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라이키 광고 (2)
다음 촬영 장면은 축구였다.
장준호 PD가 은우에게 간단한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은우야. 공을 차서 저쪽 골대 있지? 저기로 넣으면 골인이야. 골대가 두 개인데. 저기 오른편으로 넣어야 해. 알았지?”
“네네네네네.”
은우는 작게 축소된 축구공을 들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농구랑 다르게 축구는 손을 쓰면 안 돼. 발로만 차는 거야.”
“네네네네네.”
은우는 공을 든 채 밝게 웃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은우는 공을 살짝 찼다.
공이 오른쪽 골대를 향해 천천히 굴러갔다.
‘생각보다 쉽네.’
자신감이 붙은 은우는 공을 세게 찼다. 그러자 공이 생각보다 빨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은우는 공을 따라잡기 위해 빨리 뛰었다. 공을 따라잡은 순간 은우는 발로 공을 뻥 찼다.
공이 더 빨리 굴러갔다. 양갈래로 묶은 은우의 머리가 팔랑거렸고 은우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은우는 신이 나서 공을 차면서 웃었다.
“헤헤헤헤헤헤.”
순간, 너무 빨라진 속도에 적응을 하지 못한 은우의 두 발이 뒤엉키고 말았다. 은우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손바닥과 배, 무릎이 정면으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은우는 넘어져서 생각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너무 창피하다. 내가 전생에도 참 운동을 안 하긴 했지. 다섯 살의 몸은 여러 가지로 주의가 필요한데. 너무 내 기분만 생각했나 봐. 신이 나서 뛰다가 그만.’
은우는 무릎에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은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맙소사 피잖아.’
피를 본 은우는 파리넬리이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희미한 기억 속 12살의 파리넬리는 욕조 속에 앉아 있다.
‘말에서 떨어진 것만 기억이 나는데 여긴 어디지? 나는 왜 욕조 속에 누워있지?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파리넬리가 눈을 뜨자, 형인 리카르도가 파리넬리를 안심시켰다.
“파리넬리,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이걸 먹어봐. 기분 좋아지는 쿠키야. 잠시만 잠들면 모든 게 끝나.”
파리넬리는 리카르도가 주는 쿠키를 받아먹었다.
‘이상해. 잠이 든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저기 유니콘이 보인다. 유니콘을 타야겠어.’
파리넬리는 유니콘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리카르도는 파리넬리를 거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카르도가 파리넬리에게 준 것은 진통제를 대신해 파리넬리의 고통을 잠재워 주기 위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쿠키였다.
‘파리넬리 넌 누구보다 멋진 가수가 될 수 있어. 순간의 고통만 참으면 돼. 우린 유명한 가수와 작곡가가 될 수 있을 거야.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질 거라고.’
리카르도는 파리넬리가 앉아 있는 욕조로 칼을 든 채 다가갔다.
유니콘을 타고 환상 속을 걷고 잇던 파리넬리는 구름 속에서 다가오는 리카르도를 보았다.
파리넬리는 웃으면서 리카르도에게 말했다.
“형, 같이 타자. 하늘을 나는 거 매우 신나.”
마약에 취한 파리넬리는 리카르도의 손에 들린 칼은 미처 보지 못했다.
리카르도는 욕조 속에 칼을 집어넣어 파리넬리에게 거세를 행했다.
유니콘이 갑자기 휘이잉 울음소리를 내더니 파리넬리를 던져 버렸다.
파리넬리는 하늘에서부터 땅까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 쿵
발끝까지 전해오는 통증에 파리넬리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거세의 충격 때문에 파리넬리는 평생을 피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았다.
현생에서 다시 피를 보자 은우는 울고 싶어졌다.
은우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에서는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으으으으아앙.”
은우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작은 입술이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장준호 PD는 은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왔네. 촬영하다가 울다니. 근데 울려는 모습 너무 귀엽다. 터질 것 같은 볼이 움직이는 모습도 그렇고, 저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려는 모습도 그렇고. 정말 귀엽다. 아빠들이 왜 아기를 울리고 싶어 하는지 알 것만 같아.’
길동은 은우가 넘어지자 속이 타들어 갔다.
‘은우 무릎에서 피가 나다니. 우리 은우. 한 번도 피난 적 없었는데. 속상해라. 흉지는 거 아니겠지? 이쁜 무릎에 흉지면 안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밴드랑 구급 약품 챙겨다니는 건데. 근데 PD님은 왜 컷을 외치지 않지? 우리 은우 아픈데. 컷을 외치면 바로 달려가고 싶은데.’
