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블랙 레오파드 2] (5)
촬영이 끝나고 채드윅이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회식이 있으니 모두 참석해 주세요.”
선풍기를 쐬고 있던 은우가 신나서 외쳤다.
“와아, 우리 오늘 마신는 거 머거요?”
채드윅이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유명한 분도 오실 거야.”
“유명한 분?”
은우가 궁금한 듯 채드윅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이따 보면 알아.”
채드윅이 웃음을 지었다.
길동도 오랜만에 포식을 할 수 있다는 소식에 신이 났다.
‘호텔 조식보다 맛있으려나? 캠프에 있을 땐 너무 못 먹어서.’
캠프의 식량이 충분치 못하다 보니 원하지 않는 강제 다이어트를 하게 된 길동은 촬영장에 온
직후부터 먹을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따 벨트 푸르고 제대로 먹어봐야지.’
길동도 신이 났다.
회식 장소는 빅토리아 폭포 근처의 큰 식당이었다.
현지 스태프인 줄루가 말했다.
“빅토리아 폭포는 세계적인 관광지라 잠비아의 다른 식당보다 좋아. 가격도 비싸고. 대신 음식이 잘 나오지. 현지인에겐 비싼 가격이지만 외국 물가에 비해선 저렴하니까 많이 먹어도 될 거야.”
은우는 신이 났다.
케미기샤를 더 먹이려고 캠프에 있을 땐 다이어트 아닌 다이어트를 한 은우였다. 그리고 와찰라 분장은 멋있었지만, 너무 더웠다.
끝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곤 했다.
‘오늘 꼭 많이 먹을 거야.’
은우의 눈이 빛났다.
식당은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테이블 중앙에 커다란 바비큐가 3종류나 놓였다. 주변에는 다양한 빵과 샐러드, 과일이 놓였다.
촬영감독 룽구가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와찰라야. 옴바쿠가 널 괴롭혀도 쓰러지면 안 돼. 신이 널 보호해 줄 거야.”
“[와따따 포에버]”
은우가 [와따따 포에버]의 공식 포즈. 두 팔을 교차시켜 엑스로 만드는 자세를 취하자 룽구도 똑같이 따라 했다.
“[와따따 포에버]. 연기를 너무 잘해서 네가 와찰라 같이 보여. 분장을 지워도 흑인처럼 생각된다니까.”
“감샤함니댜.”
“촬영 끝나면 아기 같은데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해? 그 긴 대사 외우는 거 힘들지 않아?”
“제가 히어로가 댄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냐요. 꾸미어떠요. [블랙 레오파드 1]은 제가 제일 조아하는 영화여꺼든요.”
룽구는 동양의 작은 아기에게 정이 갔다.
‘이상해. 이 아긴 정말 흑인처럼 느껴진다니까. 인종 차별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흑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런 동질감을 느껴보긴 처음이야.’
룽구는 은우가 [블랙 레오파드 2]의 주연역을 맡게 되었을 때 몇몇 팬들로부터 흑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큰 반발을 샀던 것을 알고 있었다.
‘은우를 도와줄 수 없을까?’
룽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길동은 어서 회식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밖으로 까만색 리무진이 여러 대 정차하는 것이 보였다.
‘대체 누구지? 유명한 사람인가?’
식당의 문이 열리고 아프리카 전통의상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보자 스태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잠비아 대통령이잖아.”
“맙소사. 카운다가 오다니.”
대통령 근처에는 경호원들이 여러 명 서 있었다.
‘영화 회식 장소에 대통령이 오다니. 역시 우리 은우 클라스는 남달라. 덕분에 잠비아 대통령과 악수도 해 보겠네.’
길동의 마음이 설렜다.
카운다를 발견한 채드윅이 달려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카운다 대통령님.”
“반가워요. 채드윅.”
