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아프리카로 가다 (2)
이선화는 은우의 방에 들어와 들떠 있었다.
“여기가 은우 방이구나. 예뻐라. 여기서 은우가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하는구나.”
“바븐 여기서 안 멍는데. 부어케서 멍는데.”
“멍멍(저 아주머니 뭔가 이상한데. [세이브 더 월드]에서 온 거 맞아? 아프리카에 대한 거 물어봐.)”
창현이 방에 들어와 이선화에게 커피를 주었다.
“멀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은우 같은 슈퍼스타를 만나게 돼서 영광이죠. 처음에 전화가 왔을 땐 모두들 장난 전화인 줄 알았어요. 은우가 우리 재단에 전화를 했으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요.”
“은우가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하곤 했어요.”
“은우가 참 착하죠. 저도 은우 팬이라서 잘 알아요.”
“은우 팬이세요?”
“네, 저도 재롱이들입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맡기셔도 돼요.”
보리는 동물적 감각으로 이선화를 경계했다.
“멍멍(저 아줌마. 아무래도 무서워. 미저리 같아. 스토커 아냐? 관심이 과도한 거 같은데.)”
은우가 마음속에 오래 묻어주었던 말을 터트렸다.
“아프리카에 가고 시퍼요.”
창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은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선화는 방긋방긋 웃으며 은우의 말을 반겼다.
“오늘은 후원 신청만 받으러 왔는데. 아프리카에 가고 싶으면 저희 재단 프로그램 중에 난민들을 위한 봉사 프로그램이 있어요. 광고에 나온 배우 허희라 씨와 아이돌 그룹의 [흑룡 창규]님도 저희 프로그램을 다녀가셨죠. 은우는 스타니까 저희 재단 입장에서도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고. 은우는 선한 이미지를 쌓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은우가 반짝반짝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그럼, 케미기샤도 만날 뚜 이떠요?”
“케미기샤도 난민 캠프에서 지내고 있으니 만날 수 있어. 아프리카도 갈 수 있고. 은우가 간다면 우리 재단 입장에선 큰 영광일 거야.”
“신난댜.”
은우는 마음속의 큰 짐을 던진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프리카에 가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네. 케미기샤를 만나는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외계인에게 보내는 소원이 이루어진 건가?’
창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은우가 요새 활동중단도 하고 상담도 받아야 해서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조금 더 생각하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버님 입장도 이해합니다. 은우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고민되시겠죠. 네, 천천히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은우는 어렵게 잡은 기회가 날아갈까 봐 조바심이 났다.
“아니에요. 아빠. 저 하냐도 안 아파요. 아프리카에 꼭 가야 해요. 아프리카에 꼭 갈 거예요. 꼭 가야만 해요.”
은우는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아프리카에 꼭 갈 거예요.”
이선화는 은우가 안쓰러웠다.
“은우야, 아빠 마음도 이해해 드려야지. 아프리카에 가기엔 은우가 너무 어려서 그래. 더 커서 가도 괜찮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봐.”
은우는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안 돼요. 나 없이 고생한 케미기샤가 너무 불쌍해요. 오 년이란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챙겨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요.
케미기샤는 제 동생이에요. 한시가 급해요. 케미기샤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제가 맛있는 젤리를 먹을 때 케미기샤는 딱딱한 빵조차 먹지 못하고 굶고 있을지도 몰라요.’
은우가 대답했다.
“꼭 가야 해요. 꼭 갈 거예요.”
창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행을 가고 싶은 거면 좋은 나라도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아프리카라니. 거긴 위생도 열악하고 병원도 없을 텐데.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려는지.
하지만 은우가 한 번도 저렇게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운 적이 없었는데.
왜 그런 걸까?’
이선화가 은우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랑 같이 케미기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볼까? 오늘 편지를 쓰면 빠르면 일주일 후에 케미기샤가 받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최대한 빨리 가도록 도와줄게.”
“정말요?”
은우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눈물을 뚝 그쳤다.
“은우가 편지를 쓰면 그걸 번역하는 자원봉사자가 번역을 해. 번역한 편지와 은우가 쓴 편지를 함께 케미기샤가 받게 된단다. 케미기샤가 편지를 쓰면 다시 자원봉사자가 번역을 하고 은우는 케미기샤가 쓴 편지와 번역된 편지 두 개를 받아볼 수 있어.
우린 전 세계에 자원봉사자를 가지고 있거든.”