장준호 PD는 은우의 표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걸 하나의 드라마로 연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일단 표정만으로도 너무 귀여우니까 계속 찍어야 할 것 같아. 우는 모습마저 귀엽다니 정말 부럽다. 은우야. 내가 울면 사람들이 아저씨가 운다고 막 뭐라고 할 텐데. 넌 우는 모습마저 감동을 주는구나.’
카메라 감독은 은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은우야 울면 안 돼. 넘어질 수도 있지. 괜찮아. 넘어지면서 크는 거야. 은우 파이팅. 은우야 할 수 있어. 힘내. 은우야. 외쳐 주고 싶은데 말을 할 수가 없네. 녹음이 돼서.’
은우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그때 은우의 시선이 카메라 감독과 마주쳤다.
카메라 감독은 은우를 향해 주먹 든 손을 올리며 입으로 파이팅이라는 구호를 외쳐 주었다. 옆에 있던 다른 스태프들도 은우를 향해 주먹 든 손을 들어 올리며 입모양으로 응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 주고 있어. 난 혼자가 아니야.’
은우는 주먹 쥔 오른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밝게 웃었다.
“헤헤헤헤헤헤.”
은우가 웃자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길동은 은우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그렇지. 우리 은우는 강한 아기라고. 그렇게 쉽게 울지 않아. 다섯 살짜리가 넘어지는 건 정말 흔한 일이지만. 우리 은우는 넘어져도 울지 않아.’
카메라 감독은 자신의 응원을 은우가 알아준 것만 같아 흐뭇했다.
‘은우야 넌 우는 모습마저도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난 네가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다.’
장준호 PD는 은우를 보며 계속해서 광고를 떠올리고 있었다.
‘위기를 극복하는 아기라. 귀여움 이상인데. 은우가 씩씩하게 울음을 그치다니 너무 감동적이야. 오늘 광고는 너무나 잘 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
은우가 다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이번엔 넘어지지 말아야지.’
카메라 감독은 달리는 은우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우리 은우. 이번엔 넘어지지 말고 골대까지 가져가자. 그런데 방향이 이상하잖아. 잠깐만 은우야. 그 방향이 아니야. 아까 넘어지는 바람에 반대로 일어났구나. 멈출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은우는 방긋방긋 웃으며 공을 차며 달려서 왼쪽 골대에 공을 넣었다.
“고린. 고린. 고린.”
은우는 엉덩이를 쭈욱 내밀고 자신의 이름인 [이은우]를 자랑스럽게 공중에 썼다.
장준호 PD는 은우를 바라보며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특하다. 우리 은우. 시련도 있었지만 결국 해냈네. 장하다. 잠깐만 그런데 공 방향이 잘못됐어. 저 골대가 아니잖아. 저거 자살골인데? 맙소사.’
자살골이라면 정식 경기였다면 골을 넣어서 오히려 진 상황.
장준호 PD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편집으로 충분히 잘라서 오른쪽 골대에 공을 넣은 걸로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자살골을 넣고도 행복해하는 은우의 모습이 더 감동을 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어른들의 경기라면 자살골을 넣으면 비난받겠지만 은우는 아니잖아.
넘어져서 방향을 헷갈린 게 당연할 걸 수도 있지.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은 선수들도 사실은 실수였을 텐데 말이야. 물론 아무도 그런 선수의 입장을 생각해 보려고 하진 않지만 말이야.’
장준호 PD는 어쩌면 은우의 자살골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더 큰 감동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우는 정말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나에게 보여주는구나. 광고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기가 정말 힘든데. 오랫동안 광고를 찍은 감독들도 하나같이 참신한 광고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니까.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오늘 은우를 만나서 처음 짰던 광고 콘티랑은 다른 그림이 나오게 됐지만, 덕분에 창의적인 광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장준호 PD는 오늘 은우와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값진 경험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준호 PD가 외쳤다.
“야구장 촬영 들어가기 전에 은우 상처 치료 좀 하고 갈게요.”
길동이 빠르게 달려왔다.
“은우야. 많이 아팠지? 속상해라. 무릎에서 피가 다 나고.”
“횬아 개차나요. 헤헤헤헤.”
“괜찮긴 이렇게 피가 나는데.”
길동은 걱정되는 마음에 은우를 꼬옥 안았다.
