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개봉박두 (2)
화면 속에서 와찰라가 옴바쿠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케미기샤가 놀라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은우. 안 돼. 내가 가서 구해줄게.”
은우가 놀라서 케미기샤에게 속삭였다.
“케미기샤. 저건 영햐쟈냐. 극장에서 소리 지르면 안 대. 난 여기떠. 걱정햐디 먀.”
“너무 실감 나서 그랬어. 미안해.”
“내갸 손을 자뱌줄게.”
은우가 케미기샤의 손을 잡았다.
화면 속에서 옴바쿠가 모두를 죽이려고 공격 기술을 썼다.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
자신을 제외한 상대방을 모두 죽이는 마법.
관객석에서는 탄식이 터졌다.
“옴바쿠 나쁜 놈.”
“은우 죽으면 어떻게 해?”
“와찰라는 결국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구나.”
“은우 표정 너무 비장한데. 귀엽고 슬퍼.”
은우는 꼭 잡고 있는 케미기샤의 손이 움찔거리는 걸 통해 케미기샤가 얼마나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케미기샤가 안타까운 장면마다 내 손을 꼬옥 쥐고 있어. 걱정 마. 케미기샤. 와찰라는 꼭 이길 테니까.’
와찰라가 [위대한 신들의 숲]에서 신들의 선택을 받아 다시 목숨을 얻자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졌다.
“브라보, 은우가 살았다.”
그때, 관객석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영화 보는 데 집중 안 되게.”
그 뒤로는 조용한 가운데 작게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와찰라가 [플래티넘 드래곤]이 됐어. 너무 멋지다.”
“다 죽었어. 옴바쿠.”
“요정 부족이 도와줘서 너무 다행이야.”
“자하라도 살아났네. 모두 행복한 결말이라 좋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케미기샤가 은우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은우야, 영화는 꿈과 같은 건가 봐. 형이 죽고 내 옆에 아무도 없을 때 난 늘 꿈을 꾸었거든.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을 때 눈을 감고 상상을 했어. 상상만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였거든.
상상 속에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형도 있었어. 난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가서 떼를 썼지. 떼쓰는 게 행복한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이런 후회를 하면서.
인생은 상상이 아니지만 말야. 그 상상이 없었으면 난 그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거야.
영화는 꿈처럼 아름다워.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거 같아.”
은우는 케미기샤의 말에 가슴이 멍해졌다.
‘케미기샤, 내가 없는 그 시간 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케미기샤가 은우에게 말했다.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찍을 거야?”
“아직 머르게떠. 다으멘 노래를 부를 건데.”
“나도 같이 부를까?”
“케미기샤도?”
“나도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은우는 다음 음반에 한 곡을 케미기샤와 함께 부르는 노래로 만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케미기샤는 어떤 영햐를 조아해?”
“은우가 나오는 영화.”
“헤헤헤헤헤.”
케미기샤와 은우는 함께 손을 잡고 웃었다.
화면에 크레딧 영상이 올라왔다.
크레딧 영상 속에서 와찰라 분장을 한 은우가 나왔다.
“태건. 태건도.”
스태프들이 박수를 쳤다.
“은우 멋지다.”
“태권 보이. 은우.”
은우가 신이 나서 발차기를 하다가 미끄러졌다.
은우가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외쳤다.
“와챨랴. 변신! 두두두두두두.”
은우가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촬영장 주변을 뛰어다녔다.
“냐는 바햐무드. [플래티넘 드래곤]이댜. 모듀 비켜랴.”
은우의 진지한 표정에 스태프들은 다양한 연기를 펼쳤다.
“저희를 구해주세요. 은우.”
“아이, 무서워라.”
다음 영상은 드럼 앞에 앉아있는 은우.
채드윅 감독의 목소리가 은우에게 묻는다.
“은우, 와찰라 노래를 만들었어?”
“네네네네네.”
“그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겠니?”
“준비댄나요?”
“준비됐어요.”
“시이짝.”
은우가 작은 손으로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드럼 연주는 제멋대로 여기저기 드럼을 기분 내키는 대로 두드리고 있다.
하지만 표정만은 최고.
은우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와따따] 왕구게 평햐가 차자오면 냐는 초콜리들 머글 거야.
[와따따] 왕구게 평햐가 차자오면 백성드른 초콜리들 먹찌.
