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블랙 레오파드 2] (12)
촬영을 시작한 뒤 첫 번째로 맞는 휴일, 길동이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오늘은 뭐 하고 싶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케미기샤 보고 시퍼요. 백수희 눈나도 만나고 십꼬.”
백수희가 보고 싶은 건 이해가 가지만 케미기샤란 그 아이를 은우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길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은우에겐 지금껏 많은 친구들이 있어 왔지만, 그 어떤 친구도 케미기샤와 같은 관심을 받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명석이한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케미기샤에게 어떤 매력이 있나? 마치, 형제처럼 굴잖아.’
길동은 차 키를 챙기며 말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캠프로 가보자.”
길동의 차가 캠프로 향했다.
“은우야.”
길동의 차가 마을에 들어서자, 은우를 기다리는 케미기샤와 백수희가 보였다.
은우도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케미기샤.”
문이 열리자마자 은우는 케미기샤에게 달려가 안겼다.
둘은 서로를 안고 한참을 있었다.
백수희도 은우의 반응에 놀랐다.
‘은우가 저런 적은 없었는데. 이산가족 상봉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은우와 케미기샤의 만남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각별했다.
“횬아, 눈나. 우리 쇼핑하러 갈 뚜 이떠요?”
은우는 휴일을 맞아 케미기샤에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 주고 싶었다.
선물로 많은 물건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고르는 그 기쁨은 또 다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은우는 아기라서 혼자서 그 모든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길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가고 싶으면 가야지.”
“오랜만에 하는 쇼핑이라니 신나는걸.”
길동의 차를 타고 백수희와 케미기샤, 은우는 루사카에 있는 쇼핑몰로 향했다.
은우가 차 안에서 케미기샤에게 물었다.
“케미기샤. 머 가지고 시퍼?”
“아이스크림. 티비에서 본 거.”
“어떤 아슈크림?”
“요렇게 요렇게 빙빙 돌려서 탑처럼 쌓는 아이스크림. 뱀처럼 꼬불꼬불해.”
“아, 먼지 알게따.”
케미기샤는 한 번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캠프에 온 이후 아주 가끔 딱딱한 얼음으로 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빙과류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 수 있는 날은 너무도 행복했지만 케미기샤의 마음속에선 티비에서 보았던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떠나지 않았다.
부드럽고 달달해 보이는 소프트아이스크림. 화면 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이는 너무나 맛있다는 듯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언젠가 꼭 저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말 거야.’
케미기샤의 소원 목록 1번이 소환되었다.
네 사람은 차에서 내려 쇼핑몰 입구로 향했다.
백수희가 쇼핑몰 입구에서 외쳤다.
“와아, 여기에도 이런 쇼핑몰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단층으로 된 쇼핑몰이었지만 나이키 등 몇몇 의류 브랜드가 입점해 있었고 마트도 있어서 먹을거리도 다양하게 살 수 있었다.
백수희가 점원에게 물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은 어디서 파나요?”
“그건 옆 건물 극장 입구에 있어.”
점원이 옆 건물을 가리켰다.
네 사람은 함께 극장 건물로 갔다.
“여기도 극장이 있네. 나중에 [블랙 레오파드 2]도 여기서 개봉하겠지?”
길동이 은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진짜 신날 거 가타요.”
케미기샤가 말을 이었다.
“이곳이 잠비아에 있는 유일한 극장이에요. 낸시가 말해줬어요. 루사카에 가면 극장이 있다고. 여기서 영화를 보는 게 제 꿈이에요.”
“우리 그 꾸믈 꼭 이루쟈.”
은우가 케미기샤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극장에는 [라이온 퀸]의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길동이 물었다.
“[라이온 퀸]도 재밌을 거 같은데 오늘 영화도 보고 아이스크림도 먹을까? 어때, 케미기샤?”
“보고 싶긴 한데 은우가 출연한 [블랙 레오파드 2]가 더 보고 싶어요. 제가 극장에서 처음으로 보는 영화가 [블랙 레오파드 2]였으면 좋겠어요.”
“케미기샤.”
은우는 코끝이 찡해져 케미기샤의 손을 꼬옥 잡았다.
‘너랑 같이 본다면 나도 더 가슴이 뭉클해질 것 같아.’
케미기샤가 말을 이었다.
“은우를 만난 게 제 인생에 큰 선물이에요.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가장 좋은 건 은우예요. 은우를 만나고 나서 가족이 생긴 느낌이었어요. 형이 죽고 나서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외로웠는데. 은우를 만나고 나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너무 행복해요.”
