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아프리카로 가다 (5)
간호사가 길동의 어깨에 퐁퐁이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길동은 얼얼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동의 손에는 땀이 한가득 배어있었다.
‘휴우. 드디어 끝났다.’
길동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있었다.
‘이걸 우리 은우가 어떻게 맞지?’
길동은 은우가 걱정이 되었다.
간호사가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은우, 오세요.”
“은우 엄따.”
“은우, 오세요.”
“은우 엄따.”
백수희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야, 무서워서 그래?”
“갠차나요. 하나도 안 무셔어요.”
은우는 주사가 너무나도 싫었지만 무섭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케미기샤를 만나러 가야 하니 꼭 맞아야 해. 근데 주사는 너무 싫다. 하지만 날 모두 알고 있으니 아프다고 할 수도 없고.’
간호사가 다시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은우 주사 안 맞나요?”
“네.”
은우는 백수희의 손을 잡고 주사실로 향했다.
길동도 주사실에서 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사탕을 주며 말했다.
“주사 잘 맞으면 사탕 줄게. 금방 끝날 거야.”
백수희가 은우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은우야, 금방 끝나.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길동은 차마 은우가 주사 맞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수희 씨 전 밖에 나가 있을게요.”
길동은 주사실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가 주사를 꺼냈다.
은우의 눈에 기다란 주삿바늘이 들어왔다.
“잠까먀뇨. 바느리 왜케 기러요?”
“안 길어요. 보통 이 정도 길이인데.”
간호사가 은우의 팔을 때렸다.
은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름. 어름.”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금방 끝나.”
“그러면 아프댜고 햐면 빼줄 거예요?”
“네에.”
“아라떠요.”
은우는 두려움에 떠는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다.
백수희가 은우의 눈을 가린 채 노래를 불러주었다.
“뚜르뚜르뚜두 뚜르뚜르뚜두 뚜르뚜르뚜두 뚜르뚜르뚜두
나는야 바다의 왕자 플레시오사우르스
지구를 구하러 여기에 왔다.
고래보다 더 큰 나는 바다의 왕자
내가 나타나면 모두들 도망가지.
나는 두려움 따위는 몰라.”
은우가 작은 입으로 노래를 따라불렀다.
“뚜르뚜르뚜두 뚜르뚜르뚜두 뚜르뚜르뚜두 뚜르뚜르뚜두
나능야 바댜의 왕쟈 플레시오샤우르스
지규를 규하러 여기에 와따.”
간호사가 은우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노래를 부르는 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래보댜 더 큰 냐는 바댜의 왕쟈
내갸 냐타나면 모두들 도망갸지.
냐는 두려움 따위는 몰랴.”
간호사가 빠르게 반대쪽 팔에도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백수희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바다의 대장.
저 넓은 바다가 나의 것.
바다에선 누구도 나를 이길 자 없네.”
간호사가 주사를 다 놓고 퐁퐁이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수고했어. 은우야.”
“오? 퐁퐁이네. 이거?”
은우는 자신의 친구 퐁퐁이가 스티커의 주인공이 된 것을 보고 놀랐다.
“퐁퐁이 내 칭균데. 퐁퐁이 노래 모태요. 헤헤헤헤.”
간호사가 은우에게 사탕을 주면서 말했다.
“주사 잘 맞았으니까 주는 사탕. 퐁퐁이가 노래를 못해?”
“넹. 퐁퐁이 차캐요. 퐁퐁이 보고십따. 눈나, 이 스티커 가져도 대요?”
은우는 퐁퐁이 스티커를 가지고 싶었다.
“원래 안 되는 건데 특별히 은우만 줄게.”
간호사가 퐁퐁이 스티커를 은우에게 주었다.
“와아, 고맘뜹니댜.”
은우는 신이 나서 퐁퐁이 스티커를 들고 뛰었다.
길동은 예방접종증서를 챙겨 주사실로 돌아왔다.
“다 끝난 모양이네.”
“네, 횬아. 저 이거 바다떠요.”
은우가 퐁퐁이 스티커를 길동에게 자랑했다.
“퐁퐁이 진짜 유명해졌다. 이제 은우 친구가 아니라 전 국민의 친구인데.”
“횬아, 근데 화장 왜 지웠어요?”
길동은 차마 사람들이 바라봐서 지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은우가 상처받겠지?’
길동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꾸며 내었다.
“아, 그게. 이제 주사 다 맞아서 이제 용감하지 않아도 되니까 지웠어.”
“횬아 아까 주사 무서워쪄? 소리 다 드러떠요. 아아악, 아아악.”