“대통령께서 빅토리아 폭포에 촬영허가를 내주셔서 잘 찍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잠비아는 구리를 팔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구리 가격이 하락한 이후로 이렇다 할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카운다 대통령을 [블랙 레오파드 2]가 세계적으로 흥행하여 잠비아에 많은 관광객이 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광업과 농업 위주로는 나라가 발전하기 힘들어. 여전히 우리나라엔 못 사는 국민들이 너무도 많아. 빅토리아 폭포는 세계적인 관광지니까 영화의 흥행으로 인해 관광객들이 늘어난다면 우리나라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카운다는 [블랙 레오파드 2]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때문에 이례적으로 회식 자리에도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카운다는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는 은우가 궁금했다.
“채드윅, 은우는 어디에 있나요?”
“은우요. 제가 소개해 드리죠.”
채드윅이 테이블에 놓인 고기를 덜고 있던 길동과 은우를 발견했다.
은우는 해맑게 웃으며 아이스크림 접시를 들고 있었고 길동은 은우를 위해 바비큐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카운다, 이 아기가 은우예요. 주인공 와찰라 역을 맡고 있죠. 여긴 은우의 매니저 김길동입니다.”
“안녕하떼요.”
은우가 해맑게 웃었다.
카운다는 은우의 귀여운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사진에서 본 거보다 더 귀엽구나.”
“감샤함니댜.”
“낯선 나라에 와서 촬영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부모님이 보고 싶진 않고?”
“촤려이 재미떠더 갠차나요. 아빠랑 매일매일 통하해요. 아침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위대한 목소리도 보았단다. 그 영화에선 감쪽같이 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감쪽같이 흑인연기를 하는 거니?”
“헤헤헤헤. 배우는 그 사라미 대는 거자나요.”
“역시 최연소 남우조연상 수상자는 다른데.”
카운다는 은우와 같은 인재가 잠비아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인재다. 구리라는 자원 하나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들어. 아기들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부모는 그들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 돌파구가 없으면 이 가난을 이겨나갈 수가 없어.
은우와 같은 뛰어난 배우 한 명만 있어도 나라가 훨씬 나아질 텐데.’
카운다는 은우와 인사를 마친 뒤에 식탁에 앉았다.
스테프들도 음식을 가져온 뒤 자리에 앉았다.
채드윅이 술잔을 들었다.
“[블랙 레오파드 2]의 성공적인 촬영을 위하여! 잠비아의 발전을 위하여!”
사람들의 채드윅의 건배사에 맞추어 건배를 했다.
채드윅이 카운다에게 말했다.
“대통령님도 한 말씀 해 주시죠.”
“우리나라가 [블랙 레오파드 2]에 걸고 있는 기대가 매우 큽니다. [블랙 레오파드 1]도 저에겐 참 감명 깊은 영화였어요. 저는 언젠가 우리 잠비아가 영화 속의 [와따따] 왕국처럼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와따따] 왕국엔 [알루나늄]이라는 지구 최강의 물질이 있지만, 잠비아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국민들을 위해 더 부지런한 대통령 더 고민하는 대통령이 되려고 합니다.
[블랙 레오파드 2]는 잠비아 사람들에겐 단순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꿈이고 희망입니다. 저는 언젠가 잠비아가 [와따따]와 같이 풍요로운 나라가 되길 꿈꿉니다.”
은우는 카운다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맞아요. 대통령님. 아프리카의 삶은 너무나 힘들어요. 특히 아이들에겐요.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었거든요. 태어나보니 아프리카였는데 배가 고프고 아파야만 해요. 매일매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만 해요. 저도 아프리카의 아기들이 너무나 가여워요.’
파드와의 고향 에디오피아는 잠비아보다도 더 가난한 나라였다. 끊이지 않는 내전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절규가 나라를 뒤덮었지만, 사람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은우는 케미기샤가 린다를 만나 에디오피아를 떠나 전쟁이 없는 나라인 잠비아로 건너온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삶이 바뀌려면 학교가 필요해.’
카운다의 말에 몇몇 스태프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아프리카가 고향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아프리카의 현실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카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이 회식은 제가 쏘는 겁니다. 맛있게 식사하시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세요. 모두.”
식당이 사람들의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은우는 아프리카식으로 왼손을 사용하여 고기를 맛있게 뜯는 중이었다.
카운다는 고기를 먹는 은우를 유심히 보면서 물었다.