옴바쿠도 조아하는 초콜리
평햐가 차자오면 감오게도 초코리슬 보내줄게.
초콜리슨 달콤해. 달콤해.
와챨랴는 용감해. 용감해.”
듣고 있던 채드윅이 아빠 미소를 짓는다.
“은우야, 그건 [와따따] 주제곡이야? 와찰라 주제곡이야?”
“초코리시 너무 조아서요.”
“아, 초콜릿송이야?”
해맑게 웃는 은우의 얼굴에 클로즈업.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있던 관객들이 은우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악, 귀여워. 나도 초콜릿송 부르고 싶다.”
“저게 은우가 부르니까 귀여운 거지. 네가 부르면 귀여울까?”
“와찰랴는 달콤해. 달콤해.”
관객들은 벌써 은우의 초콜릿송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
은우는 [블랙 레오퍼드 2]의 부산 개봉을 위해 부산으로 출발했다.
길동이 캐리어를 끌고 은우와 케미기샤가 손을 꼬옥 잡은 채 KTX에 올랐다.
“와, 기챠댜.”
은우는 처음 타보는 KTX에 설렜다.
“은우, 기차가 진짜 길다.”
“응, 기챠는 길고 빨랴. 우리 두 시간만 이뜨면 부샤네 도착한대.”
길동이 옆에서 은우와 케미기샤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부산은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야. 그래서 두 번째 무대 인사 극장을 부산에 있는 극장으로 고른 거 같아. 부산엔 영화의 거리도 있단다. 은우도 거기 손바닥 찍으면 멋있겠다.”
“손바댜기요?”
“유명한 배우들이 자신의 손 모양을 찍어서 그걸 거리에 남겨두는 거야. 아카데미 최연소 수상이니 충분히 찍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우아. 그거 해보고 시퍼요.”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부산엔 바다가 있단다. 케미기샤는 바다 처음 보겠다.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설명해 줘. 바다에 대해서.”
은우가 영어로 케미기샤에게 바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거 너투브에서 봤어. 바다.”
“바댜는 머쪄. 재미떠. 저네 어리니집 칭규드리랑 가떠더. 꼳게도 이꼬.”
“우와. 기대된다.”
케미기샤는 처음 보게 되는 바다에 신이 났다.
“거기가면 모래노리도 할 뚜 이떠. 횬아, 모래노리 세트 이떠요?”
“안 챙겨왔는데. 가서 하나 사지 뭐. 문구점은 있겠지.”
길동은 은우를 따라다니면서 문구점 찾는 데 도사가 돼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케미기샤는 기차의 속도에 놀랐다.
“우와, 나무가 빨리빨리 뒤로 간다.”
길동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KTX는 자동차보다 빠르니까 차를 타고 보던 풍경과는 비교가 안 될 거야. 계란 먹을 사람?”
은우가 왼손을 귀 옆에 붙이고 높이 손을 들었다.
“네네네네네.”
“케미기샤도 같이 먹어.”
길동이 가방 안에서 삶은 계란이 든 비닐봉지를 꺼냈다.
“나도 기차 오랜만이네. 기차 여행은 역시 먹는 맛이지. 어렸을 땐 도시락도 사 먹었었는데. KTX는 다 좋은데 식당칸이 없다니까.”
길동은 예전 무궁화호의 식당칸이 그리웠다.
‘천안에서 먹는 가락국수도 별미였는데. 정차하는 시간 동안 가락국수를 사서 기차에 타서 먹으면 심장이 쫄깃쫄깃. 국수는 꿀맛이었는데 말야.’
은우가 계란을 쥐고 길동을 바라보다가 길동의 이마에 계란을 부딪혔다.
“아이고 이마야.”
길동이 과장된 동작으로 이마가 아픈 척을 했다.
“헤헤헤헤헤.”
은우가 웃으면서 계란 껍질을 벗겼다.
“아아아아아.”
은우가 껍질 벗긴 계란을 케미기샤에게 주었다.
“고마워.”
케미기샤가 계란을 먹었다.
“마디떠?”
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물. 물.”
길동이 케미기샤에게 사이다를 주었다.
“와아. 맛있다.”
길동이 계란을 까자 그것을 본 은우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사자 흉내를 냈다.
“냐는 사쟈다. 계랴늘 주면 안 잡아먹는다.”