은우가 길동을 흉내 내었다.
길동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서 들어가고 싶었다.
백수희까지 합세했다.
“저도 들었어요. 우리 은우는 하나도 소리 안 지르고 잘 맞았는데 그렇지? 은우야.”
“네네네네네.”
간호사도 말을 보탰다.
“간혹 어른들도 주사를 무서워하시긴 해요. 아주 드물긴 하지만.”
길동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이제 주사도 맞았으니 아프리카에 갈 일만 남았네. 어서 가자. 은우야.”
***
은우의 [블랙 레오파드 2] 출연 확정 기사가 여기저기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 [이은우, 불안 증세 딛고 [블랙 레오파드 2] 출연 확정]
- [채드윅 감독, [블랙 레오파드 2]는 대본 구상 때부터 은우를 주연으로 생각했던 영화. 은우가 출연을 확정지어 줘서 고맙다.]
- [이은우, 채드윅 감독에 대한 깊은 존경 드러내. [블랙 레오파드 1]의 주인공 듀크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
- [이은우, [블랙 레오파드 2]의 출연 배우 중, 유일한 동양인. 동양인이 흑인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인가? [블랙 레오파드 1]의 팬들은 이은우에 대한 우려로 [블랙 레오파드 2]를 보지 않겠다고 밝혀]
- [몇몇 흑인들은 [블랙 레오파드 2]는 흑인을 위한 영화이며 흑인 히어로의 대표인 [블랙 레오파드]의 역할을 흑인이 아닌 동양인이 맡을 수는 없다고 거세게 항의함]
- [[블랙 레오파드]의 팬들이 채드윅 감독과 제작사 [버블]에게 이은우 대신 흑인 배우로 교체해 줄 것을 정식 건의함]
- [[블랙 레오파드] 팬카페에서는 이은우 대신 주인공 역을 맡을 배우를 투표 중이다. 1위는 5살의 흑인 꼬마 모델 [로버트]가 차지했다. 2위는 너투브 스타 [몰리] 양이 차지했다. [몰리] 양은 귀엽고 깜찍한 율동 영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팬들은 동양인이 흑인 역할을 맡을 정도면 여자도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여자든 남자든 무조건 흑인 배우를 기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기사를 읽은 재롱이들은 난리가 났다.
┗ 은우가 [블랙 레오파드 2] 촬영하게 된다고 해서 좋아했었는데 흑인들이 저렇게 은우를 싫어할 줄 생각도 못 했네요.
┗ 그러니까요. 우리 은우가 배역을 맡고 저런 취급을 당하다니 너무 안쓰러워요.
┗ 아직 연기 시작도 안 했는데 왜 그러죠? 은우가 연기를 못 해서 나오는 비판이면 이해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 은우가 아니라 흑인이 아닌 배우가 맡았으면 결과는 다 똑같았을 거예요. 제가 아는 친구도 흑인인데 [블랙 레오파드] 자체가 흑인들한테는 정말 대단한 영화라고. 백인 히어로만 잔뜩 있는 영화판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흑인 히어로물이어서. 정말 흑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다고 하네요.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닌가요? 은우가 출연하고 싶다고 떼를 써서 된 것도 아니고 채드윅 감독이 먼저 출연 제안을 한 거잖아요. 은우는 그걸 받았을 뿐이고. 뭐가 잘못이죠?
┗ 맞아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잖아요. 억울하면 자기가 감독하라고 그러지?
┗ 근데 지금 보니 흑인보다 더 불쌍한 게 동양인 같아요. 어딜 가도 대접 못 받네요. 이젠 흑인이 아니라는 차별까지 받아야 하다니.
┗ 여기서 인종차별 얘기 시작하면 저들과 똑같아져요. 전 은우가 이번에도 역시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 은우 이번에 [세이브 더 월드]를 통해서 아프리카 봉사 간다고 했잖아요. 저렇게 공격하는 사람들은 은우가 아프리카에 어떤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요? 다섯 살짜리는 보통 자기 놀 거밖에 생각 안 하는데. 봉사를 가겠다는 결심이 쉬운가요? 게다가 열악한 아프리카로 간다는데.
┗ 맞아요. 우리 은우. 인성 갑이죠. 전 태어나서 한 번도 아프리카에 가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인도 여행 갔을 때도 더러워서 기절할 뻔했거든요. 거리에서 냄새가 너무 많이 났어요. 전 돈을 받아도 아프리카는 못 갈 거 같아요.
