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소풍은 즐거워 (1)
백인수도 은우의 진주 논개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넘어져서 울 것 같은 지유를 보며 백인수도 함께 걱정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무대에 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 우리 은우도 대단하지만, 뽀뽀 댄스팀도 대단해. 어서 일어나야 할 텐데. 시간이 지나면 더 일어나기가 힘들 텐데 말이야.’
백인수는 마음속에서 지유를 응원했다.
‘어서 일어나. 아가야. 넘어질 수 있지. 지금 무대에서 넘어진 건 별거 아니란다. 지금은 큰일 같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그것보다 더 큰 일들이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렴.’
백인수는 자신의 인생에서 좌절을 경험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미술을 포기해야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어쩌면 그게 내 인생에서 새로운 재능을 열어준 것일지도 모르니. 나는 애초에 옷 만드는 일에 더 재능이 있었는지도 몰라.’
물론 백인수 역시 은우를 만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상 속에서 넘어져 있는 지유를 발견한 은우가 지유에게 궁정식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울고 있던 지유가 은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은우는 참 많은 사람을 일으켜 줬지. 나도 그렇고 수희도 그렇고.’
백인수는 백수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가 은우를 만나고 나서 잠이 잘 오기 시작했다는 것, 출연을 망설이던 ‘내일도 사랑해’를 찍으면서 은우가 정말 자신의 아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덕분에 연기 변신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은우는 상대방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묘한 재주가 있지.’
백인수는 영상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보았던 벽화 때는 은우가 카를로스인 게 알려질까 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하던지. 은우가 좋은 일을 해 준 것은 참 자랑스러웠지만.’
백인수는 뉴스에서 보았던 이경선 할머니와 최순옥 할머니의 사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나이에 남는 건 추억밖에 없지 뭐. 값비싼 옷이 필요하겠어? 넓은 집이 필요하겠어? 좋은 차가 필요하겠어? 살날 얼마 안 남은 우리에게 보고 싶은 사람을 그려주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이경선 할머니와 최순옥 할머니의 밝아진 표정 속에서 백인수는 은우의 마음 됨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은우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마음이 참 예뻐. 그 마음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
백인수는 오랜만에 은우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은우는 데메테르의 재능을 안고 텃밭으로 갔다.
텃밭에는 아기들이 지난번에 심어놓은 강낭콩과 수녀님이 심어놓은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빨리 가서 데메테르의 재능을 시험해 봐야지.’
은우는 텃밭에 도착해서 작물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심은 강낭콩은 아직 싹이 나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수녀님이 심어놓은 상추랑 고추는 시들시들해. 방울토마토도 지난주에 본 것과 똑같아. 자라지 않은 것 같아.’
은우는 텃밭의 작물들이 걱정됐다.
먼저 도착해 있던 준수가 흙을 파고 있었다.
“준슈야 머해?”
“쉬잇.”
준수가 은우에게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입 앞에 손가락을 댔다.
준수는 연아의 [콩나무]를 파 보는 중이었다.
“앙대. 그건 연아 거야.”
“보기만 하께. 보기만.”
준수가 흙을 파니 연아의 [콩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썩어 있었다.
“연아 거도 주거네. 내 [미니 콩]도 주거는데.”
“은우 거또 파 보까?”
“[콩콩이]는 아직 졸리대. 더 자야 해.”
“[콩콩이] 궁금해.”
“콩드리 더 자야 하는데 일찍 깨어서 다 주근 거야.”
“그런가.”
준수는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그때 연아가 텃밭으로 왔다.
“헉, 여나다.”
준수는 깜짝 놀라 연아의 [콩나무]를 재빨리 흙으로 덮었다.
연아의 손에는 분무기가 들러져 있었다.
연아는 분무기를 뿜으며 말했다.
“쑥쑥 자라랴. 하늘까지 자라랴. 우리 콩나무. 나에게 금도끼 은도끼 가져다 져어. 우리 콩나무.”
분무기를 들고 온 혜린이가 연아에게 물었다.
“연아야. 근데 금도끼 은도끼는 다른 거 아냐? 그 할아버지 나오는 거자나. 콩나무는 잭인데.”
연아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개차냐. 우리 콩나무가 자라면 나를 왕자님에게 데려다줄 거야.”
준수가 은우에게 말했다.
“동화는 어려어. 로보시 조은데 그치?”
“콩콩이가 자라면 우릴 합체시켜 주거야. 그치?”
