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음악 방송 1위를 항하여 (2)
길동이 은우의 선물을 들고 낑낑거리며 은우의 방으로 들어왔다.
보리가 선물을 보고 놀랐다.
“멍멍(은우 좋겠다. 선물 되게 많이 받았네.)”
은우는 길동이 있어 보리에게 말할 수 없어서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선물 정리하려면 힘들 텐데. 도와줄까?”
“갠챠냐요. 횬아.”
길동이 방에서 나가자 은우가 보리에게 말했다.
“팬사인회 해떠니 바다떠. 팬사인회는 정먈 조아.”
“멍멍(나도 팬사인회 하고 싶다. 장난감 또 받았네. 저건 스미스 기차야?).”
“응, 가꼬 십던 거랴서 신냐. 근데 보이야. 아이돌 댕댕이 대회에 나걀래? 나보고 나오라고 해때. 길동이 횬아가. 가치 갈래?”
“멍멍(댕댕이 대회가 뭐야?)”
“강아지랑 주이니랑 갸치 달리기하고 게임 하는 거래. 상품도 이때.”
“멍멍(오호! 그래. 나가자. 나도 선물 받고 싶어.)”
“그래, 조아. 나가서 재미께 놀쟈.”
은우는 스미스 기차의 레일을 맞추었다.
보리가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멍멍(나도 타고 싶다.)”
“보이는 무거어서 앙대.”
은우가 장난감 상자에서 공룡 변신 로봇을 가져왔다.
레일 위에 기차를 놓고 공룡 변신 로봇을 태웠다.
“출동.”
은우가 기차의 출발 버튼을 누르자 기차 위에 앉아 있던 공룡 변신 로봇이 떨어졌다.
로봇은 바닥에 누워있고 스미스 기차 혼자 빠르게 달렸다.
“왜 안 대지?”
은우가 공룡 변신 로봇을 주우며 말했다.
“멍멍.(공룡 변신 로봇 말고 더 작고 가벼운 걸로 해야지. 기차보다 로봇이 크잖아. 무게 중심이 안 맞아서 그래.)”
은우가 장난감 통에서 작은 토끼 인형을 찾아왔다.
은우가 토끼 인형을 기차 위에 앉히고 출발 버튼을 눌렀다.
기차가 토끼를 채운 채 달렸다.
은우가 토끼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높은 소리로 말했다.
“거마어. 토마스야. 나를 태어져서.”
은우가 토마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언제든 부탁만 해. 달리는 거라면 자신이꺼든. 하하하하하.”
***
이태석 신부님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엘리샤벳 수녀예요.”
태석은 기억 속에서 엘리샤벳 수녀를 소환했다. 엘리샤벳 수녀는 10년 전 함께 아프리카로 봉사를 떠났을 때 만났던 수녀였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수원교구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신부님, 혹시 신부님 계시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한 명만 더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어린이집은 원칙적으로 미혼모의 자녀들만 받고 있어서요. 아이가 어떤 상황인가요?”
전화기 너머로 고민하는 것 같은 엘리샤벳 수녀의 음성이 들렸다.
“신부님, 사실 제가 신부님께 드리는 전화가 이 아이의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어요. 미혼모의 아기는 아니지만 지금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어요. 제발 이 아기를 받아주세요.”
이태석 신부는 직감적으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아기 아빠가 재혼을 했는데 새엄마가 아기를 학대하는 거 같아요. 어린이집 선생님이랑 소아과 선생님이 신고를 했는데도 경찰이 개입을 망설이고 있어요. 새엄마는 계속 학대한 일이 없다고 하고 있어요.
작년까지 친엄마와 살 땐 저희 교구에 미사도 보러 왔거든요. 그때랑 지금이랑 너무 달라져서. 소아과 선생님이 저희 교구 신자시라 부탁을 하셨는데 저희 교구엔 아기를 돌보는 시설이 없어서요.”
이태석 신부는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아기들은 사랑만으로 가득 찬 존재인데 왜 이렇게 힘든 아기들이 많지?
왜 자신의 아기를 지키려 하지 않는 부모들이 많지?
하지만 우리 어린이집은 종일반이 없어. 만약 학대 아동이 우리 어린이집으로 온다면 그 아기는 갈 곳이 없으니 김마리아 수녀님이 하루 종일 아기를 돌봐야 해.
이게 내 결정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
미혼모라도 부모가 있는 경우와 부모로부터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는 다른데.’