┗ 저 사람들에게 은우가 어떤 아기인지 알려주고 싶네요. 아마 저들은 은우가 어떤 아기인지 찾아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채드윅 감독도 흑인 아기 중에 출연시킬 아기가 있었으면 진작 했겠죠. 없었으니 그랬을 텐데.
┗ 그러니까요. 하지만 전 은우가 듀크보다 더 잘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블랙 레오파드 2] 개봉하면 극장 가서 3번 볼 거예요.
┗ [블랙 레오파드 2] 개봉하면 재롱이들에서 단체 관람가요. 은우 기 살려 주게요.
┗ 참, 그런데 여러분 은우 이번에 봉사 가는데 물품 후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재롱이들] 이름으로 단체 후원하면 좋을 거 같은데. 아프리카에서 필요로 하는 약이나 식량 같은 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거 좋네요. 흑인들도 은우가 흑인들을 위해서 봉사도 하고 후원도 한다는 사실을 알면 여론이 긍정적으로 돌아설 거예요. 회장님 어디 계실까요?
┗ 안녕하세요. 부회장 나세희 소환되었습니다. 최지은 회장님께서는 현재 팀과제가 바쁘셔서 잠시 저에게 역할을 일임하셨어요.
┗ 아, 두 분 다 대학생이시라 바쁘시겠네요. 요새 대학생은 그렇게 과제가 많다던데.
┗ 팀프로젝트에 치이는 삶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노력해도 조원 중에 노는 애가 있으면 노답이에요. 조원 잘 만나는 게 진짜 복이에요.
┗ 우리 팬카페에 대학생분들 많네요. 모두 파이팅입니다.
┗ 후원 공지는 제가 회장님과 회의를 해본 다음 전체공지로 올려두도록 하겠습니다.
***
은우와 백수희, 김길동, 이태석 신부님은 인천공항에서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마리아 수녀님과 어린이집 친구들이 은우와 이태석 신부님의 출국을 배웅하려 공항에 나왔다.
혜린이가 은우에게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약을 선물로 주었다.
“은우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프리카에는 벌레가 많대. 벌레 물리지 말고 건강하게 있다 와.”
“거마어. 혜린이. 눈나.”
지호가 은우에게 강아지 번역기를 선물로 주었다.
“은우야. 아프리카엔 동물이 만태. 코끼리 만나면 이거 해 뱌. 아라찌?”
“거마어. 재미께따.”
은우는 자신이 가진 동물과 말하는 재능에 대해 친구들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그걸 드러내는 일은 너무 위험했으므로 번역기를 고맙게 받기로 했다.
준수가 은우에게 과자가 가득 들어간 쇼핑백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가져가서 머거. 아프리카는 과자가 마시 엄때.”
“거마어. 잘 머글게.”
친구들의 선물로 은우의 손이 가득 찼다.
정우는 울면서 은우에게 매달렸다.
“횬아, 가지마. 횬아, 나 횬아 가는 거 시러.”
김마리아 수녀님이 정우를 달랬다.
“정우야. 100 밤만 자면 은우 형이 올 거야. 그동안 수녀님이랑 다른 형이랑 누나들이랑 재밌게 놀자. 알았지?”
“100 밤?”
정우는 100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큰 건지 몰랐다.
정우는 작은 손가락은 펴면서 수녀님에게 물었다.
“일, 이, 삼, 사. 백?”
“100 밤만 자면 돼. 그리고 전화도 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100 밤이요? 횬아, 꼭 100 밤 자고 오는 거지?”
은우가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하지 먀. 정우야. 횬아가 백 밤만 자고 오께. 기여운 우리 정우.”
정우는 은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기분이 좋은지 웃었다.
“횬아, 100 밤 자고 와.”
“네네네네네.”
현정이가 은우에게 빨대 머리띠를 씌워주면서 말했다.
“은우야, 이걸로 나한테 이야기해. 내갸 다 드를게. 멀리 이떠도 갠챠냐.”
“거마어. 현정아.”
은우는 현정이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얘들아. 너희들이 준 선물은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것들이야. 소중한 너희의 마음을 잘 간직할게.
현정아, 정우야. 내가 없어도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다시 돌아와서 너희를 지켜줄게.’
은우는 아직 상처가 남아있는 듯한 현정이와 어린 정우가 가장 걱정이 되었다.
이태석 신부님이 아기들에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얘들아. 아프리카에 가서도 영상통화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신부님이 시도해 볼게. 너무 슬퍼하지 말고. 씩씩하게 지내자. 알았지?”
은우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출국 심사를 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