은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케미기샤. 네가 네 형이야. 파드와.’
은우는 케미기샤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슬펐다. 하지만 케미기샤가 자신을 만난 뒤 행복하다는 말에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니까.’
백수희가 말했다.
“그럼 영화는 다음에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자.”
백수희가 아이스크림 알바생에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4개요.”
“네에.”
노란색 티셔츠에 초록색 앞치마와 모자를 쓴 알바생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기계에서 뽑기 시작했다.
그가 첫 번째 아이스크림을 은우에게 건넸다.
“케미기샤 먼저.”
은우가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케미기샤에게 양보했다.
케미기샤가 첫 번째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머거뱌. 어서.”
케미기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의 맛이 입안으로 퍼졌다.
“맛있어요. 정말. 상상했던 거보다 더요.”
케미기샤는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하나 다 먹었다.
은우는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케미기샤, 한구게 오면 이런 아슈크림 매일 머글 뚜 이떠.”
“한국?”
케미기샤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은우의 고향이라는 것밖에는.
“응, 한구게 가면 더 조은 쇼핑몰도 이꼬 마디는 거또 더 마나. 나랑 한구게 가쟈.”
“내가 가도 될까?”
케미기샤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준 은우에게 늘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국에 가서 은우와 지내게 된다면 은우가 곤란해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힘든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눈치가 빨라지는 법. 케미기샤는 전쟁 속에서 자란 아이답게 눈치가 매우 빨랐다.
은우가 백수희에게 SOS를 청했다.
“눈나, 케미기샤랑 가치 한구게 가도 대죠?”
“아빠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갈 뚜 이떠요. 무조건 갈 거예요.”
은우의 갑작스런 고집에 백수희는 당황했다.
‘은우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케미기샤 이야기만 나오면 달라진다니까. 대체 둘이 정말 무슨 사이인 걸까.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생김새도 저렇게나 다른데.’
은우가 길동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횬아, 케미기샤 아슈크림 하나 더 사져요. 마신나 뱌요.”
“응, 그래.”
길동이 케미기샤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주문했다.
케미기샤는 아이스크림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 은우야. 근데 난 한국에 못 가도 괜찮아. 여기서 날 도와준 거만 해도 정말 고마워.”
“걱정 먀. 내가 꼭 널 한구게 데려갈 거야.”
은우는 굳게 결심했다.
“이제 옷 따러 가쟈.”
은우가 케미기샤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백수희와 길동도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시픈 거 골랴뱌.”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말했다.
케미기샤는 옷 매장을 한참 돌아다니며 이 옷 저 옷 만져보았다.
‘다 좋아 보이긴 하는데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
갑자기 선택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 고민이 되는 케미기샤였다.
케미기샤가 옷을 고르는 사이 백수희가 길동에게 물었다.
“은우, 케미기샤에게 산타가 돼 주기로 한 걸까요?”
“글쎄요. 산타놀이 같기도 하고. 은우가 케미기샤를 만난 뒤로 기분도 좋아지고 일도 더 열심히 하고 그런 긍정적인 변화들도 있긴 한데. 뭐랄까. 케미기샤에게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은우가 형처럼 느껴져서. 실제론 은우가 동생인데 말이죠.”
“덩치는 은우가 훨씬 어린데 자꾸 저렇게 주고 싶어 하니 신기할 뿐이에요. 사실 전 외동으로 자라서 저 마음을 잘 모르겠던데.”
“저도 동생이 있긴 한데. 전 제 동생한테도 안 그랬거든요. 너무 현실감 없어. 은우는 천사인 걸까요?”
“은우가 착하긴 한데 모든 사람에게 저러는 건 아니니까요. 일단 좀 더 두고 봐야겠죠.”
“그래야겠어요. 전 사실 은우가 다시 아플까 봐 겁나서 은우가 하고 싶다는 건 다 들어주고 싶어요.”
“맞아요. 지난번 심리 검사받을 땐 저도 너무 놀라서. 여긴 물가가 워낙 싸서. 저렇게 쇼핑을 해도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니 지켜봐요. 우리.”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옷을 골라주었다.
“모자가 이꼬 주머니갸 인는 후드티는 어때? 모자가 이뜨면 비가 와도 비를 안 마즐 뚜 이떠. 그리고 해벼또 피할 뚜 이꼬.”
“우와.”
“주머니갸 이뜨면 사탕도 너을 뚜 이꼬.”
“우와. 근데 사탕이 매일 생길까?”
주머니에 넣을 물건이 없다 보니 주머니가 있는 옷을 살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케미기샤였다.