“사자님. 어서 계란을 드시고 저를 살려주세요.”
은우가 계란을 받아먹으며 씨익 웃었다.
케미기샤가 계란을 쥐고 길동을 바라보았다.
“왜 나를 봐? 은우, 네가 케미기샤에게 나쁜 거 가르쳐 줬지? 형 이마는 돌이 아니라고.”
케미기샤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지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별수 없지. 해라 해.”
길동이 이마를 가져다 대자 케미기샤도 길동의 이마에 계란을 깼다.
“아이쿠, 내 이마.”
길동이 아픈 척을 하고 드러눕자 케미기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헤헤헤헤헤.”
은우도 길동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 웃긴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애기들은 이런 장난을 너무 좋아한다니까. 난 이제 애보기 마스터 1급이야. 이 정도면 전문가지. 암.’
계란을 먹으며 웃고 즐기다 보니 어느덧 부산역에 도착했다.
길동이 부산역 근처에서 렌트한 차를 찾아 해운대역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 내린 케미기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집이야? 너무 좋다.”
길동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은우랑 촬영하면 자주 오게 돼. 이 숙소도 1박에 오십만 원짜리지만 은우랑 같이 오면 경비처리가 되니까 말이지. 은우 덕분에 좋은 숙소는 다 가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케미기샤가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나도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음.”
생각지도 못한 케미기샤의 물음에 은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케미기샤가 스타가 되려면 진짜로 내가 신들의 재능 중 하나를 주어야만 할 것 같은데. 근데 케미기샤 꿈은 선생님이었는데 갑자기 왜 그러지?’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물었다.
“케미기샤? 스타갸 대고 시퍼?”
“은우 보니까 스타가 좋은 거 같아. 사람들이 축하도 많이 해주고 좋은 곳도 공짜로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은우는 생각했다.
‘케미기샤, 스타가 다 나 같은 건 아니야. 무명인 사람들도 얼마나 많다고. 그건 17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야.’
은우는 파리넬리이던 시절, 얼마나 많은 소년들이 카스트라토를 꿈꾸며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갔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카스트라토의 화려한 삶을 꿈꾸며 거세를 했지만, 모두가 파리넬리처럼 이름난 가수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가수로서의 능력을 확인받지 못한 그들은 거세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며 변변한 직업도 가지지 못한 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다 죽어갔다.
‘파리넬리일 때 내가 쥔 행운은 1프로에 해당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어쩌면 이번 삶의 행운도 신들의 재능이 없었다면 1프로의 확률이었을 거야.’
길동이 케미기샤에게 대답했다.
“케미기샤, 스타가 되는 건 힘든 거야. 연습도 많이 해야 하고.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 힘든 점도 많아. 그렇지만 네가 되고 싶다면 내가 강라온 대표님께 말해서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해줄게.”
순간 은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려 줄 거라고 믿었던 길동이 형이 케미기샤의 꿈을 부채질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케미기샤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길동에게 물었다.
“정말 저도 할 수 있어요?”
“그건 난 잘 몰라. 하지만 대표님이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야. 네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길동이 숙소의 문을 열었다.
유리창으로 해운대의 앞바다가 보였다.
케미기샤가 가장 먼저 유리창으로 달려갔다.
“와아. 물이다.”
은우도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바댜댜.”
길동이 신이 난 두 아이에게 말했다.
“다음 일정 전에 잠깐 바다 구경하러 나갈까?”
“네네네네네.”
은우와 케미기샤가 모래사장을 달렸다.
“바리 푹푹 빠진다.”
“신발에 이상한 게 들어갔어. 은우야.”
“그게 모래야. 이러케 터러.”
은우가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모래 터는 법을 보여주었다.
바닷가의 다른 아이들이 갈매기에게 새우비를 주고 있었다.
케미기샤가 신기한 듯 은우에게 물었다.
“저 큰 새는 뭐야?”
“갈매기.”
“저게 저 새 먹이야?”
“아니, 저건 새우비라는 가쟈인데. 우리도 해 볼까?”
은우가 길동에게 가서 물었다.
“횬아, 새우비 사게 백 언만 저여.”
“백 원으로 새우비 못 사. 만 원 줄게.”
길동이 은우에게 만 원을 주었다.
은우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케미기샤에게 대답했다.
“케미기샤, 새우비 사러 가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