은우는 이선화의 말에 감동했다.
‘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에 케미기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니. 케미기샤는 전엔 글자를 쓸 줄 몰랐는데 이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자란 걸까?
하긴 화면 속의 케미기샤는 말랐지만, 키도 많이 크고 말투도 많이 변했었어.’
은우가 말했다.
“조아요. 어서 빨리해요.”
은우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보리가 꼬리를 치며 말했다.
“멍멍(근데 그림 편지를 굳이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한글도 잘 못 쓰고 네가 잘 쓰는 건 이탈리아어인데. 그렇다고 여기서 이탈리아어를 쓰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거고. 영어는 내가 잘 쓰지만, 강아지라서 써 줄 수가 없고.)”
은우는 그림카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은우가 가장 먼저 고른 것은 검은색 크레파스였다.
이선화는 은우가 그림 그리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대체 뭘 그리려고 하는 거지? 바깥 선을 그리려고 검은색을 꺼냈나?’
은우가 가장 먼저 그린 것은 꼬불꼬불한 검은색 머리였다.
창현은 은우의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김미자 할머니인가? 꼬불꼬불한 파마머리라. 누굴 그리려는 거지?’
꼬불꼬불한 머리 밑에 그려진 까만색 피부 화려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흑인 여자가 은우의 스케치북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리운 우리 엄마. 엄마 잘 지내고 있어요?
늘 보고 싶어요.’
은우는 엄마의 옆에 아빠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른 몸의 아빠는 은우의 그림 속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흰자와 흰 이빨이 아빠의 착한 마음만큼 빛나고 있었다.
‘아빠, 늘 저를 사랑해주셔서 고마웠어요. 케미기샤를 꼭 지키겠다고 아빠한테 맹세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빠 전 제가 케미기샤보다 먼저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꼭 약속을 지킬 거예요.
전 케미기샤를 지킬 거예요.’
은우는 전생의 파드와를 그렸다.
이상하게도 전생의 자신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케미기샤의 얼굴은 선명한데 내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이번 생의 얼굴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은우는 케미기샤의 얼굴을 먼저 그리기로 했다.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던 케미기샤의 얼굴을 잊을 수는 없으니까.’
은우는 스케치북 위에 케미기샤의 얼굴을 그렸다.
동그랗고 큰 코, 두꺼운 입술, 짙은 눈썹과 큰 쌍꺼풀.
스케치북 위에 케미기샤가 살아났다.
은우는 자신이 그린 케미기샤를 어루만졌다.
‘조금만 기다려. 케미기샤야. 내가 갈게.’
은우는 다 그린 케미기샤의 얼굴 옆에 파드와의 얼굴을 그렸다.
‘다 그린 다음에 재능을 걸 거니까 일단 그리도록 하자.’
은우는 파드와의 얼굴을 완성했다.
파드와의 얼굴은 눈, 코, 입이 비어 있었다.
그림을 완성한 뒤 은우는 재능창을 열었다.
[올림포스의 천마 페가수스의 시인의 상상력 레벨 2.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시각, 청각, 촉각, 후각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은우가 이선화에게 물었다.
“봉투에 너어요?”
“커다란 봉투가 필요하겠구나. 어차피 주소도 써야 하니까 내가 가져가서 보내줄게. 근데 그림 편지라서 번역은 필요 없겠는걸.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해볼게.”
“교맘뜹니댜.”
은우가 온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
강라온은 채드윅의 전화를 끊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블랙 레오파드 2]라니? [위대한 목소리]도 좋은 영화였지만 그래도 마벨의 파급력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텐데.’
강라온은 레이니의 일이 떠올랐다.
국내 가수로서 입지를 다진 레이니가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뜨자 그의 앨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었다.
할리우드에서의 몸값 역시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해 레이니는 월드 투어를 계획했다.
‘그 당시에 월드 투어를 할 수 있는 가수는 국내엔 레이니가 유일했었지. 그리고 그건 가수로서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배우로서의 영향력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강라온은 은우에 대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이 기쁘면서도 은우를 [블랙 레오파드 2]에 출연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은우 팬들은 거의 결사대 수준이어서 잘못 건드렸다간 우리 회사도 날릴 것 같은 분위기고. 사실 내 다섯 살 때를 돌아봐도 그때 누군가 나에게 가수가 되라고 했다면 내가 가수를 했을지 모르겠어.’
