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블랙 레오파드 2] (2)
세계 최대 폭포인 빅토리아 폭포.
절벽 위 땅에서 와찰라의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와찰라 분장을 한 아기 은우가 비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파리넬리였을 때, 그리고 파드와였을 때 아버지를 잃어본 은우는 그 슬픔을 잘 알았다.
‘보고 싶은 아버지. 당신이 계셨다면 저의 유년 시절이 좀 더 아름다웠겠지요. 정말 그립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파리넬리가 아버지를 잃었던 것은 13살, 파드와가 아버지를 잃었던 것은 5살.
와찰라 역시 5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은우는 떨어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서 있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 한 나라의 왕이다. 나를 믿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울어서는 안 된다.’
케미기샤를 걱정해서 눈물을 참았던 5살의 파드와처럼 와찰라는 울지 않았다.
즉위식의 진행을 맡은 무니가 외쳤다.
“[와따따]의 왕 위대한 차찰라가 돌아가셨다. 온 부족들은 슬픔에 빠졌지만 우리는 더 이상 슬퍼할 수 없다. 새로운 왕 와찰라를 맞이하여 [와따따] 왕국의 견고함을 알리자.”
절벽 위에 서 있던 부족장들이 환호했다.
“와찰라. 와찰라.”
“[와따따 포에버]”
“[와따따 포에버].”
은우가 작은 손을 들자 부족장들이 환호했다.
은우는 부족장들을 보며 생각했다.
‘파리넬리였을 때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부족장들은 양날의 검일 거야. 지금 저렇게 나를 환호하는 척하지만, 언제든 내가 빈틈을 보이면 왕위를 탐내겠지.’
파리넬리는 스페인 왕의 옆에 있으면서 귀족들이 왕을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보았었다. 귀족들은 왕권이 셀 때는 왕에게 넙죽 엎드려 끊임없이 아부를 하지만, 왕권이 약해지는 순간 왕을 업신여기며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권력이 어떤 것인지 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권력은 완벽한 힘의 논리였다.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약육강식의 세계.
날카로운 이빨을 미소 속에 숨기고 있는 사람들.
은우는 앞에 서 있는 부족장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었다.
‘특히 삼촌인 옴바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아마도 삼촌은 자신이 아니라 어린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불만이겠지.’
[와따따] 왕국은 조선과 같이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국왕인 차찰라가 죽자 왕위는 당연히 와찰라에게 넘어왔다.
‘하지만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다섯 살짜리 왕을 인정할 백성들은 없어.’
와찰라는 자신의 왕위가 얼마나 불안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다섯 부족의 연합체인 [와따따] 왕국은 언제든 다시 붕괴될 위험도 가지고 있었다. [와따따]는 왕국 중 가장 작은 나라였다. 땅도 작고 백성도 많지 않았지만 [와따따]가 왕국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비스러운 광물 [알루나늄] 때문이었다. [알루나늄]은 우주의 기본을 이루는 원소로 돼 있다고 하는데 [알루나늄]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누구든지 원하는 것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큰 왕국은 [와차차]. [와차차] 왕국은 가장 큰 땅과 많은 백성을 지녔다.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농사를 짓는 [와차차] 왕국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유일한 왕국이었다. 나머지 왕국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을 바탕으로 [와차차]의 백성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세 번째로 부강한 왕국은 [와파파]였다. [와파파]는 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친 산속에서 짐승을 길들이며 사냥을 하며 살았다. [와파파]의 백성 중엔 용맹한 전사들이 많았다. [와파파]는 외국으로 용병을 수출하기도 했다.
네 번째 왕국은 [와라라]였다. [와라라] 왕국은 난쟁이들의 마을이었다. 난쟁이들은 손재주가 뛰어났다. 손재주를 바탕으로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특히 보석 세공술이 뛰어나서 누구나 한 번쯤은 죽기 전에 [와라라]에서 만든 장신구를 가지고 싶어 했다. 와찰라가 오늘 쓰게 될 왕관 역시 [와라라]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난쟁이 차차가 만든 것이었다. [와따따] 왕국에서 나온 [알루나늄]을 유일하게 세공할 수 있는 것도 [와라라]의 난쟁이들이었다.