이태석 신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녀님, 김마리아 수녀님과 상의해 본 뒤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전화기 너머로 실망한 듯한 엘리샤벳 수녀의 음성이 들렸다.
“너무 어려운 부탁이었죠? 신부님. 네 알겠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어린이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텃밭을 지나가는데 텃밭 가득 자란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강낭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싱싱한 생명력에 이끌려 신부님은 텃밭에 쭈그리고 앉았다.
‘잎이 어쩜 이렇게 싱싱하지? 수녀님이 아기들 돌보느라 비료를 열심히 주시지도 못했을 텐데. 토마토도 알이 너무 굵잖아. 김마리아 수녀님이 나 모르게 농사도 공부하셨나?’
신부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노랑이가 신부님의 다리에 얼굴을 부볐다.
“야옹.”
“노랑아, 혹시 네가 그런 거니? 고양이가 있으면 농작물이 더 잘 자라나.”
“야옹.”
신부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김마리아 수녀님과 까망이가 이태석 신부와 노랑이를 맞이했다.
“신부님, 청귤차 맛있는데 청귤차 타 드릴까요?”
이태석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마리아 수녀가 청귤차 두 잔을 타 왔다.
노랑이가 이태석 신부의 무릎 위에 앉아 골골송을 불렀다.
“수녀님. 혹시 어린이집에서 아기를 한 명 더 맡을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정우가 들어와서 더 이상은 힘들긴 하죠.”
김마리아 수녀님은 이태석 신부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신 거 같아. 어린이집 사정이야 굳이 묻지 않아도 신부님도 알고 계실 텐데.’
김마리아 수녀가 이태석 신부에게 답했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이 있으시다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죠. 어떤 아기인가요? 오고 싶어 하는 아기가 있어요?”
“엘리샤벳 수녀님께 전화가 왔어요. 새엄마로부터 학대에 시달리는 아기가 있는데 갈 곳이 없어서 경찰이 신고를 망설이고 있나 봐요. 받아줄 수 있냐고. 그러시는데.
아기야 딱하지만, 그 아기가 오게 되면 김마리아 수녀님이 하루 종일 일을 하시게 되는 셈이니 쉽게 오라고 할 수가 없더라구요.
노랑이, 까망이에 정우도 새로 와서 정신없으시잖아요.”
이태석 신부는 얼마 전부터 김마리아 수녀가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다.
‘김마리아 수녀님도 이제 50이 다 되셨으니 건강이 예전 같으실 순 없겠지.’
김마리아 수녀님이 청귤차의 잔을 손으로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우리밖에 없겠죠? 그 아기에게 온기를 전해줄 사람이요.”
“엘리샤벳 수녀님이 우리가 그 아기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을 하긴 했어요.”
이태석 신부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을 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기에겐 희망. 우리에겐 책임.
우리는 사는 동안 얼만큼의 책임을 늘리며 살 수 있을까.
내 등에 얹힌 책임을 탓하고 싶진 않지만, 수녀님의 등에 짐을 더 얹혀주는 건 미안하네요.’
김마리아 수녀가 청귤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
“귤 향이 참 좋네요. 텃밭을 가꾸면서 알게 됐는데 자연은 참 신비롭더라구요. 신부님.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쑥쑥 자라나고.
아기들도 그렇겠죠? 그 아기 제가 돌볼게요.”
이태석 신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은우가 힘차게 어린이집의 문을 열었다.
“수녀님. 은우 와떠요. 노랑아, 까망아.”
“야옹”.
까망이가 은우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울었다.
“횬아.”
먼저 도착한 정우가 은우에게 인사했다.
“우리 정우.”
은우가 정우를 번쩍 안았다가 내려주었다.
‘이상하다. 늘 수녀님이 내 인사를 받아주셨는데 어디 가셨지?’
은우는 수녀님을 찾으러 거실로 갔다.
“수녀님.”
수녀님은 처음 보는 여자 아기를 안고 있었다.
여자 아기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녀님. 새로운 칭구예요?”
“응, 은우야. 현정이란다. 오늘부터 우리 어린이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어.”
“현정아, 냐는 은우야. 만냐서 반갸어.”
은우가 가방에서 마카롱을 꺼내 현정이에게 주었다.
“이거 마디떠. 머거.”
현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은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은우가 마카롱을 들고 물었다.
“보라새기 맘에 안 드러서 그래? 여기 핑크색또 이꼬 하늘색또 이떠. 다른 색 줄꺄?”
현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녀님. 칭규 왜 암말도 안 해요?”
