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블랙 레오파드 2] (3)
아침에 눈을 뜨자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프리카답네.’
은우는 길게 쭉쭉이를 한 번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주스가 필요해.’
냉장고에서 망고 주스를 꺼내 마셨다.
“아, 마시따.”
입술을 한 번 쓰윽 닦은 뒤 옆 침대에 누워있는 길동을 보았다.
길동은 배를 다 내놓은 채 정신을 잃고 잠들어 있었다.
‘형을 깨워야겠어.’
은우는 길동의 배 위에 올라타서 외쳤다.
“횬아, 일어나요.”
“아이쿠.”
아침부터 시작된 공격에 길동은 정신이 없었다.
“횬아, 횬아.”
은우가 배 위에 앉아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헤헤헤헤헤헤.”
길동은 지렁이처럼 몸을 배배 꼬며 정신없이 웃었다.
길동은 몸은 일으켰다.
“일어났다.”
“아빠랑 영상통화하고 시퍼요.”
길동이 휴대폰으로 창현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스마트폰의 화면 속에서 창현이 나타났다.
“아들.”
“아빠.”
그리운 창현의 얼굴에 은우는 눈물을 글썽였다.
“보고 시퍼요.”
“나두. 우리 아들 잘 있어? 음식은 괜찮고?”
“네. 잘 이떠요. 사람드리 다 잘 해주고. 음식도 마시떠요.”
창현의 옆에 영탁이 나타났다.
“은우, 전화 온 거야? 나도 좀 바꿔줘.”
창현이 영탁을 화면 앞으로 끌고 왔다.
거리 조절이 잘되지 않아 화면 앞으로 너무 가까이 서서 영탁은 콧구멍이 크게 보였다.
“땀톤, 코 좀 뱌.”
은우가 그 모습을 보고 마구 웃었다.
“왜? 왜? 웃어.”
영탁이 거리를 조정해서 다시 섰다. 이제야 화면 안에 영탁과 창현이 나란히 보였다.
소리를 들었는지 보리가 마구 짖었다.
“멍멍(은우야. 잘 있어? 전화 좀 자주 해. 네 소식 궁금하단 말야. 동생은 잘 만났어?)”
은우는 보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해줄 수 없었다.
아빠와 삼촌이 함께 있기 때문에 보리의 질문에 전부 대답했다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케미기샤를 만나고 캠프에서 재미께 지내다갸 찰영하러 와떠요. 어젠 첫 촤려을 핸는데 너무 재미고 신나떠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이상하지 않도록 대답했다.
영탁이 말했다.
“많이 탔다. 은우야. 더운 건 괜찮아?”
“더이는 개차냐요.”
은우가 브이 표시를 그려 보였다.
“전햐 자주 할게요. 아빠.”
은우는 그리운 듯 화면 속의 아빠와 삼촌, 보리를 만졌다.
“멍멍(보고 싶어. 은우야. 빨리 와. 너 그거 알아? 4시간이 개들에겐 하루가 되는 거. 이미 개들의 시간으로 넌 96일이나 나랑 떨어져 있었던 거야.)”
보리가 화면을 핥았다.
은우도 보리의 따뜻한 체온과 보드라운 털이 그리웠다. 가끔 장난을 칠 때 떨어지던 콧물마저도 그리웠다.
“보이야. 보고 시퍼. 한국 가면 마니먀니 놀쟈. 따랑해.”
은우가 두 팔을 뻗어 하트를 만들었다.
조연출이 은우의 방문을 열고 말했다.
“은우야, 1시간 후부터 분장해야 돼. 그동안 식사를 해야 지장이 없을 거야.”
“네.”
은우는 시무룩하게 대답을 했다.
“가야 할 거 가타요. 아빠.”
창현이 대답했다.
“은우야, 촬영 잘하고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해. 밥은 꼭 잘 챙겨 먹어야 해. 사랑한다. 우리 아들.”
영탁도 말을 보탰다.
“은우야. 너무 힘들면 참지 말고 길동이 형이랑 스탭들에게 꼭 말해.”