다섯 번째 왕국은 [와하하]였다. [와하하] 왕국의 사람들은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눈으로 본 것을 똑같이 그리는 재주를 타고났다. 슬픔을 노래하면 지나가는 새들도 눈물을 흘렸고 사랑을 노래하면 시들어가던 꽃까지 살아났다. 외모도 뛰어나서 미인과 미남이 많았다. [와하하] 부족의 사람들은 열심히 살지 않았지만, 뛰어난 재주와 외모 덕에 부자인 배우자를 만나거나 재주로 돈을 벌어 풍족한 삶을 살았다.
와찰라는 각기 다른 특성의 부족을 이끌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았다. 그러나 왕국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좋은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위식의 진행을 맡은 무니가 외쳤다.
“와찰라는 앞으로 와서 신의 계시를 받으라.”
무니가 은우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웠다.
은우의 왕관에 있는 알루나늄에서 빛이 나와 주변을 감쌌다.
은우가 가슴 앞으로 두 팔을 교차시켜 엑스자를 만들면서 외쳤다.
[와따따 포에버]
은우의 선창에 주변에 서 있던 부족장들도 함께 외쳤다.
[와따따 포에버]
[와따따 포에버]
오로지 [와파파]의 족장인 옴바쿠만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무니가 말했다.
“오늘 우리는 알루나늄의 이름으로 와찰라 왕의 즉위를 함께 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왕국의 일원으로서 와찰라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부족장들이 함께 외쳤다.
“맹세합니다.”
무니가 다음 차례를 진행했다.
“[와따따]의 왕은 스스로 [알루나늄]을 다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와따따]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와찰라는 앞으로 나와 능력을 보이세요.”
왕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
아버지인 차찰라는 언젠가 와찰라가 이 순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찰라가 어린 와찰라에게 말했다.
“와찰라야, 왕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느냐?”
세 살이던 와찰라는 왕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백성에게 고기를 마니 주는 거임니댜.”
와찰라의 귀여운 대답에 차찰라가 웃었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삶. 그것 좋구나. 그럼 그다음으로 왕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백성드리 마니 우또록 하는 거임니댜.”
“하하하하. 우리 와찰라. 매우 똑똑하구나. 행복하고 즐거운 삶. 그것도 좋구나. 그럼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으아아아아앙.”
갑자기 터진 와찰라의 울음에 차찰라가 놀라서 물었다.
“왜 우느냐? 무엇이 널 놀라게 했느냐?”
“아버니미 절 떠나려고 하시는 거 가타서 움니댜. 저는 아직 왕이 대기 시러요.”
차찰라는 어린 와찰라의 영특함에 놀랐다.
‘내가 미래를 대비시키려는 것을 어찌 알고? 그러나 와찰라야. 너는 빨리 자라야만 한다. 밖에서는 [샤캴피노] 부족이 우릴 공격하려고 하고 있고 내 동생인 옴바쿠도 내 자리를 노리고 있다. 옴바쿠가 이끄는 [와파파] 부족은 용맹하기 그지없지. 그들이 우리는 따르는 건 [알루나늄] 때문이란다. [알루나늄]이 없으면 우린 그들에게 왕의 지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단다.’
차찰라가 말했다.
“[와따따]의 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알루나늄]이다. [알루나늄]은 평범한 물질이 아니다. [알루나늄]은 세상을 다스리는 물질인 동시에 세상의 가장 작은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와따따]의 왕들은 즉위식에서 [알루나늄]을 다룰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받곤 한다.
오늘부터 애비가 너에게 [알루나늄]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네, 아버지.”
와찰라는 기어 다닐 때부터 [알루나늄]을 봐 왔다. 늘 빛나는 그것은 영롱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차찰라가 [알루나늄]을 이용해 변신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그것은 아무리 자주 보아도 늘 새롭고 늘 신비로웠다.
[알루나늄] 수트를 입은 차찰라가 표범으로 변했다.
와찰라의 앞에는 유연하고 빠른 한 마리 표범이 있었다.
“표범은 어떤 존재이냐?”
“으아아앙.”
와찰라가 표범의 울음을 흉내 냈다.
