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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재능흡수-132화 (132/257)

132화. 아이와 노인은 닮았다 (4)

길동은 은우를 차에 태우고 경로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은우의 벽화가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이야.

그래서 아예 이번에 벽화 그리기 풀 세트를 구비해 왔지.’

길동은 강라온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일 9시 뉴스에 소개될 거라고 하더라고. 은우 벽화 인기가 앨범 홍보에도 좋을 듯하니까 은우가 그림 잘 그릴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고 할머니들께도 예의 차려서 잘해 드려.”

길동은 자신이 그린 그림인 것마냥 어깨가 으쓱해졌다.

‘역시 우리 은우란 말이지. 못하는 게 없어.’

길동의 차가 경로당 앞에 멈춰 섰다.

은우가 내리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은우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은우야.”

“우리 은우 왔네.”

“우리 강아지 왔어.”

은우가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떼요. 할뮤니. 할뷰지.”

화성댁 할머니가 앞으로 나와 은우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은우야. 니가 그려준 그림 덕분에 내가 요새 잠도 잘 자고 얼마나 기분이 좋아졌는지 몰라. 전엔 늘 외로웠는데 요즘엔 괜찮아졌어. 여기 경자 할머니도 너에게 그림을 부탁하고 싶어 하는데.”

경자 할머니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림을 부탁할 수 있을까. 우리 엄마가 보고 싶어서 말이야.”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네네네.”

은우의 대답에 경로당에 있던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은우야. 나도 좀 그려줘.”

“나도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길동은 은우의 인기에 깜짝 놀랐다.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대체 은우의 그림 속에 어떤 힘이 있길래 이렇게 다들 은우의 그림을 받고 싶어 하는 거지?’

경자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을 정리했다.

“좀 기다려. 내가 먼저 그리기로 했잖아. 그리고 은우도 쉬어야지. 병나겠어. 그림은 한 번에 하나씩만 그려. 은우 이제 다섯 살이라고.”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차마 은우 앞에서 불만을 토로하진 못했다.

“은우야. 우리 집 쪽으로 가자.”

경자 할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은우를 이끌었다.

길동은 은우의 그림 도구를 들고 함께 따라갔다.

경자 할머니의 집은 오르막길 끝에 있었다.

경사진 골목길을 오르다 보니 은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헥헥.”

길동 역시 숨이 가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경자 할머니만은 숨소리가 달라지지 않았다.

길동이 경자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숨 안 차세요?”

“매일 오르내리는 길이 뭐가 숨이 차. 옆집 미순이 할머니는 이 길로 폐지로 주우러 다니는데.”

“폐지를요?”

길동은 순간 자신의 엄살이 부끄러워졌다.

은우는 미순이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아프리카를 떠올렸다.

‘아프리카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버려진 물건들로 돈을 버는구나. 나이도 많으셔서 허리도 안 좋으실 텐데.’

폐지를 줍는다는 미순이 할머니도 힘드실 테지만 경자 할머니의 허리도 많이 구부러져 있었다.

“할뮤니, 허리 안 아파요? 허리 아프면 앙대요.”

“할미 허리는 이렇게 구부정한 지 오래됐어.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래. 병원 다니고 약도 먹고 그러지. 늙어서 안 아픈 사람 몇이나 된다고. 늙으면 다 아픈 거야.”

은우는 할머니의 그 말이 마음이 아팠다.

‘파리넬리였을 때 77살까지 살면서 느꼈지. 늙는다는 게 어떤 건지. 늙으면 몸이 아파져서 아픈 몸 때문에 마음도 같이 약해져.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때의 감정은 늙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거야.’

은우와 길동은 경자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다.

“볼 건 없지만 물이라도 한 잔 줄게.”

경자 할머니가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옷장과 서랍장, 티비가 있는 방에는 선풍기 한 대와 나무로 된 앉은뱅이 밥상 하나가 있었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냉장고에서 100원짜리 요구르트를 꺼내왔다.

“미리 사 놓길 잘했지.”

할머니는 은우와 길동에게 요구르트 두 줄과 빨대를 내놓았다.

길동이 요구르트를 보더니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야. 너 요구르트 맛있게 먹는 법 아니?”

“녜니요.”

“자, 봐봐.”

길동이 빨대의 껍질을 벗겼다.

비닐에 쌓여있는 5개의 요구르트 중 하나를 겨누더니 빨대를 꽂았다.

“와아.”

은우는 길동이 껍질을 벗기지 않고 빨대를 꽂은 것에 감동했다.

“횬아. 대다네요.”

“형 초등학교 때 배운 거야. 이렇게 다섯 개에 모두 꽂아서 먹으면 맛있어.”

길동은 옆에 있는 4개의 요구르트에도 모두 빨대를 꽂았다.

“우아”

은우의 눈이 커졌다.

길동이 시범을 보이듯 빨대에서 요구르트를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요구르트 다섯 병이 빈 병이 되었다.

“우아.”

길동이 은우를 위해 다른 다섯 개의 요구르트에 빨대를 모두 꽂아주었다.