“멍멍(은우야. 건강하게 잘 있다가 와. 와서 케미기샤랑 있었던 일 전부 말해줘. 나 보고 싶다고 너무 울지 말고. 또 전화해. 기다릴게.)”
“네.”
은우가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촬영을 하는 건 재밌지만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다.’
조식을 먹으러 가면서도 은우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가족들이 떠나질 않았다.
***
위기를 알리는 북소리가 [와따따] 왕국에 울려 퍼졌다.
멀리서 달려온 병사가 숨을 고르며 외쳤다.
“[샤캴피노] 왕국이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와찰라는 빠르게 부족장 회의를 소집했다.
다섯 명의 부족장들은 빠르게 빅토리아 폭포로 달려왔다.
와찰라가 입을 열었다.
“[샤캴피노] 왕구기 우리를 공격핸뜸니댜. 오늘 그대드를 부른 건 대책을 논이하고 시퍼서 임니댜.”
[와차차]의 족장 자바리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알루나늄]이 있는 한 [와따따]는 천하무적입니다. 그들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거죠. 어차피 우리가 이깁니다.”
[와파파]의 족장 옴바쿠는 이것이 왕국을 손에 넣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루나늄]이 우리 손에 있긴 하지만 우리의 승리를 장담할 순 없습니다. [샤칼피노] 부족에겐 [시칼타시]가 있지 않습니까? [시칼타시]를 우습게 볼 수 있는 부족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샤칼피노] 부족이 자랑하는 [시칼타시]는 유명한 환각 물질이었다.
연기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시칼타시] 속에 갇히면 누구나 환각을 보게 되었다.
그 환각 속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옴바쿠는 이미 뇌물을 주고 [와라라]의 족장 하미시를 포섭해 놓은 상태였다.
옴바쿠가 하미시에게 눈짓을 했다.
하미시는 알았다는 듯 옴바쿠의 말에 지원사격을 했다.
“차찰라 왕께서 유일하게 고전했던 싸움이 [샤칼피노] 부족과의 전투였지요. 차찰라 왕께선 [시칼타시] 속에서도 살아 돌아오셨지만 많은 장수들이 [시칼타시]의 환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와차차]의 족장 [자바리]가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땐 [알루나늄] 세공기술이 떨어져 변신 레벨 2 이상의 능력자가 없었을 때 아닙니까? 지금 왕국이 보유한 변신 레벨 능력자들의 숫자를 보면 레벨 1의 와찰라 국왕이 있습니다. 레벨 2의 능력자만 해도 옴바쿠 족장을 제외하고도 10명이나 더 있어요. 우리가 [샤칼피노] 부족에게 밀렸던 과거와는 다릅니다.”
옴바쿠는 뇌물을 주고 매수해둔 또 다른 족장 [와하하]의 키와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키와라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와하하] 부족의 사람들 중에는 목소리에 마력을 실을 수 있는 능력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족장인 키와라의 능력은 전대 왕인 차찰라도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다.
키와라가 신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알루나늄]만 발달을 한 게 아닙니다. [시킬타시] 역시 발전을 했죠. 듣기로는 이젠 [시킬타시] 안에 갇히면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알루나늄]이 있어 당장 죽진 않겠지만 오랜 시간 [시킬타시] 안에 갇힌다면 굶어 죽고 말겠죠?”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펴던 [와차차]의 족장 자바리마저도 키와라의 마력에 넘어가고 말았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왕국의 위기군요.”
움바쿠가 족장들을 매수한 사실을 모르는 와찰라는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군사를 파악해야 하는 건 맞아. 하지만 이 정도의 위기라고 볼 순 없어.’
와찰라는 차찰라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킬타시]는 환각이다. 환각 속에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 진짜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짜 생각 말고 너의 진짜 감각만을 믿으면 된다.
나는 바람에 옥수수 가루를 날려 보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킬타시]가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각자가 저 방법만을 기억하고 있으면 빠져나올 수 있다고 와찰라는 강하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심각하지 않은 상황을 일부러 심각하게 만들어가는 옴바쿠였다.
‘대체 무얼 꾸미고 있는 거지?’
와찰라가 이런 의심을 하고 있을 때 옴바쿠가 입을 열었다.