“[알루나늄]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표범과 되기 위해서는 표범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15살 때 표범과 싸워 이긴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표범이 내 변신의 원동력이 되었지. 나는 표범을 이겼지만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와따따]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원망 없이 자신이 살기 위해 하는 살생은 상대에게 원한을 남기지 않는다.
미움도 분노도 네 속에 가두지 마라. [알루나늄]은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다룰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알루나늄]은 사랑의 물질이다. 기억하거라. 사랑하는 마음만이 [알루나늄]을 다룰 수 있다.”
“네, 아뺘.”
와찰라가 회상을 마치고 주변에 서 있는 부족장들을 바라보았다.
옴바쿠 삼촌의 눈에서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지지 않겠습니다. 삼촌.’
와찰라는 눈을 감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를 떠올렸다.
‘마음을 편안하게 여기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만물엔 사랑이 있고 만물엔 평화가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차찰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제게 주신 사랑과 [와따따]에 대한 사랑을 기억할 겁니다.’
와찰라의 비늘과 같은 검은 피부가 돌기처럼 서더니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부족장들의 앞에는 다섯 살의 어린 와찰라 대신 차찰라가 서 있었다.
부족장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차찰라다. 차찰라 왕이다.”
옴바쿠는 차찰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와찰라가 차찰라로 변신하다니 사람으로 변신하는 건 가장 어려운 기술인데. 그건 이미 와찰라의 변신 능력이 1급에 도달했다는 걸 증명하는군. 역시 차찰라 형이야. 언제든 와찰라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켰어.
어리다고 얕봤다간 큰일 나겠어.’
차찰라의 낮고 근엄한 음성이 빅토리아 폭포에 울려 퍼졌다.
“[와따따]의 백성들이여. 나의 영혼은 아직 여기에 있다. 나는 떠나지 않고 여러분의 곁에 남아 [와따따]를 지킬 것이다. 와찰라가 나의 뒤를 이어 왕국을 이끌 것이다. 다섯 부족장은 와찰라를 도와 왕국의 평화를 이어나가기 바란다.”
부족장들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와따따 포에버]
[와찰라 왕 만세]
[차찰라 왕이여 영원하소서]
옴바쿠는 부족장들의 반응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부러 차찰라로 변신한 거야. 이제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 와찰라를 보면서 죽은 왕인 차찰라를 떠올리겠지. 다섯 살짜리 왕은 업신여겨질 수 있지만 30년이 넘게 왕국을 통치한 차찰라는 업신여길 수 없으니까.
여러 가지로 영리한 녀석인데.
내가 왕국을 차지하려면 저 녀석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차찰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와찰라로 변했다.
무니가 외쳤다.
“와찰라의 변신 능력이 입증되었다. 이로써 와찰라 왕이 차찰라의 대를 이어 [와따따] 왕국의 다음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빅토리아 계곡에는 부족장들과 백성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따따 포에버]
[와따따 포에버]
***
촬영이 끝난 은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길동이 은우에게 얼음물을 가져다주었다.
“덥지 은우야?”
삼십 도의 날씨에 검은색 수트라니 얼마나 더웠을지.
길동은 은우가 너무 걱정되었다.
“헤헤헤헤. 더어요.”
스탭들이 은우의 곁에 대형 선풍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치만 너무 재미써떠요. 내가 진쨔 영웅이 댄 거 가타요.”
채드윅이 은우에게 말했다.
“잘했어. 은우야. 한 번에 원 테이크로 찍다니. 네가 집중력이 좋아서 잘 나온 거 같아. 감정 표현을 잘 살려서 놀랐어.
차찰라로 변신할 때는 CG를 입힐 거지만 표정이 정말 차찰라 같았어.”
“감샤함니댜. 매일 공룡변신로봇 만화를 본 게 큰 도우미 댄 거 가타요.”
“공룡 변신 로봇?”
“제갸 제일 조아하는 거예요.”
길동이 태블릿을 열어 공룡변신로봇 만화를 보여주었다.
“아, 아기들을 위한 만화로구나. 만화가 그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길동이 말을 이었다.
“은우가 좋아해서 많이 봐요. 아마 은우는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거 같아서 즐거운 걸 수도 있어요.”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떠요.”
채드윅은 은우의 연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기를 즐기는 배우라니 멋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