은우가 빨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도레미파솔.”

은우는 음계를 맞추듯 요구르트를 순서대로 마셨다.

“도레미파솔솔솔.”

순서대로 요구르트를 마신 뒤 마지막 병에서 세 번 빨대를 빨았다.

“도레미미미파파솔.”

이번엔 세 번째 병에서 세 번, 네 번째 병에서 두 번 빨대를 빨았다.

은우를 바라보면 경자 할머니가 웃었다.

“요구르트로도 잘 노는구나. 참 이것도 있는데.”

할머니가 서랍에서 땅콩 맛 알사탕을 꺼내서 은우에게 주었다.

땅콩 맛 알사탕은 할머니가 저녁에 혼자 티비를 볼 때 먹으려고 아껴두었던 사탕이었다.

“와 마시께땨.”

은우는 껍질을 벗겨서 입에 땅콩 맛 알사탕을 집어넣었다.

달콤한 사탕의 맛과 함께 땅콩 알갱이가 씹혔다.

‘오 이거 재밌는데.’

은우는 땅콩 맛 알사탕의 맛에 푹 빠졌다.

경자 할머니는 그런 은우가 귀여운지 은우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굽어진 경자 할머니의 손이 이마에 닿자 은우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어요.’

은우가 경자 할머니의 굽은 손을 주물렀다.

“할뮤니. 아프지 마요. 은우가 주물러 주께요.”

“아이고, 할미 괜찮아. 은우 손 아픈데 안 주물러도 돼. 이 작은 손으로 그림 그리랴 춤추랴 얼마나 바쁜데 할미까지 주물러.”

“아니에요. 할뮤니. 은우가 할뮤니 시언하게 해 주께요.”

은우는 경자 할머니의 어깨를 주물렀다.

“할뮤니 시언해요?”

“우리 은우가 주물러 주니까 시원하다. 은우는 어쩜 이리 마음씨도 고와?”

옆에 있던 길동이 경자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렀다.

길동의 손은 크고 힘이 세었다. 경자 할머니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시원하다. 내 인생에 이게 웬 호사냐?”

“할뮤니, 할뮤니 엄마 얘기 해주떼요.”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날 위해서 햇감자를 포실포실 곱게 삶아주시곤 했어. 지금이야 감자가 귀하지만 그땐 아니었거든. 매일 아침마다 내 머리를 곱게 땋아주셨지. 지금은 흰머리 가득이지만 그땐 나도 은우만큼이나 예뻤어.

엄마가 머리를 묶어주실 때마다 말씀하셨지. 우리 이쁜 경자는 이 담에 누구한테 시집갈까? 그럼 내가 대답했어. 경자는 시집 안 가고 엄마랑 살 거예요.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장에 가서 고무신도 사 주셨는데 그 고무신이 너무 좋아서 신지도 못하고 꼭 껴안고 잤었거든.

우리 엄만 부지런하기로 동네에서 소문나신 분이라 잔칫집마다 불려 다니며 잔치 음식도 하고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이집 저집 바느질도 하러 다니시고 그랬어. 그래서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가난해도 집에 늘 활기가 흘렀지. 그땐 참 행복했는데.”

“할뮤니 엄마는 참 조은 엄먀 여뜰 거 가타요.”

“맞아. 지금도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맘 편히 웃어본 기억이 없어. 술주정뱅이 아버지 대신 내가 동생들을 돌봐야 했거든. 아버지는 매일 술만 찾았어. 서툰 솜씨로 청소, 빨래, 밥을 해야 하는데 무엇도 쉽지가 않았지.”

은우는 파드와였을 때의 자신의 인생이 떠올랐다.

‘할머니도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사셨구나. 할머니 저도 파드와일 때 아빠,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할머니의 그 맘 저도 알 것 같아요.’

은우는 그림 도구를 챙겨 경자 할머니의 집 앞으로 나왔다.

‘비탈길이라는 것을 활용해서 그림을 그리면 좋을 것 같아.’

은우는 생각을 정리한 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면의 끝에 경자 할머니를 그리고 반대쪽 벽면의 끝에 경자 할머니의 엄마를 그릴 거야. 경자 할머니가 엄마에게 달려가는 느낌이 나게.’

은우의 손끝에서 8살의 어린 경자가 살아나고 있었다.

양갈래 머리를 묶은 경자는 새로 산 고무신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맞은 편에는 경자의 엄마가 밝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재능을 불러와야겠어.’

[올림포스의 천마 페가수스의 시인의 상상력 레벨 2.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시각, 청각, 촉각, 후각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경자 할머니는 어머니의 음성을 들었다.

“경자야. 수고 많았다. 배고프지. 얼른 와. 엄마가 밥 해 줄게.”

8살로 돌아간 경자 할머니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

경로당에서는 오랜만에 잔치가 벌어졌다.

경자 할머니가 감자전을 굽고 있었다.

화성댁이 경자 할머니에게 말을 붙였다.

“언니가 한 감자전 참말로 맛있는데.”