“응, 변신.”
준수가 주먹을 꽉 쥐며 팔을 내밀어 변신 자세를 취했다.
은우도 팔을 맞대며 변신 자세를 취했다.
저쪽에서 수녀님이 비료를 가지고 텃밭으로 오고 계셨다.
노랑이, 까망이도 수녀님을 따라오고 있었다.
은우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지금 텃밭은 너무 엉망이야. 수녀님이 오기 전에 데메테르의 재능을 불러와야만 해.’
은우는 재능창을 켰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풍요 레벨 1 – 0/1000
원하는 식물의 생장력을 높일 수 있다.]
‘이것만 있으면 준수의 [미니 콩]도 연아의 [콩나무]도 살아날 거야.
그리고 수녀님이 심은 것들도.’
수녀님은 방울토마토에게 비료를 주려고 다가갔다.
‘아니, 지난주까지만 해도 두 뼘밖에 안 되던 게 일주일 사이에 내 허벅지 높이까지 자랐네.’
수녀님은 너무나도 빠르게 자란 방울토마토를 보며 놀랐다.
‘노랑이와 까망이가 텃밭에 자꾸 돌아다니던데 여기서 똥, 오줌을 많이 쌌나? 고양이 똥, 오줌이 비료로 좋은가?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지?’
수녀님은 방울토마토 옆에 가져온 비료를 묻어주었다.
혜린이가 연아의 [콩나무]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수녀님. 연아 콩나무가, 콩나무가.”
“콩나무가 왜?”
수녀님이 혜린이의 말을 듣고 연아의 [콩나무]를 보러 달려왔다.
[콩나무]는 싹이 네 잎이나 돋아 있었다.
수녀님은 [콩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연아야. 네 [콩나무]는 정말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인가 보다. 왜 이렇게 빨리 자랐지?”
수녀님은 깜짝 놀라 옆에 있는 다른 강낭콩들도 살펴보았다.
은우의 [콩콩이]도 잎이 세 개가 달려있었고 준수의 [미니 콩]도 두 개의 잎이 달려있었다.
“우리 밭에 은혜가 뿌려진 걸까? 어떻게 이런 일이.”
수녀님은 모든 작물이 잘 자라고 있는 밭이 신기했다.
‘여기에 성당 건물이 들어선 게 벌써 30년이 넘었으니까. 그동안 농사를 지은 적은 없다고 들었어. 혹시 원래부터 비옥한 땅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 더 많은 작물을 심어야 하나?’
기대에 부푸는 수녀님이었다.
준수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니 콩]이 살아나서 신이 났다.
“주거니? 사라니? 사라따. 사라따. 내 미니 콩.”
“야옹.”
노랑이가 준수에게 축하한다는 듯이 울었다.
준수가 노랑이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어. 노랑아.”
연아는 신이 나서 수녀님에게 물었다.
“수녀님. 방울토마토는 언제 머글 뚜 이떠요?”
“한 달 정도 후에.”
“신난댜.”
혜린이가 수녀님에게 말했다.
“우리 토마토 싸서 소풍 가요.”
수녀님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소풍 가기 딱 좋은 5월이 끝나가는구나. 아기들 말대로 소풍을 가야겠어. 김밥도 싸고 상추랑 고추는 가져갈 수도 있겠네.’
수녀님이 아기들에게 말했다.
“그래, 날씨도 좋은데 소풍 가자.”
***
은우는 소풍 생각에 들떠서 집으로 오고 있었다.
‘대표님이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어린이집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너무 좋아. 소풍 갈 때 뭘 싸갈까? 김밥? 햄버거? 샌드위치? 과자는 뭘 사 가지? 아이스크림은 가져가면 녹으니까 못 가져가겠지.’
은우가 공동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늘은 아빠랑 삼촌이 맛있는 걸 해 놨을까? 메뉴는 뭘까? 보리는 뭐 하고 있을까?’
은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백인수가 은우를 맞이했다. 보리가 백인수의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햐뷰지.”
은우는 너무 반가워 백인수에게 안겼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많이 컸구나.”
백인수가 은우를 안아주었다.
“하뷰지. 보고 시퍼떠요.”
“이 할아비도 은우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은우가 나오는 거 다 봤지. [당신의 가요], [크레파스], [논개제].”
“하뷰지.”
은우가 백인수의 볼에 볼을 부비었다.