“음식이 잘 맞니? 외국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서 먹는 걸 불편해하던데 넌 아닌가 보구나?”
“마디떠요. 전 손 쓰는 거 조아요. 아기라서 아직 저가락질도 잘 모타고.”
은우가 자기 손에 든 고기를 카운다에게 내밀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아 하떼요.”
카운다는 얼결에 아 하고 말았다.
“마디떠요?”
은우가 카운다에게 물었다.
“그래, 맛이 좋구나. 하하하하하. 은우가 주니 더 맛있는걸.”
평균 수명이 40살인 아프리카에서 카운다는 이미 노인의 나이에 속했다. 카운다에게도 이미 네 명의 손자가 있었으니까.
카운다는 귀여운 은우의 애교에 살살 녹고 있었다.
신이 난 은우는 고기를 먹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와찰라 고기의 왕.
마딘는 고기를 다스리러 여기에 와찌.
마딘는 고기를 모두 무찌를 게요.
머스타드 소스, 케챱, 마요네즈, 꿀.
찌글 때마다 마디 달라지는 고기.
나는 와찰라 아이스크림의 왕.
마딘는 아이스크림을 다스리러 여기에 와찌.
마딘는 아이스크림을 모두 무찌를 게요.
딸기맛, 초코맛, 바닐라맛.
오느른 어떤 마슬 고를까.”
노래를 열심히 부르느라 씹지 못한 고기가 은우의 입 밖으로 떨어졌다.
앗.
은우는 떨어진 고기를 보며 눈이 커졌다.
“아까어.”
은우가 슬퍼하자 길동이 자기 몫의 고기를 더 주었다.
“은우야, 노래는 고기 끝나고 해. 여기서 이러면 안 돼. 고기 아깝잖아.”
“아라떠요.”
은우는 노래를 너무 부르고 싶었지만 고기가 또 땅에 떨어질까 봐 그만두기로 했다.
‘아프리카에서 고기는 정말 귀한 음식이니까.’
지금도 굶고 있을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음식을 떨어뜨린다는 건 아프리카에선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카운다가 은우에게 물었다.
“너투브에서 봤는데 가수로도 활동한다더니 노래를 정말 잘하는구나. 배우가 더 좋니? 가수가 더 좋니?”
“그건 마치 엄마가 조은지 아빠가 조은지 물어보는 거랑 비슷한데.”
은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원래 내 꿈은 가수였지. 파드와일 때도 그렇고 파리넬리일 때도 그랬고. 그런데 연기도 매력이 있는 것 같아. 연기를 할 땐 전생의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여러 번의 인생을 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카운다는 은우의 재치 넘치는 대답에 웃었다.
“고놈 참 똑똑하네. 그럼 둘 다 하는 게 꿈이니?”
“제 꾸믄 학교를 세우는 거예요.”
“한국엔 학교가 없단 말이냐? 내가 본 영상에선 한국은 매우 잘사는 나라 같던데.”
“한구겐 학교갸 마나요. 한국 말고 아프리카에요.”
“아프리카에?”
“여기 오기 저네 캠프에서 2주 동안 봉사를 핸는데 아프리카 아기드리 너무 힘들고 또 아기드리 어르니 돼서도 잘 살려면 학교가 필요해서요.”
카운다는 다섯 살 아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 어린 아기가 아프리카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어.’
채드윅이 설명을 보탰다.
“은우가 한국에서부터 [세이브 더 월드]라는 아프리카 구호단체를 후원하고 있었나 봐요. 그 단체 소개로 린다가 일하는 캠프에서 2주 동안 봉사를 하다가 왔어요. 영화 촬영이 끝나고 다시 캠프로 돌아가서 1주일 정도 시간을 보낸 다음에 귀국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어린 나이에 대단하죠? 전 저 나이 때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거 같은데 말이에요.”
“정말 대단한 아기구나.”
카운다는 은우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자리에 있던 촬영감독 룽구 역시 은우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데도 은우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다니. [블랙 레오파드 2]의 주연이 되는 걸 반대했던 사람들이 은우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알아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