“우리 엄마한테 배웠던 거야. 오늘 솜씨 발휘할 테니까 많이들 먹어.”

옆에는 경선이 할머니가 비빔국수를 만들고 있었다.

“아주 오늘 잔치네. 잔치.”

경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은우가 오면 매일 잔치지.”

경로당에는 잔칫상이 차려졌다.

상 위에 놓여진 잡채, 불고기, 감자전, 비빔국수, 동그랑땡에 길동은 침이 꼴깍 넘어갔다.

경자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은우가 저한테 멋진 그림을 그려줘서 제가 한턱 쏘는 거니 다들 맛있게 드세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말했다.

“은우 덕분에 우리가 호강하는구만.”

“이번에 은우 음반이 나왔다던데 밥 먹기 전에 은우 노래 한 곡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음반이 나왔어? 그럼 당연히 우리가 노래를 들어봐야지.”

“은우 노래 박수.”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은우는 일어서면서 생각했다.

‘내 노래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하실까? 평소 들으시던 노래랑 달라서 싫어하시면 어쩌지?’

할머니들은 손뼉을 치시며 박자를 맞추셨다.

할아버지들은 일어나서 어깨를 덩실덩실 손을 감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저건 내가 본 춤들과 다르네. 손을 머리 쪽으로 감기만 하면 되는 춤인가.’

은우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들의 춤이 신기했다.

은우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리를 냐셔면 날 보는 시션들.

누냐, 횬아, 할뷰지, 할모니

내갸 그러케 기여운가여.

내갸 지나갈 때먀댜 냘 향한 시션들.

멀리셔도 냐를 쫓는 시션들.

내갸 그러케 기여운가여.]

할아버지의 춤사위가 빨라졌고 할머니들의 박수 소리도 빨라졌다.

춤을 추는 할아버지가 은우의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내에가아 그르케에 귀이여운 가아요. 내에가아 그르케에 귀이여운 가아요. 내에가아 그르케에 귀이여운 가아요.]

할아버지는 은우의 노래 가사를 전부 [내에가아 그르케에 귀이여운 가아요.]로 바꿔서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음은 천천히 늘어졌다. 마치 트로트를 부르는 것처럼.

은우는 할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 매우 정겹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지금 정말 사랑스러우세요.’

노래는 후렴구로 접어들었다.

은우가 노래를 계속했다.

[난 너무 기여워. 난 너무 사랑스러어.

여러분도 너무 기여어. 여러분도 너무 사랑스러어.

우린 모두 소중해.]

할머니들도 은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여러부운도 너무우 귀이여워. 여러부운도 너무우 귀이여워. 우리인 모오두우 소오주웅해애.]

과도하게 꺾는 긴 음들에 은우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 노래를 즐기고 계셔. 할머니, 할아버지. 수고 많이 하셨어요. 모두 정말 소중하신 분들이에요.’

***

강라온은 은우의 크레파스 출연 후 반응을 체크 중이었다.

‘은우가 피아노 치는 장면에 대한 칭찬이 많았어. 보리와의 모습들도 좋은 평을 받았고 덕분에 애견용 가전과 피아노 광고가 들어오기도 했지.

하지만 일단 [나의 강아지에게]는 타이틀곡이 뜬 다음에 밀어야 할 곡이어서 우선 타이틀곡을 널리 알려야 해. 음악 방송 출연을 더 잡아야 해.

곧 있으면 대학교 행사 시즌이니까 대학교 행사도 좋을 것 같고.

’9시네.‘

강라온은 은우의 뉴스가 나온다고 들었던 bbs 채널을 켰다.

“독거노인들이 주로 사는 OO동은 한동안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동네였습니다. 젊은 부부들이 살지 않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끊긴 지 오래였는데요. 이런 동네의 분위기를 바꿔놓은 것은 한 점의 벽화였습니다.”

카메라에 은우가 그린 벽화가 비친다.

첫 번째 벽화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영하는 명석이의 그림. 옆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가 서 있다.

두 번째 벽화는 골목 입구에 서서 우산을 든 채 부인을 기다리는 젊은 남편과 남편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 아내.

“두 점의 벽화에는 모두 할머니들의 인생이 담겨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화면에는 경선이 할머니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있다.

할머니의 얼굴 아래 깔리는 자막

이경선(76)

“제가 처음부터 할머니는 아니었거든요. 저도 예쁜 젊은 시절이 있었어요. 이 그림을 보면 저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요.”

화면에는 화성댁 할머니가 수수한 차림으로 밝게 웃고 있다.

할머니의 얼굴 아래 깔리는 자막

최순옥(71)

“월남전에 참전했다 죽은 남편을 평생 그리워했는데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남편을 보니 너무 좋아요.”

카메라는 다시 기자를 비춘다.

“할머니들에게 잃어버린 청춘을 찾아준 벽화를 그린 사람은 이은우, 다섯 살 난 아기입니다. 은우군은 얼마 전 [난 너무 귀여워]라는 곡으로 첫 앨범을 발매했는데요. 우리에게는 [위대한 목소리]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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