“횬아. 숨 마켜요.”
“미안해. 힘만 세서는. 우리 은우 지켜주지도 못하고.”
은우가 길동의 목을 두 팔로 꼬옥 껴안았다.
“횬아, 사량해요.”
밴드와 연고를 가져다주려고 온 스텝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눈물겹네요. 너무 감동적이라서 혼자 보니 아깝네.”
길동은 스탭에게서 받은 상처용 연고를 은우의 무릎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밴드에는 공룡 변신 로봇이 그려져 있었다.
은우가 방긋 웃었다.
“우와. 공룡 변신 로봇이다. 무르페 공룡 변신 로보시 인네.”
“으이구. 아픈데도 좋아? 공룡 변신 로봇만 있으면?”
“용감한 공룡이 될 거예요. 짜짠. 변신.”
“그래, 공룡 변신 로봇. 지구를 구하세요.”
“출동.”
은우가 무릎에 밴드 두 개를 붙이고 다음 촬영장으로 향했다.
다음 촬영장은 미니 야구장이었다.
장준호 PD가 야구의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은우야. 저기 공 던지는 아저씨가 공을 던져줄 거야. 네가 이 방망이를 쥐고 있다가 공을 맞히면 돼. 그럼 공이 저쪽으로 날아갈 거야. 공이 날아가면 여기 작은 원들을 밟으면서 달리면 되는 거야.”
“공이 방망이에 마즈면 고리니에요?”
“그래, 골인이야. 야구 용어로는 홈런이라고 하지만 말이야.”
“아, 홈런. 홈런.”
은우는 처음 들은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되뇌었다.
장준호 PD가 투수역을 맡은 엑스트라에게 말했다.
“가장 느리게 던져줘요. 맞추기 쉬운 볼로요.”
투수역을 맡은 엑스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방망이를 쥔 채 웃고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졌고 은우의 방망이는 공을 맞히지 못했다.
“잘 안 대네. 헤헤헤헤.”
은우가 멋쩍은 듯 방망이를 쥐고 웃었다.
투수는 공을 던지기 전 고민했다.
‘은우는 한 번도 야구를 해 본 적이 없는 아기 같아. 최대한 쉽게 던져줘야 하는데 내가 은우 방망이에 맞춰서 던진다고 생각하고 던져야겠다.’
투수가 공을 던졌다. 은우를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방망이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은우가 멋쩍은 듯 웃었다.
“헤헤헤헤헤. 방망이갸 나랴 가쩌요.”
스탭이 방망이를 주워서 은우에게 주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차례가 되었다.
‘은우가 가만히 있으면 내가 던지는 게 차라리 쉬울지도 모르는데 은우 움직임은 생각보다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아까 보니 방망이를 상당히 위로 휘두르던데 거기에 맞춰서 던져봐야겠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은우가 살짝 휘두른 방망이가 공에 맞았다. 공은 2루수 쪽으로 조금 날아가다가 떨어졌다.
은우는 공이 날아가자 신나서 외쳤다.
“고린. 고린. 고린.”
은우는 신이 나서 뒤돌아서서 허공에 엉덩이로 자신의 이름 [이은우]를 크게 썼다.
장준호 PD는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알려준 말은 전부 잊어버렸구나. 야구는 골인이 아니라 홈런인데. 그리고 은우야 공이 맞으면 1루수, 2루수, 3루수 이런 식으로 그 작은 원들을 돌아야 점수가 인정되는 거라니까. 야구에서도 은우는 0점이구나. 하지만 공이 맞았을 때 은우 표정은 10점 만점에 10점이었어. 저렇게 행복해하다니. 메이저리그에서 우승을 해도 저런 표정은 안 나왔을 거야.
0점이지만 가장 행복한 야구 선수. 이거 문구로 괜찮은데.’
엉덩이로 이름 쓰기가 끝난 은우는 기분이 좋은지 엉덩이를 뒤로 쭈욱 내밀고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고린 고린 고린. 신나는 그 이름. 고린.
고린 고린 고린. 지구를 구하쟈.”
스텝들은 은우의 귀여운 세레머니에 빠져 그 모습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준호 PD는 생각했다.
‘촬영하면서 이렇게 스텝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늘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말이야.
은우는 참 대단하다. 모두를 웃게 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방망이를 던진 야구 선수. 자살골은 넣은 축구 선수. 걸어서 까치발을 들고 덩크슛을 한 농구 선수. 모두 너무 귀여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