강라온은 은우를 만난 이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다섯 살의 강라온은 하루 종일 친구와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유난히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잠바를 잘 입지 않으려고 했다고 엄마가 그랬었는데. 집에 오라고 찾으러 가기 전엔 집에도 안 들어오고.
넉살이 좋아서 옆집에서도 밥을 잘 얻어먹고 처음 보는 친구랑도 친해져서 잘 놀러 다녔다고 엄마가 그랬어.’
강라온은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다섯 살의 자신의 지금의 자신과 매우 다른 것이 틀림없었다.
‘워커홀릭인 나에게도 코찔찔이 시절이 있었다니.’
강라온은 서랍 안에서 액자에 담긴 다섯 살 꼬마 아이의 사진을 꺼냈다.
꼬마 아이는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멜빵을 단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릎에는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채로 밝게 웃고 있었다.
‘안녕. 다섯 살의 강라온. 라온아. 너라면 [블랙 레오파드 2]에 출연하고 싶어? 내가 은우를 [블랙 레오파드 2]에 출연시키고 싶어 하는 건 내 욕심일까?’
사진 속의 아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밝게 웃고 있었다.
강라온은 액자를 서랍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그래, 다섯 살 아기는 다섯 살 아기로 행복한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
이선화가 떠나고 나서 은우는 보리와 대화 중이었다.
“멍멍(생각보다 일이 금방 풀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일단 편지도 썼고 말이야. 네가 봉사 프로그램에 참가한다면 어렵지 않게 케미기샤를 만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치만 아빠갸 너무 거쩡하능 거 가타서 그게 좀 고미니야.”
“멍멍(내가 아빠라도 걱정될 거 같긴 해. 난 널 만나기 전까지 아프리카란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아프리카는 더운 나라, 지구의 절반 이상의 인구가 모여있는 곳, 가난한 나라,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런 생각이 다였던 거 같아. 거기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아프리카에 살 땐 냐도 미국이냐 한국 가튼 다른 나라에 대해 몰라떠.”
“멍멍(내가 검색해 봤는데 아프리카는 비행기로 18시간에서 20시간 정도 걸린대. 네가 갔던 이탈리아나 미국보다도 훨씬 멀어. 비자 받는 것도 복잡한가 봐. 그래도 아까 [세이브 더 월드] 직원분이 다녀가셨으니 비행기 표를 구하거나 비자를 받는 건 해결되겠지만 말이야.”
“조은 부늘 만나서 다행이야. 근데 아빠는 어떠케 하지?”
창현은 아까 은우의 말을 듣고 생각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아프리카라니. 그 먼 곳에 은우가 갈 수 있을까? 만약 은우가 간다면 내가 모든 걸 접고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
혼자 보내긴 걱정돼. 그런데 은우는 왜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걸까?
그 멀고 척박한 곳에.’
창현은 전에 이태석 신부가 아프리카에 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이 났다.
‘신부님께 여쭤봐야겠어.’
창현은 이태석 신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부님. 저, 은우 아빠예요.”
“창현씨. 기사 봤어요. 은우 어린이집에선 늘 잘 지내서 몰랐는데. 걱정이 많겠어요.”
“신부님. 은우가 갑자기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해서요. 은우가 한 번도 저렇게 고집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완강할 정도예요. 지난번에 울음이 터진 것도 아프리카 난민 광고를 보고 그랬거든요. 은우가 불쌍한 사람들을 못 보는 성격이긴 한데 다섯 살짜리가 아프리카에 가겠다고 하니 너무 걱정돼요.
아프리카는 대체 어떤 곳이에요? 은우가 갈 수 있을까요?”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봉사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프리카는 돈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곳이죠. 종교와 정치가 얽혀서 전쟁이 멈추질 않아요. 그 속에서 가장 불쌍한 건 아기들이고요.
어쩌면 신이 가장 필요한 곳이 그곳일지도 모르죠.’
이태석 신부가 말했다.
“창현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전 오히려 권하고 싶네요. 마음이 힘들거나 그럴 때 정말 힘든 사람들을 보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늘 먹을 식사를 걱정해요. 절대적 빈곤 앞에 다다르면 우리가 겪고 있는 상대적 빈곤은 별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죠. 어쩌면 그곳에 가면 은우의 불안 증세가 사라질 수도 있어요.
내가 그랬으니까.”
창현은 이태석 신부의 의외에 대답에 놀랐다.
‘막아주시리라 생각해서 위로받고 싶어서 드린 전화였는데. 아프리카에 가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