“저는 [와따따] 왕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와파파]에 [알루나늄]을 공급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와찰라는 생각했다.
용맹한 전사들의 부족인 [와파파]가 [알루나늄]을 가지게 되면 [와따따] 왕국은 현실적으로 [와파파]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옴바쿠가 원하는 빅픽처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와찰라는 두 손을 질끈 쥐었다.
‘어딜 가든 가까운 사람이 무섭다니까.’
은우는 파리넬리이던 시절, 자신의 거세시킨 사람이 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분노가 떠올랐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으로 살아왔던 파리넬리의 삶.
하지만 그 삶은 거세의 고통으로 인해 절름발이와 같았다.
음악적 영광은 눈부셨지만,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평생 통증에 시달리며 죽을 때까지 아편이 없으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은우의 눈엔 옴바쿠의 얼굴 위로 형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와찰라는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나에겐 힘이 없다. 조금 더 힘을 모아야만 해. 옴바쿠의 약점은 무엇일까?’
와찰라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옴바쿠가 말을 이었다.
“[와파파]의 용맹한 전사들이 변신능력 1급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어떤 왕국의 침입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저는 이 제안을 거수에 붙이고자 하는데 다들 어떠십니까?”
[와하하]의 족장 키와라가 마력을 실어 말했다.
“동의합니다.”
나머지 족장들도 동의를 외쳤다.
동의하지 않은 것은 와찰라뿐이었다.
5부족 연합 국가인 [와따따]는 중요 안건에 대해서는 투표에 부칠 수 있었다.
와찰라의 부족장 자하라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저희 [와따따] 부족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와파파] 부족이 [알루나늄]을 얻게 되면 저희 5부족 연합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와파파] 부족이 모든 것을 가지고 가고 말 것입니다.”
“무엄하다. 족장들이 말하는데 부족장이 끼어들다니.”
옴바쿠가 큰 소리로 자하라를 꾸짖었다.
자하라는 지지 않고 말했다.
“[와파파] 부족이 가장 힘이 세지만, 한 번도 [와파파]의 족장이 [와따따]의 왕이 된 적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와파파] 부족에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5부족의 대표가 [와따따]인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족장님들. 전전대 왕 하찰라 왕 시절에 [와파파] 부족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을요.”
옴바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당장 자하라를 지하 감옥에 가두라.”
자하라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 말이 틀린 것이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반박을 해보십시오. 왕국의 안위를 방패 삼아 [와파파] 부족에게 [알루나늄]을 주어 [와파파] 부족만을 강대하게 만들려는 족장님의 계획이 저 때문에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 아닙니까?”
옴바쿠는 칼을 뽑아 자하라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참고 있던 와찰라가 차찰라로 변신하여 옴바쿠와 맞섰다.
“캬를 내려랴. 자하라는 [와따따]의 부족장이다. 자하라의 마리 지나쳐따고 해도 자하라를 벌할 권리갸 그대에겐 엄땨.”
옴바쿠는 숨겨둔 본색을 드러냈다.
“왜 나만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형이 아니라 내가 [와따따] 부족의 족장이 되어야 했어. 형에게 밀리다 못해 이젠 다섯 살짜리 꼬마애에게 밀려야 해? 저 애가 왕국을 통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간식이나 먹고 엄마 젖이나 찾을 아기가?”
“그거슨 선대왕의 결정이댜. 나는 조상의 결정을 믿고 따를 뿐이댜.”
“형은 [와따따]의 왕이 될 자격이 없었어. 아버지의 친자식도 아니었으면서.”
와찰라의 눈이 커졌다.
와찰라는 한 번도 차찰라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옴바쿠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차찰라 형은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였어. 전쟁 때 버려진 갓난아기가 형이었지. 어머니가 불쌍히 여겨서 형을 데려와서 키웠을 뿐이야. 어느 부족의 아기인지도 알 수 없는 차찰라. 어머니는 형에 대한 연민과 걱정 때문에 왕위를 물려주자는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어. 하지만 난 달라. 나야말로 [와따따] 왕국을 이어받았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지금이라도 난 내 왕국을 찾겠어.”
빅토리아 폭포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