“이제 매일 생길꼬야. 그니까 걱쩡 햐디 먀.”
“그럼 이걸로 할게.”
케미기샤는 은우가 골라준 노란색 후드티와 바지를 샀다.
“입꼬 걀 거예요.”
은우가 직원에게 말했다.
케미기샤가 노란색 후드티와 회색 바지를 입고 나왔다.
“우와. 너무 잘 어울려. 케미기샤.”
은우가 케미기샤를 보고 함성을 터트렸다.
“고마워. 은우야. 내가 이런 옷을 입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진짜 오늘은 내 생일만큼 기쁜 날이야.”
케미기샤에겐 이 모든 것이 꿈과 같았다. 늘 캠프에서 구호물자로 넘어온 헌 옷을 입고 지냈으니까. 그마저도 예전에 헐벗고 지내던 시간에 비하면 감사할만한 것이었다.
옷은 추위로부터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케미기샤에게 예쁘고 성능 좋은 새 옷은 보물처럼 느껴졌다.
“이 옷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이 옷만 입을게.”
“그러지 아나도 대. 케미기샤. 앞으론 넌 새 오슬 먀니먀니 가지게 댈 거야.”
“진짜?”
케미기샤는 은우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이브 더 월드]에서 맺어준 후원자가 은우 말고도 몇 명 있긴 했지만, 그들은 케미기샤가 학교에 갈 돈과 식비를 보태주는 정도였다. [세이브 더 월드]에는 케미기샤 말고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케미기샤에게 넉넉한 지원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학교에도 갈 거고 선생님도 될 뚜 이뜰 거야. 매일매일 마신는 걸 먹고 좋은 오슬 이블 거야. 그리고 외롭지 아늘 거야.”
은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케미기샤는 은우를 쳐다보았다.
백수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은우, 케미기샤의 키다리 아저씨야?”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저씨란 소설책이 있는데 고아인 주디와 주디를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주인공인 소설이야.”
“와, 그런 소설이 이떠요?”
은우는 백수희의 말을 들으며 혹시 그 책의 작가도 자신처럼 환생을 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볼까? 저녁은 눈나가 키다리 아저씨 할게. 먹고 싶은 거 맘껏 시켜.”
네 사람은 함께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케미기샤는 처음 보는 메뉴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진만 보아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그런 메뉴판이었다.
“머 머글래?”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물었다.
“고기를 먹고 싶긴 한데.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고기는 스테이크지. 그쳐? 횬아?”
“그러엄. 일단 스테이크 4개를 시키고 그 담에 메뉴를 추가하자. 괜찮죠? 수희 씨.”
“네. 랍스터도 먹을래?”
“랍스터요?”
은우가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압뱌리 큰 가재인데 마디떠. 고기만크미냐.”
“좋아요.”
“그럼 랍스터도 시키고 나는 샐러드도 필요하고 에이드 추가하고 일단 이렇게 주문한 다음 더 시키도록 하자.”
“네, 눈나. 거마어요.”
음식이 나오고 케미기샤는 테이블 위에 깔린 먹음직스런 음식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니.’
케미기샤가 허겁지겁 스테이크를 잡았다.
“천천히 머겨. 케미기샤야. 음시근 마냐. 체하니꺄 천천히 머겨.”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냅킨을 주며 말했다.
“고마워. 나도 모르게 그만.”
길동도 웃으며 말했다.
“많이 먹어. 케미기샤. 백수희 씨가 돈이 많아서 이 식당 전체를 살 수도 있는 분이라서 걱정 안 하고 먹어도 돼.”
“우아.”
케미기샤는 백수희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국이란 나라는 아프리카랑 다르게 부자인 나라인가 보다. 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다 돈이 많은 것 같고. 한국에 대해 공부해 봐야겠어.’
은우가 케미기샤에게 말했다.
“천천히 마니 머거. 케미기샤. 넌 행복할 자겨기 이떠. 넌 소중한 사랴미야. 그리고 앞으로 더 마니 행복해질 거야.”
은우는 마음속으로 케미기샤에게 말했다.
‘전생에서 해 주지 못했던걸. 이번 생엔 다 해 줄게. 비록 내 겉모습이 달라졌지만, 내 마음은 파드와 그대로니까.’
케미기샤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게 은우를 볼 때마다 죽은 형이 너무 생각나요. 은우가 너무 제 형 같아요. 너무 고맙고 너무 따뜻하고.”
“나도 네갸 너무 조아. 케미기샤.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지 말쟈.”
은우가 케미기샤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