은우가 백인수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백수희와 창현이 함께 티비를 보고 있었다.
“눈나도 와따.”
은우가 백수희를 보고 말했다.
“도착하셨습니까? 공룡 변신 로봇님.”
“비밀번호능?”
“영영영영입니다.”
“정댭.”
두 사람의 케미에 창현이 웃었다.
“나보다 은우랑 더 잘 통한다니까.”
“은우랑 노는 게 재밌어요. 정신 연령이 똑같거든요. 우린.”
백수희가 백인수의 손을 잡고 있는 은우에게 다가가 간지럼을 피웠다.
“헤헤헤헤헤. 가안지러.”
은우가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은우가 간지러워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을 이리저리 뒤트는 탓에 배 쪽에 옷이 위로 말려 배가 드러났다.
백인수가 은우의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누구 배지?”
“은우 배.”
“아니지. 할아버지 배야.”
백인수가 은우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누구 엉덩이지?”
“은우 엉덩이.”
“아니지. 할아버지 엉덩이야.”
“내 엉덩이는 엄떠요.”
은우가 울상이 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인수는 은우가 너무나도 귀여웠다.
‘나이가 들면 손주 보내는 재미가 제일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아.’
백수희가 말했다.
“우리 은우 큰일 났네. 엉덩이도 없고 배도 없고. 어떻게 해?”
“내 엉덩이 차자주세요.”
“엉덩이 찾으러 갈까? 엉덩이가 어딨지?”
“요기 요기.”
은우가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요깄네.”
백수희가 은우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내 엉덩이야. 어디 가면 앙대. 나랑 꼭 이쨔.”
은우가 자신의 엉덩이에게 말했다.
백인수가 은우의 엉덩이를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갈 때 은우 엉덩이 가져가야겠다.”
“앙대. 앙대. 엉덩이 엄뜨면 안돼요. 하뷰지.”
은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수희가 창현에게 말했다.
“자자, 이제 맛있는 거나 먹을까요? 오늘의 메뉴는 뭔가요? 셰프님.”
“볶음밥과 갈비, 계란국입니다.”
“맛있겠다.”
창현이 상을 차리는 동안 백수희가 은우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뭐 했어?”
“강낭콩 심은 거 잘 자라는지 바떠요.”
“재밌었겠다. 강낭콩 많이 컸어?”
은우는 차마 자신의 재능 때문에 강낭콩이 쑥쑥 자랐다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녜니오.”
“하긴 식물 키우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야. 누나도 화분 키우려다가 죽고 그랬거든. 어렵더라. 그래도 대단하네. 우리 은우.”
“참. 어린이지베서 소풍 간대요.”
“소풍? 신나겠다. 누나도 소풍 가는 거 너무 좋아했었는데. 은우 첫 번째 소풍인가?”
“네네네네네.”
***
태현은 은우의 스케줄을 정리 중이었다.
‘전국 노래 경연대회에서 은우를 초대 가수로 초청하고 싶다고 했네. 은우가 여기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하니 다시 나가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팬들도 좋아하겠지.’
태현은 [보이는 라디오 출연]이라고 쓴 메모 아래에 [전국 노래 경연대회]를 적어 놓았다.
‘대학교 축제도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으니 가야 할 텐데. 어느 학교로 가는 게 좋을까? 일단 너무 먼 학교는 뽀뽀 댄스팀도 그렇고 가기 힘들 테니까 서울에 있는 학교부터 잡는 게 좋겠지.’
태현은 은우의 스케줄에 [재능대 축제]를 추가했다.
‘광고도 여러 개 들어오고 있는데 은우가 아직까지 촬영한 광고는 아기 장난감 광고밖에 없어서. 이번엔 아기들이 쓰는 물건 말고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물건을 광고하면 좋을 것 같은데.’
태현의 여러 개의 광고 제안서를 훑어보았다.
‘요구르트 광고, 아기용 화장품 광고, 과자 광고, 스포츠 브랜드인 라이키와 와이다스 광고.’
태현은 스포츠 브랜드계의 양대산맥인 라이키와 와이다스가 함께 광고 촬영을 의뢰한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은우가 이번에 노래를 부르면서 트레이닝복을 입어서 그런 것 같네.’
은우 때문에 거리에는 때 아닌 삼색 트레이닝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럼 라이키의 광고도 한 편 찍는 걸로.’
태현은 은우의 스케줄 표에 [라이키 광고]를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