“피곤해서 그래. 여기 두고 가면 현정이가 먹을 거야. 현정아, 은우야 고마워라고 해보자.”
현정이는 아무 말도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수녀님이 현정이의 손을 잡고 은우를 향해 흔들어주었다.
‘이상하다. 어디 몸이 많이 아픈가. 왜 그러지?’
정우가 은우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횬아, 횬아. 저기 가서 가치 놀쟈. 소방관 노리하고. 내갸 소방관 하께.”
“응.”
은우는 정우의 손을 잡고 놀이방으로 갔다.
정우는 장난감들을 나란히 줄을 세워놓았다.
경찰차, 응급차,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불자동차.
은우가 외쳤다.
“부리 나떠요. 소방간님 구해주떼요. 부리 나떠요.”
은우의 외침을 듣고 정우 소방관이 출동했다.
“출동. 간다. 걱정하지 마떼요. 여러분.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은우가 효과음을 넣었다.
“삐용. 삐용. 삐용. 삐용.”
정우가 손에 불자동차를 들고 방 안을 뛰어다녔다.
다른 방에서 놀고 있던 연아가 분무기를 들고 와서 물을 뿜었다.
“불, 어디 불 나떠? 불?”
정우가 분무기의 물을 피하며 외쳤다.
“뷰른 저에게 맡겨 주떼요. 정우 소방관이 이뜸니댜.”
정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우가 박수를 쳤다.
“뷰리 꺼져떠요. 정우 소방관 머쪄요. 우와.”
정우가 신이 난 표정으로 다리를 쫘악 벌리고 로봇 변신 자세를 취했다.
“부리 나면 불러 주떼요. 꼭.”
옆에서 보던 연아가 말했다.
“우리 콩콩이 타러 가자. 콩콩이.”
아기들은 다 함께 마당으로 콩콩이를 타러 나갔다.
은우는 거실을 지나가면서 혼자 있는 현정이를 보았다.
‘수녀님이 어디 가셨나?’
은우는 현정이에게 다가갔다.
“현정아 가치 갈래?”
현정이는 말이 없었다.
은우가 현정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가치 가자. 혼쟈 이뜨면 심심하쟈나.”
현정이는 은우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선 연아가 스카이 콩콩을 타고 신나게 뛰고 있었다.
스프링이 달린 스카이 콩콩은 하늘 위로 높이 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우도 스카이 콩콩을 타고 뛰고 있었다.
“현정이도 해볼래? 현정이는 머 조아해.”
현정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냐는 아무 거또 안 조아해.”
은우는 현정이가 처음으로 말한 것이 반가웠다.
“왜 안 조아해?”
“내갸 조아하는 건 다 빼서가서 안 조아해.”
은우는 현정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빼서갸.”
은우는 현정이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왜 이렇게 부정적이지?’
은우가 현정이에게 말했다.
“현정아. 내갸 장난걈 빌려주까?”
“장냔감 안 조아해.”
“그럼 나 스카이 콩콩 타러 갈게.”
은우는 친구들과 함께 스카이 콩콩을 탔다.
은우가 발을 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
“헤헤헤헤헤헤.”
은우는 하늘을 보며 밝게 웃었다.
“횬아, 횬아. 나 뱌랴.”
옆에서 뛰던 정우가 은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린 우쥬서니댜.”
“우쥬까지 날라가 보쟈.”
현정은 노는 아기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누군가 날 또 때릴지도 몰라. 난 아무것도 가지면 안 돼. 많이 먹어서도 안 되고.’
김마리아 수녀님은 현정을 찾고 있었다.
‘어디 갔을까? 현정이가? 그 사이에?’
김마리아 수녀님은 두리번거리다가 마당에서 아기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기들은 모두 스카이 콩콩을 타면서 웃고 있었다.
‘현정이만 또 혼자네. 현정이는 언제쯤 마음을 열까.’
김마리아 수녀님은 현정이의 팔목과 종아리에 있는 상처를 보았다.
‘지속적인 학대의 흔적이 틀림없어. 우선 천천히 환경부터 바꿔줘야지.’
김마리아 수녀님은 주변 교구에 연락을 해서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옷과 가방, 장난감 등을 모으는 중이었다.
‘은우가 온 뒤로 은우 아빠랑 은우가 도와주는 금액 덕분에 전보다 재정상태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현정이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니까 최대한 아껴서 지내봐야지.
아무래도 텃밭에 농사를 좀 더 대대적으로 지어봐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