로어 마라요.”
에릭이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내게 말했어.
그건 네 잘못이야. 넌 왜 그렇게 문제를 만드니?
하지만 난 억울했어. 그건 오해예요.”
은우가 노래를 불렀다.
“그건 네 잘모시 아니야. 그건 네 타시 아니야.
난 언제냐 너의 편.
네게만 열려이떠.”
녹음이 끝나고 에릭이 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은우야. 네 덕분에 처음 마음을 찾았어. 내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었는지. 그리고 음악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해 줘야 할지.”
“헤헤헤헤. 에릭 체고예요. 우리 하뷰지가 에릭 대게 조아해요. 에리기랑 가치 노래 불러떠 너뮤 조아때요.”
“다음에 미국에 오면 그땐 우리 집에서 묵다 가렴. 내 딸과 아들을 소개시켜 줄게. 이번엔 일정이 짧으니까 다음엔 꼭 놀러와. 우린 멋진 통나무집을 가지고 있어. 소도 키우고 있고 말이야.”
“우와, 징쨔요? 재미께따.”
은우의 두 눈이 기대로 가득 찼다.
***
미국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은우는 케미기샤와 감격의 포옹을 하였다.
“케미기샤.”
“은우.”
둘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은우야, 정말 보고 싶었어.”
케미기샤는 은우와 떨어져 있던 그 시간 동안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세상에 다시 혼자가 되어 남겨진 듯한 외로움.
케미기샤는 자신이 은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은우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은우가 캐서린에게서 산 인형을 꺼내 케미기샤에게 주었다.
“케미기샤. 이 고양이는 루루야. 이 고양이가 널 지켜줄 거야.”
“고마워.”
케미기샤는 루루를 꼬옥 안았다.
군데군데 상처를 입은 작은 고양이. 거리에서 살아서인지 몸도 깨끗하지 않았다.
‘루루도 삶이 힘들었구나.’
파드와가 죽고 난 뒤 거리에서 구걸하는 삶을 살았던 케미기샤는 루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루루야. 내게 널 지켜줄게.’
창현이 은우에게 택배를 건네주었다.
“은우야, 이거 미국에서 네 앞으로 온 거야. 캐서린이라는 분이 보낸 거던데.”
“캐서린?”
은우는 신이 나서 포장을 뜯었다. 택배 안에는 은우와 케미기샤 인형이 들어 있었다.
“와, 나네.”
케미기샤가 한눈에 자신의 인형을 알아보았다.
“너무 예뻐.”
케미기샤는 은우와 자신의 인형을 번갈아 보았다.
“꼭 영원히 함께 있어.”
케미기샤가 인형 두 개를 어깨동무시켰다.
“걱정하디 먀. 케미기샤. 우린 헤어지지 아나.”
은우는 캐서린이 보낸 편지를 읽어보았다.
[안녕, 은우야. 네가 다녀간 후 루루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 한국에서 온 케이팝 스타에게 인형 의뢰도 받게 됐고. 덕분에 이제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이 생겼어. 월세가 밀려있었는데 밀린 월세도 정리할 수 있었고.
널 만나기 전에 난 내 재능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너를 만나 다시 내 꿈과 재능을 믿게 돼서 정말 행복해. 브로드웨이에서 루루의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만들어 다음 주부터 공연하기로 했어. 소규모 극장이지만 너무 설레. 내가 하고 싶었던 거니까.
루루를 동화로 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다며 디즈니에서 다녀갔어. 루루가 유명해진다면 그건 네 덕일 거야. 고마움의 표시로 너와 케미기샤의 인형을 제작해서 보낸다. 네가 다녀간 후 너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는데 넌 정말 유명한 아기더구나. 내가 그렇게 대단한 아기를 만났었다니. 지금도 신기하게 느껴져.
네 덕분에 루루는 생명을 얻게 됐어. 루루가 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하네.
혹시 다시 미국에 온다면 루루를 찾아주지 않겠니? 그땐 더 멋진 인형을 선물하고 싶어.]
은우는 캐서린의 편지를 덮으며 밝게 웃었다.
“헤헤헤헤. 모듀가 행복해져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